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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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중요한 이유
  • 매튜 슬리드 Matthew Sleeth
  • 승인 2019.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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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성경 어디에나 있다. 왜 이 나무들이 기독교 신학에서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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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나무를 좋아했다. 나는 나무의 모양새, 그늘, 잎사귀에 흐르는 바람 소리, 그리고 나무가 맺는 모든 과일의 맛을 너무나 좋아한다. 초등학교 때 나는 아버지, 할아버지와 함께 나무를 심었다. 그때부터 줄곧 나는 나무를 심고 있다. 수련의 시절에 한번은 아내와 함께 우리 동네에 온통 가로수를 심기도 했다. 하지만 십여 년 전, 내가 우리 교회에 나무를 심자고 제안했을 때, 목사님 한 분이 내게 ‘트리-허거’tree-hugger의 신학이 있다고 말했다. 칭찬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트리-허거, ‘나무 껴안는 사람’은 환경주의자를 비꼬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CTK]

그 교회는 보수적인 교회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교회였다. (이것은 우리가 그 교회에 간 이유이기도 했다.) 어떤 성도가 내게 이렇게 말했듯이, “자유주의라는 미끄러운 비탈을 올라가다가, 결국 어디까지 갈지 누가 알겠는가?”

그 목사님에게 나는 그 자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 내가 틀렸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나무에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당시 우리 가족은 모두 기독교에 초보였다. 내 딸은 아직 목사와 결혼하지 않았을 때였다. 내 아들은 아직 아프리카에 소아과 의사 선교사로 파송되지 않았을 때였고, 나는 아직 실천신학에 관한 책을 쓰거나 전 세계 천 곳이 넘는 대학과 교회에서 설교를 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니 내가 나무의 신학에 대해 뭘 알고 있었겠는가?

하지만 사십대에 처음으로 복음을 접한 이후로 줄곧 성경이 나의 나침반이었고, 그래서 내가 “나무를 껴안는 사람”이라고 불린 그날, 나는 내 신학이 정말 그 비탈 어디쯤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성경을 찾았다.

 

하나님은 나무를 사랑하신다

나무는, 사람과 하나님을 빼고는,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생물이다. 창세기 첫 장에(창세기 1:1-12)에, 시편의 첫 시에(시편 1:3)에,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에(요한계시록 22:2) 나무가 있다. 이 모든 나무들에 밑줄이라도 긋듯이, 성경은 지혜를 나무라 부른다. “지혜는, 그것을 얻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나무이니, 그것을 붙드는 사람은 복이 있다.”(잠언 3:18)

성경의 주요 인물과 주요 신학적 사건에는 모두 그것과 연관된 나무가 있다. 이 패턴에 유일한 예외는 요셉인데, 성경은 요셉을 최고로 칭찬하면서 요셉을 아예 나무라 이른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세기 49:22, 개역개정) 예레미야는 모든 신자들에게 나무처럼 되라고 촉구한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예레미야 17:7–8)

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물리적 묘사는 이사야서에만 나타난다. “메시아가 오시면 알아볼 수 있겠는가?” 이사야가 묻는다. “마른 땅에서 자라는 작은 나무 같은 남자를 찾아라.”(이사야 53:2, 글쓴이의 의역)

당신은 나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좋은 사람이다. 하나님도 나무를 좋아하신다. 창세기의 첫 세 장에서 나무가 들어 있는 문장을 형광펜으로 칠해 보라. 그러면 하나님이 나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감지할 수 있다.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창세기 2:9) 성경은 여기서 나무는 “보기에 아름답다”고 선언한다. 성경 전체에서 이 미학적 기준은 흔들림이 없다: 하나님이 등잔대를 만드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는 곳이든(출애굽기 25:31–40), 성전 내부를 장식하는 법을 가르치시는 곳이든(열왕기상 6장), 제사장의 에봇에 딸린 겉옷을 만들 때도(출애굽기 28:34), 아름다움의 기준은 나무(와 그 열매)다. 오늘날 집에서 가장 편한 자리가 어디인지 조사한다면, 텔레비전을 마주한 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나무를 마주본다(요한계시록 22:2-3).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두 가지를 손수 만드신다. 첫째, 아담을 만드시고 생명의 숨결을 콧구멍으로 불어넣으신다(7절). 그 다음에, 아담이 숨을 내쉬기 전에, 하나님은 동산을 거니시고 나무를 심으신다(8절).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 동산에 데려다 두시고, “그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신 곳은 바로 이곳, 나무 아래였다(2:15, KJV). 나무에게는 완수해야 할 그만의 거룩한 임무가 있다. 하나님은 나무에게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고(창세기 1:29), 사람들이 살 곳을 마련해 주고(8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라는 임무를 주신다(2:16).

이상하게도, 성경은 줄곧 나무를 소통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나무들이 손뼉을 치고(이사야 55:12), 즐거이 노래하며(역대상 16:33), 심지어 논쟁을 벌인다(사사기 9:7-15). 이 패턴을 특히 이상하게 만드는 것은, 물고기나 새처럼 의사소통하는 생물들은 오히려 성경에서는 사실상 침묵한다는 점이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점을 그저 단순한 시적인 표현으로 넘겨버렸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나무 과학자들은 나무에 대해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나무는 정말로 의사소통을 한다. 나무는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이라 불리는 시스템을 이용해서 자원을 세고 공유하며, 서로 대화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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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숲

 

성경에 다양한 숲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나무에 대한 설교를 들어 본 적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찰스 스펄전의 설교 제목 몇 가지를 보면, 180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지 사람들이 그에게서 어떤 설교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생명의 나무” “하나님의 궁정에 있는 나무” “레바논의 백향목” “숲 속의 사과나무” “올리브 나무의 아름다움” “뽕나무의 소리” “잎사귀 없는 나무”…. “설교자의 제왕” 스펄전은 성경에서 숲과 나무를 모두 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우리의 설교에서 나무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성경책에서도 나무가 사라지고 있다. 내 책장에는 스펄전 시대에 출판된 〈킹 제임스 스터디 성경〉King James Study Bible이 한 권 있는데, 이 성경에는 나무와 식물에 관한 스무 쪽이 넘는 내용이 들어 있다. 2013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나왔는데, 여기서는 나무에 대한 해설이 모두 빠져버렸다. 색인의 ‘나무’ 항목에 참고 문헌 세 개만 들어 있을 뿐이다. 내가 갖고 있는 최근에 나온 다른 스터디 성경은 색인에도 나무가 없다.

예전에는 나무가 설교와 스터디 바이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면, 기독교 문학에서도 나무는 늘 등장하는 소재였다. 우리가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영국 문학의 가장 오래된 작품의 하나인 〈십자가의 꿈〉The Dream of the Rood에 이른다면, 우리는 나무의 관점에서 열정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들을 수 있다. 최근까지도, 조지 맥도날드, R. R. 톨킨, C. S. 루이스 같은 기독교 작가들은 성경에 뿌리를 둔 나무 신학을 그들의 작품에 녹여냈다. 조지 맥도날드의 「북풍의 등에서」At the Back of the North Wind에 그려진 천상의 모습이든,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로스로리엔Lothlórien(로리엔 숲)이든,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 아슬란이 움직이고 있을 때 나무들이 반응하는 모습이든, 이 저자들은 저마다 나무들이 있는 곳에 샬롬이 있음을 그려낸다. 좋은 사람들이 나무 아래, 나무 안에, 그리고 나무 주변에 산다. 그들은 나무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며 심지어 나무와 이야기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니아 연대기」의] 타쉬Tash와 [「반지의 제왕」의] 사우론Sauron 같은 사악한 캐릭터들은 명백한 벌목꾼이다. 그들은 심지어 나무와 말을 하면서 나무를 베어 넘어뜨린다.

오늘날 기독교적 상상력에서 나무가 점점 사라지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유는 많고 복잡하지만, 아마도 1세기 이원론 이단 사상—하나님의 피조세계는 나쁘고, 오직 영적인 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한다—의 발흥에 그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 철학의 가장 큰 결함의 하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시고 ‘좋다’고 하신 모든 것을 경시한다는 점이다. 바울이 로마의 교인들에게 말했듯이, 숲속을 산책한 적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데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자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에 대한 명백한 증거와 마주하게 된다(로마서 1:19-20 참조). 나무를 포함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이 본질적으로 부패한 것이라면, 바울의 이 같은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전문보기 : 하나님의 나무]

 


매튜 슬리드 창조세계에 대한 청지기 사명을 홍보하는 단체인 축복받은 지구Blessed Earth의 이사, 강연자, Reforesting Faith: What Trees Teach Us About the Nature of God and His Love for Us(신앙의 숲 다시 살리기: 나무가 하나님의 본성과 우리를 향하 그의 사랑에 대해 가르치는 것, WaterBrook, 2019년 4월)의 저자.

Matthew Sleeth, “The Arbor of God” CT 2018:10 CTK 20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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