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 새롭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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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비유" 새롭게 읽기
  • 권해생
  • 승인 2019.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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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난제 해설

No.10 누가복음 15:11-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복음 15:32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비유다. 그동안 많은 설교자들은 주로 탕자의 죄와 회개에 초점을 맞춰왔다. 아버지 생전에 유산을 요구하는 것이 유대 사회에서 얼마나 큰 죄인지를 지적하였다. 또한 아버지의 유산을 방탕하게 허비한 아들의 잘못도 강조하였다. 마침내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께 용서 받은 것을 언급하며 회개를 촉구하였다. 


이와 같이 교회 강단에서 이 비유는 주로 회개를 촉구하는 구원론적 관점에서 해석되고 전파되었다. 전혀 근거가 없거나 틀린 해석은 아니다. 오히려 죄와 회개는 우리가 꼭 들어야 할 말씀이다. 


그런데 점차 성경학자들은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성품에 무게중심을 두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기다림 또는 아버지의 용서를 강조한다. 이 또한 틀린 해석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한없이 기다리시는 분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죄인이 회개하면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라 일컬었다면, 최근에는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비유”(D. L. Bock) 또는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개역개정)라고 한다. 이 비유에 대한 팀 켈러의 해석이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탕자의 비유는 두 아들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탕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이상의 모든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 아니며, 또한 굉장히 은혜로운 해석이다. 탕자의 회개와 아버지의 사랑은 본문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개념이 과연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원래 의도를 충분히 잘 드러낼 수 있을까? 죄인의 회개나 하나님의 사랑은 중요한 주제이지만, 이런 개념은 예수님의 의도를 온전히 다 담아낼 수 없다. 


이 비유는 사랑과 기쁨, 참여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읽어야 한다. 이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집 나간 탕자를 아버지가 얼마나 사랑하며, 그가 돌아왔을 때 얼마나 기뻐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잃은 영혼을 찾은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라는 주제로 끝난다. 그래서 비유를 듣거나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묵상하고, 그분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한다. 

 

바른 해석을 위한 열쇠: 비유의 대상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연속으로 나오는데, 개역개정은 단락 나눔을 잘못 하였다. 첫 번째 비유가 1절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표시하였지만, 사실 1-3절은 뒤따라오는 세 비유의 배경을 설명해 주는 도입부에 해당한다. 따라서 첫 번째 비유는 4절부터 시작된다. 


도입부에서는 예수님이 당시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가 나온다.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나왔다. 예수님은 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과 교제하셨다. 이때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세 개의 비유를 들려주신다(15:3). 이와 같이 예수님의 비유의 첫 번째 청중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굶주림이나 병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안식일 전통을 어긴다며 사람들의 굶주림과 병을 해결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하였다(6:1-11). 또한 한 바리새인은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을 때, 죄인과 접촉하시는 예수님을 속으로 비난한다(7:36-50).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무엇에 관심이 있었을까? 그들은 전통을 기초로 사람들을 정죄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저 사람이 전통을 어기는지 안 어기는지 정죄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전통을 어기는지,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의 아픔이나 사정에 무관심하였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돈과 명예를 좋아하였다. 사람들에게 박수 받고, 자기 이름이 높아지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부정한 방법이라도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좋아하였다.

“화 있을 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 도다.”(누가복음 11:43)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누가복음 16:14)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0:46-47)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관심이 있으셨다.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셨다. 이 일을 위해 오셨고, 이 일을 위해 죽으셨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사람중심이셨다. 그래서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음식을 같이 드셨다(15:2). “영접하다”는 말에는 환영과 교제가 의미가 녹아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비난 받는 사람들을 환영하셨다. 그들과 먹고 마시며 교제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셨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과 기쁨을 모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에 대해 수군거렸다. 따라서 탕자의 비유는 바로 이러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대상으로 한다(15:3). [전문보기: "탕자의 비유" 새롭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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