광장에 선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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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선 성령님
  • 정지영
  • 승인 201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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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주의자들이여, 도취하지 말고 참여하라

2009년 〈타임〉과 〈뉴욕 타임스〉는 ‘세상을 바꿀 100가지 사상들’ 중 하나로 북미에서 일고 있는 새로운 칼뱅주의New Calvinism를 주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운동의 영향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신자’ 공황 시대에 개혁파 교회와 진영은 성장했다(이 현상은 출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세계가 주목했던 이 운동이 올해로 10년을 맞았다. 


알버트 몰러, D. A, 카슨, 존 파이퍼 같은 미국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이 부흥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마크 드리스콜, 매허니 등이 윤리적 문제로 운동에서 이탈하더니 최근에는 「NO 데이팅」으로 현대 젊은이들의 순결 문화에 큰 도전을 준 조슈아 해리스가 기독교 신앙을 저버렸다. 그 사이 팀 켈러 같은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고, 부침의 속도가 다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개혁파 진영에서 이를 주도했던 리더와 젊은이들이 운동에 염증을 느끼거나 이탈하고 있다.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와 부패한 정치권력을 바꾸는 시민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사이, 교회는 시민 사회로부터 점점 더 괴리되어 가고 있고, 오히려 광장에 나와 태극기를 흔드는 이데올로기 종교, 꼰대의 종교가 되어 버렸다. 


이 상황에서 한때 기독교의 미래, 복음주의의 브레인으로 인식되었던 개혁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최근 출간된 「아브라함 카이퍼의 공공신학과 성령」이 이런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어쩌면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학 분야인 공공신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을 줄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 빈센트 바코트가 박사학위로 제출한 논문을 대폭 다듬어 단행본으로 출판한 책으로 기독교 공공신학의 신학적 근거를 개혁파 공공신학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성령론에서 찾으려는 참신한 기획이다. 이것이 참신한 이유는 신칼뱅주의Neo Calvinism의 창시자 카이퍼에 대한 연구가 주제에 있어서는 일반은총론과 교회론적으로, 텍스트로는 주로 「칼빈주의 강연」과 「일반은총론」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던 것에 반해, 이 책은 카이퍼의 주요 저작임에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성령의 사역」을 주제와 텍스트로 삼아 진행된 연구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자신의 연구가 아브라함 카이퍼 연구 및 성령론, 공공신학 분야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람은 상당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은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공공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 정보를 제공한다. 2장은 공공신학자로서의 카이퍼를 제대로 보여 줄 그의 절정기를 들여다본다. 3장은 카이퍼가 그의 주요 연설과 저술에서 성령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분석한다. 4장은 앞장에 근거해 카이퍼 공공신학의 핵심 개념인 청지기직을 살핀다.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5장은 19세기 직조된 카이퍼의 공공신학을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저자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책의 가치를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 장의 내용을 조금 더 톺아볼 필요가 있다. 

 

1장에서 저자는 카이퍼의 공공신학이라는 직조물을 세 가닥의 실로 풀어낸다. 창조세계, 공공신학, 아브라함 카이퍼 및 그의 저작이 그것이다. 가장 먼저 저자는 성령론을 창조세계와 연결해 이해한 현대 신학자들—게이코 뮐러-파렌홀츠, 싱클레어 퍼거슨, 콜린 건톤, 위르겐 몰트만, 클라크 피녹, 마크 월러스―의 핵심 주장을 개관한다. 「잊혀진 아버지」에서 톰 스메일이 잘 보여 주었듯이, 그동안 성령론은 기독교 교리에서 잊혀 있었고, 관심이 있더라도 기독론과 구원론에 국한되었다. 창조세계와 성령의 관계와 그것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는 우주론적 성령론에 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칼뱅주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칼뱅을 성령의 신학자로 이해하는 유의미한 시도가 있었을 뿐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이들을 포함해 적지 않은 개혁파 신학자들이 있었지만, 이는 말 그대로 예외적이었고 그것도 최근의 일이었다는 점에서도 카이퍼의 성령론에 대한 이러한 저자의 시도는 무척 고무적이다. 


두 번째 가닥인 공공신학에서 저자는 현대 공공신학을 대표하면서도 대조되는 두 명의 신학자를 소개한다. 공공신학에 있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맥스 스택하우스는 다원화와 세계화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의 위기에 주목하며, 철학과 과학, 윤리학, 사회학의 통찰을 적극 차용해 사적 영역으로 쫓겨난 종교(형이상학적, 도덕적 전망)를 복권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가 시민 사회의 삶을 향상시킬 의미와 가치를 제공해 줘야 함을 강조한다. 스택하우스는 자신의 변증적 공공신학의 근거를 성경, 전통, 이성, 경험이라는 웨슬리 사변형에서 찾는다. 이와 대조되는 고백주의 공공신학을 대표하는 로날드 씨먼은 다원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의 특수성과 기독 신앙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보편성을 내포한 공적 쟁점들을 성실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반립antithesis을 강조한 로날드 씨먼의 고백주의 공공신학은 놀랍게도 조직 린드벡의 문화언어학적 접근과 매우 유사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공공신학자로서의 면모에 주목한다. 스스로가 목회자, 신학자, 교육가, 언론인, 정치가라는 신분으로 공적 영역에 구체적이고 활발하게 참여했던 카이퍼야 말로 공공신학의 실체라는 측면에서, 이는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공공신학자로서의 카이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조금 더 자세하고 면밀한 조사가 필요로 한다. 이를 저자는 2장에서 한다.  


2장은 1장 말미의 논의를 이어 카이퍼와 그의 공공신학 단초들이 1890년부터 1905년까지의 절정기에서 어떻게 만개했는지를 자세히 살핀다. 이때는 카이퍼가 종교, 교육, 정치 영역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을 뿐 아니라 성숙해진 시기였다. 저자는 반혁명당 활동과 자유대학 설립으로 대표되는 그의 영역 주권 사상, 자신의 공공신학을 잘 담은 주요 연설들—‘마라나타’(1891년 반혁명당회의), ‘사회문제와 기독교’(1891년 기독교사회회의), ‘경계 흐리게 하기’(1892년 자유대학교 총장 취임), ‘칼뱅주의 강연’(1898년 스톤 강좌)—등의 자료와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수상으로서 재임하면 했던 일들을 통해 그의 사상을 분석한다. 이를 바탕으로 내린 저자의 결론에 따르면, 카이퍼는 로날드 씨먼의 고백주의 공공신학과 맥스 스택하우스의 변증적 공공신학 요소를 모두 담지한 공공신학의 모판이다. 공공의 삶에 대한 기독교와 기독교의 접근방식 사이의 대립을 강조했던 카이퍼의 공공신학은 절묘하게도 두 공공신학자들과 공명한다. (특히 맥스 스택하우스는 카이퍼가 ‘칼뱅주의 강연’을 했던 스톤 강좌를 주최한 프린스턴 신학교 소속으로 카이퍼와 느슨하게나마 신학적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카이퍼는 공공신학에 대한 내용에서뿐 아니라 그의 천부적인 수사rhetoric를 통해 청중으로 하여금 공적 영역에 참여하게 만드는 탁월함을 갖고 있었다. 


카이퍼의 공공신학에서의 성령론을 다룬 3장은 성령과 창조세계에서의 청지기직을 다룬 4장과 함께 이 책의 백미로 카이퍼와 공공신학을 다룬 기존의 책들과 어떻게 차별되는지, 카이퍼 공공신학 연구를 어떤 면에서 진일보시켰는지를 명쾌하게 보여 준다. 저자는 카이퍼 공공신학의 핵심 주제인 일반은혜 교리를 성령론의 맥락에서 해석한다. 저자에 따르면 카이퍼는 창조세계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크게 세 측면으로 이해한다. 첫째, 하나님이 창조세계 안에 넣어두신 잠재력과 목적이 극치에 이르도록 촉진하시고 완성하신다. 둘째, 선택받은 자들을 다시 세우실 뿐 아니라 모든 생명에 생기를 불어넣으신다. 셋째 죄에 맞서 창조세계가 혼란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으신다. 카이퍼는 창조세계에서의 일반은혜의 기능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를 창조세계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진술할 때 동일하게 사용한다. 카이퍼가 성령의 우주적 사역을 일반은혜의 목적과 같다고 봤다는 것이다. 카이퍼는 성령을 일반은혜의 역동적인 동력으로, 일반은혜의 대행자이자 일반은혜의 배경을 제공하는 분으로 이해했다. 여기에 덧붙여 저자는 카이퍼의 일반은혜 이해에 있어 제기되었던 일련의 우려들—헨리 반틸-성경적 근거의 부족, 야곱 클랍베이크-이원론이고 신비주의적 요소, 코넬리스 판 더 코이-지나친 낙관론과 영원하신 성자와 성육신하신 성자에 대한 이원론적 이해—에 대한 적절한 답을 카이퍼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S. U. 주이데마와 리처드 마우의 주장을 빌어 제시한다.


4장은 창조세계에서의 성령의 사역에 관한 카이퍼의 이런 이해가 그러면 어떤 공공신학으로 구현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아놀드 판 룰러의 우주적 성령론과 대화하며 카이퍼의 창조세계와 공공신학, 성령론을 좀더 진지하게 성찰한 저자는 카이퍼의 공공신학이 창조세계에 관한 ‘책임 있는’ 청지기직으로 구체화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환경 파괴가 보여 주듯이 청지기직을 지배를 위한 자격증으로 오해해 오용하고 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 용어를 찾기보다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문화명령을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적 개념들에 지배당해 벌였던 지난날의 과오를 들어 창조세계에 대한 청지기직의 무용성을 말하기보다는 청지기직을 제대로 적용하는 데 힘써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책임 있는 청지기직에 도달할 수 있는가? 카이퍼는 ‘세상을 다스리라’는 성경의 명령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르게 알게 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의미, 그리스도의 사랑의 주되심이라는 관점에서 바르게 이해해야 함을 말한다. 남용과는 거리가 먼 이 통치는 선택받은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아래에 있는 모든 세계에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수행해야 할 ‘거룩한 의무’다.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5장에서 저자는 앞서 살핀 카이퍼의 유산을 좇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공적 영역으로 담대히 나가라고 도전한다. 이 일에 예외는 없으며 예외적 영역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카이퍼주의를 재검토하는 것이 먼저다. 카이퍼 또한 시대의 아들이었음을 인식하고, 그는 그의 시대에 당면했던 다양한 도전들에 맞서 공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신학적 근거들을 발견하고 그에 따른 접근방식을 개발하려고 했을 뿐이었음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이는 카이퍼의 원리들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계화, 기술 진보, 다원주의, 시장 경제, 보건 위기, 민족과 계층의 갈등 같은 공적 이슈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깊고 상세한 지식들을 제공받는 우리 진영 바깥의 대화들에 적극 뛰어들어야 한다. 때로는 지나친 승리주의에 도취할 위험도 있고 지나친 낙관주의적 전망에 우리의 역사가 제동을 걸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의 번영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앞서 언급했듯이 「아브라함 카이퍼의 공공신학과 성령」은 창조세계 및 역사와 관련된 성령론, 공공신학, 아브라함 카이퍼의 저작이라는 세 가닥들이 어떤 관계 속에서 그의 공공신학으로 직조되었는지를 드러내고 체계화함으로써 19세기 개혁신학의 거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공공신학을 지금 여기의 상황에 맞게 재진술하고 재상황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이를 모범적으로 성취해냈다. 무엇보다 전통적 조직신학의 지평, 특히 구원 사역에 갇혀 있던 성령을 창조, 타락, 구속이란 우주적 차원으로 이해하게 해 주었다는 점과, 모든 인간들 중 가장 참을 수 없는 부류인 승리주의에 도취된 칼뱅주의자들에 대한 신랄한 반성과 함께 그들의 신학이 자신들의 교회뿐 아니라 온 세상을 이롭게 하는 신학이란 점을 깨닫게 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책이다. CTK 2019:9

 


정지영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편집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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