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에서 글쓰기까지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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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에서 글쓰기까지 [구독자 전용]
  • 송인규
  • 승인 20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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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규 교수의 책 이야기 | 책집에서

 

 

나와 ‘책집’을 공개한 지 2년하고도 반이 지났다. 책 읽기에 대한 나의 소신을 피력하다 보니 거의 필연적으로 글쓰기라는 창조적 몸부림 또한 덩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책 읽기가 들이쉬기라면, 글쓰기는 내쉬기에 견줄 수 있겠다. 들숨과 날숨을 분리할 수 없듯 책 읽기가 곧장 글쓰기의 주제로 이어진 것이다. 책집 이야기를 자분자분 풀어 가면서 언뜻 깨달은 것은, 결국 내가 나의 신앙과 인생 여정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책집은 책 읽기와 글쓰기 작업을 함께 아우르는 나만의 지성ㆍ신앙ㆍ창의의 공간이 되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책 읽기가 반드시 책집에서만 실행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는 더더군다나 책집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껏 이면지를 활용해 손으로 글을 쓰고, 아내가 그것을 자판으로 두드려 컴퓨터에 입력하기 때문이다. 종이에 적은 내용이 즉시 컴퓨터 스크린에 나타나도록 하려면, 글쓰는 작업은 아무래도 아내가 가까이 있는 집의 환경 속에서 수행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책집”은 두 가지 수준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은,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책집이다. 우리집을 나가 횡단로를 건넌 후 오른편 언덕 쪽을 향해 걷다 보면 길옆에 빌라가 한 동 있는데, 그 동의 203호가 바로 책집이다. 책집에는 세 개의 방과 응접실 용도의 공간이 있고, 방이나 공간은 서가로 가득하다. 그리고 서가 마다 여러 가지 주제의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다.

그런데 “책집”은 내 머릿속에도 존재한다. 이것을 정신적 공간으로서의 책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어디에 있든 눈을 감으면 내 머릿속에는 책집의 공간이 펼쳐진다. 어느 방 왼쪽 서가의 1, 2열에는 어떤 종류의 책이 진열되어 있고, 그 방을 나와 통로 오른편 서가에 이르면 바닥에 어떤 주제의 책이 꽂혀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기억 내용이 세부에 있어서까지 정확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비록 내가 머리로 그리는 것이 실상을 완전히 재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공간으로서의 책집은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책집과 하부 얼개에 가깝도록 상응이 된다.

나는 지금껏 이렇게 두 가지 수준의 책집을 드나들며 책 읽기와 글쓰기를 해 온 셈이다.

 

책 읽기: 아쉬움을 넘어 현실론적 대안으로

책 읽기의 이유, 유익, 방법 등을 기술하고 크리스천 마인드ㆍ세계관ㆍ영성ㆍ학문과 신앙 등에 관한 책들을 소개한 것으로 인해, 내가 혹시 책 읽기의 “도사”나 “달인”으로 비추어졌을까봐 상당히 마음이 불편하다. 사실 나의 책 읽기는 여러 걸출한 인물들에 견주건대 미흡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다. 우선, 기독교 범주 밖 일반 서적과의 접촉이 너무 적었다. 특히 동서양의 고전들과 교양 도서들을 제대로 탐독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마음은 원이로되 앞으로도 실현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특히 원래 소설 등 문학류의 글을 좋아했는데,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그만 단절되고 말았다. 또 철학 공부를 뒤늦게 시작한지라 이 방면의 책들도 읽지 못한 것이 많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관련 서적에 있어서도 분석철학 전통의 철학신학이나 개혁파 조직신학(교의학) 분야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다른 분야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놓치거나 부분적으로만 파악한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기독교 사상이나 교리의 역사적 뿌리와 흐름을 논하는 책들―예를 들어, 교리사ㆍ기독교 사상사ㆍ신학과 철학 사이의 상호 교류를 다루는 학제간 전문 서적들―을 섭렵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학문적 응어리로 남아 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신체적ㆍ학구적ㆍ환경적 한계로 인해 모든 것을 다 추구할 수는 없다. 이것은 책 읽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내가 늘 아쉬움과 회한을 지니는 것은 꼭 욕심의 발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결국 나는 책 읽기와 관련하여 일종의 중용을 취하기로 했다. 너무 욕심을 많이 부려 수시로 좌절과 실망에 빠지는 경향으로 치닫지도 말고, 아무런 꿈이나 욕구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현 상태에만 급급하는 지적 게으름 또한 마다하는, 제3의 방도 말이다. 자극을 받고 흥미가 발동하는 대로 낯선 분야의 책을 펼치기도 하고, 실현 가능성이 낮지만 이런저런 종류의 책 읽기를 구상하기도 하며, 비록 다 읽을 수 없지만 아직도 관심을 끄는 주제의 책들 앞에서 한참 동안 서성거리기도 하는 것…, 그것이 내 책 읽기의 반복되는 면모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직껏 제칠일안식교의 교리 체계와 그 교단의 움직임에 지적으로 크게 자극을 받곤 한다. 비그리스도인 학자 가운데 진화론을 거부하는 이들의 논거와 설명에 접하면 머리에서 김이 솟을 정도로 골몰하게 된다. 몸과 영혼의 관계에 대한 각종 수준의 책자들, 여러 입장의 논점에 접하면 전 존재가 흡입되는 느낌을 받는다.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다윈의 진화론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그들 사이의 입장 차이가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는 항구적인 관심거리이다. 신 무신론new atheism이 종교계―여기에는 기독교계와 복음주의 서클도 포함된다―를 강타한 이후 어떤 종류의 변증학 서적들이 출간되는지, 그 동향 파악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다. 철학 신학에 머물지 않고 이제는 “분석 신학”analytic theology이라는 명칭까지도 획득한 분야의 신학 논제들을 일별하노라면 가슴이 쉬지 않고 쿵덕거린다. 이러한 자극과 욕구가 활성화되는 한 나의 책 읽기는 중단될 수 없을 것이다.

 

글쓰기: 회고와 포부

내가 지은 책자를 살펴보면 얼추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양육과 훈련을 위한 표준 자료standard material로서, 성경 공부 교재, 소책자 및 단행본의 형태를 갖춘 것들이다. 소책자로서는 「행복은 당신에게도」(IVP, 1984), 「오염된 사랑 이야기」(IVP, 1984), 「영성에의 추구」(IVP, 1999) 등이 있다. 성경 공부 교재로는 「새로운 삶의 길」(IVP, 1978), 「행복에의 초대」(IVP, 1979), 「푯대를 향하여」(IVP, 1985), 「아볼로 성경 공부 1, 2, 3」(IVP, 1994) 등이 있다.

단행본의 형태를 갖춘 것으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IVP, 1984), 「정말 쉽고 재미있는 평신도 신학 1, 2」(홍성사, 2001), 「성경,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01), 「아는 만큼 누리는 예배」(홍성사, 2003), 「일반 은총과 문화적 산물」(부흥과개혁사, 2012)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표준 자료들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배우고 깨우쳐야 할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나 스스로의 고민과 괴로움 가운데 몸부림치며 해결을 모색한 끝에 내놓은 글이나 책들이다. 여기에는 주로 단행본이 속하나 가끔 소책자와 책자 내의 일부 기사도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다룬 주제로는 갈등, 용서, 자아상, 비난, 거짓말, 선악과, 복, 구조악 등이 있다. 단행본으로서는 자위행위의 문제를 파헤친 「고립된 성」(IVP, 1998)과 야망ㆍ질투ㆍ경쟁의 이슈를 다룬 「세 마리 여우 길들이기」(IVP, 2004)가 대표적인 예이다.

두 부류의 자료 가운데 아무래도 애착이 더 많이 가는 것은 후자의 범주에 속하는 글과 책자이다. 특히 갈등, 거짓말, 복, 구조악, 자위행위, 야망, 질투 등의 주제와 이슈는 나의 신앙에 난공불락의 장애물로 비쳐졌기 때문에, 그런 괴물들과 싸우면서 나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 무척이나 귀하게 여겨진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지력과 체력이 쇠하는 그 순간까지 여러 종류의 글/책을 쓰고 싶다. 그 중 오랫동안 초미의 관심사로 자리 잡은 주제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다. 이것은 칼빈주의 입장의 주권관을 신학적ㆍ철학적으로 변호하는 전문서이다. 한국에 장로교도와 칼빈주의자들이 많지만 지금까지 이 주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책이 없기 때문에 꼭 쓰고 싶었는데, 자료만 갖추어져 있고 아직껏 저술 작업에는 착수하지 못했다. 또 조직신학을 전문적으로 가르쳐 본 이라면 누구나 한국 교회 실정에 맞는 조직신학의 집필을 꿈꾸기 마련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오래 전부터 2권으로 된 ’기독교 교리 개요‘를 쓰겠노라고 계획을 토로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나의 향후 희망 저술서 목록에는 ‘창조와 진화: 세 가지 입장’ ‘몸과 영혼의 관계’ ‘열두 가지 설교문’ ‘하나님의 음성이란 무엇인가?’ ‘질문과 답변의 변증학’ 등의 가제들이 자리를 다투며 줄을 서 있다. 혹시 그 외에도 여력이 된다면 종교 철학, 학문과 신앙, 하나님의 영광, 악의 문제, 성경과 과학적 언급, 샤머니즘과 기독 신앙, 조상 숭배와 기독교 등의 주제에 대해 글을 써 보고 싶다.

새로운 주제로 글/책을 쓰기로 한다면, 책집이나 연관 장소의 서가는 긴 간격의 간만干滿 현상을 겪을 것이다. 이 현상은 3국면으로 구성이 된다. 제1 국면은 썰물 현상이다. 이 때 책집의 특정한 서가에 꽂혀 있던 책들이 몽땅 빠져나간다. 이 서가는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책들이 정리되어 있었던 곳이다.

제2 국면은 책자의 집필에 소요되는 긴 기간과 일치한다. 내 경우에는 책집(혹은 연관 장소)에 있던 책들을 내 방의 책상 오른쪽으로 옮겨 놓는 일부터 시작된다. 글을 쓰면서 여타의 필요한 자료가 책집에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낮 시간이건 밤중이건 새벽 3시건―찾아 나선다. 내가 소장하고 있지 않은 책이면 즉시로 구입을 서두른다. 책을 읽다가 연관된 내용이 있다 싶으면 책갈피를 꽂아 두는데, 이것이 반복되면서 책갈피로 표시된 책들이 즐비하게 쌓여 간다. 책상과 집은 크게 어질러지고, 내가 점유한 공간 전체는 이곳저곳에 놓인 자료와 출력물, 논문과 책들로 쑥대밭처럼 혼잡스럽다. 글의 질서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이 무질서의 상태로 빠진 것이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제3 국면인 밀물 현상이 도래한다. 각종 자료, 논문, 출력본, 책들은 주제별로 정리된다. 책에 꽂혀 있던 책갈피들은 본래의 보관 통으로 되돌아간다. 모든 책들은 다시금 책집(및 연관 장소)으로 옮겨진다. 긴 기간 동안 비어 있던 서가는 전처럼 책들로 붐비고 작은 공간의 여유도 없이 빡빡해진다. 드디어 책의 밀물 작용이 클라이맥스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글/책을 쓰는 동안에는 길고 짧은 간격의 간만 현상이 예고도 없이 반복적으로 찾아올 것이다.

 

책 읽기와 글쓰기의 역학

책 읽기와 글쓰기는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일까? 사람마다 지내 온 배경이 다르고 서로 다른 인생 (및 신앙) 여정 가운데 자기 나름의 요령과 비법을 터득했을 것이므로, 무어라 한 마디로 답하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경험과 내가 잘 아는 이들의 상황을 감안하여 둘 사이의 관계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제 나는 책 읽기와 글쓰기의 관계를 묘사하는 네 단계를 예시할 생각이다. (내 경우에는 이 네 가지 관계가 대체로 “발전적” 양상을 띠고 출현했기 때문에 “단계”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혹자는 이 네 가지 관계가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발견되는 점을 염두에 둔 채 “단계”보다는 그저 “패턴”으로 간주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할 수도 있다. 비록 내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제안에 크게 반대할 의사도 없음을 밝힌다.)

그러면 책 읽기와 글쓰기의 관계에 대한 네 가지 단계는 무엇인가? 우선 이 단계들을 도표로 제시한 뒤 하나씩 설명하면 이해가 좀더 쉬워지리라고 생각한다.

 

 

첫째 단계인 “별개”의 단계는 그야말로 말 그대로 책 읽기와 글쓰기가 따로따로 노는 때이다. 어떤 개인에게서 책 읽기와 글쓰기의 활동이 발견되지만, 이 두 가지가 그의 의식과 의도 가운데 서로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나의 경우에는 IVF 간사 경력 초기(1974-1979년)에 그랬던 것 같다. 별개의 단계에서는 책을 읽었어도 그것이 글쓰기에 대한 아이디어나 필요성, 욕구 등을 전혀 자극하지 않는다. 또 드물게 무언가를 썼다 할지라도 그것은 책을 읽은 것과 무관하게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진 바이다.

그 다음 “동반”의 단계에서는 책 읽기와 글쓰기 사이에 비로소 모종의 접촉이 발생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는 각각의 활동을 수행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활동을 떠올리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희미하게나마 그런 주제나 내용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를 감지하는 것이다. 또 글을 쓰면서 얼마 전에 읽은 서적의 내용이 떠오르거나 이런 글을 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판정과 더불어 연관 서적을 더 참조해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한다. 내가 간사로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정서적 미성숙의 문제에 관한 글을 쓰고자 했을 때―“검은 상처의 트루스”를 기독의사회(CMF)의 〈작은 누가들의 세계〉에 싣던 1982년―단 한 문장도 만들어 내기가 버거울 정도로 어려움을 절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때 바로 이 “동반”의 단계에 진입해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 단계로 제시된 “상관”의 단계는 바로 전 단계와 달리 책 읽기와 글쓰기 사이의 상호작용이 명백히 인지되는 시기이다. 이때에는 두 가지 활동이 서로 영향을 미쳐, 폭넓고 체계적인 책 읽기는 양질의 글/책의 생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효과적인 글쓰기는 오직 지속적이고 충분한 독서 활동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당사자가 뚜렷이 의식한다. 따라서 책 읽기와 글쓰기가 확고한 의도와 분명한 의식 가운데 이루어진다. 나의 경우에는 10년의 간사 생활을 접고(1983년) 미국에 유학을 가 있는 동안이 상관의 단계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하여 책을 읽는 것이 글의 열매로 나타났고, 또 좋은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의 발동으로 책 읽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마지막에 선보인 “합력”의 단계는 기본 성격에서는 바로 앞에서 설명한 “상관”의 단계와 같다. 책 읽기가 글쓰기를 자극하고 글쓰기가 책 읽기를 촉발한다는 점에서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둘 사이에는 차이도 있다. “합력”의 단계에서는 하나의 활동이 다른 활동을 심층적으로 발전시킨다. 예를 들어, 책 읽기는 글쓰기를 자극하고 글쓰기는 책 읽기를 촉발하지만(첫 서클), 이렇게 촉발된 책 읽기는 더욱 심화된 책 읽기를 자극하고 이 심화된 책 읽기는 더욱 심화된 글쓰기를 촉발한다(둘째 서클). 그리고 이러한 점층적 심화 작용은 책 읽기와 글쓰기의 활동이 지속될수록 더욱 활성화된다. 나의 경우 미국 유학을 마친(1996년) 이후의 책 읽기와 글쓰기가 “합력”의 단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나의 책 읽기와 글쓰기가 별개 > 동반 > 상관 > 합력의 단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책집 덕분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과 지력이 허락되는 한, 나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책집과 정신적 공간으로서의 책집을 오가며 합력적 단계로서의 책 읽기와 글쓰기 활동을 지속하고 싶다. CTK 2019:10
 


송인규 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 전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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