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울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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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울어야 하는 이유
  • 임지원
  • 승인 201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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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줌마, 공감일기

 

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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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늘 아쉬운 것은 바로 남편의 낮은 공감능력이다. 내가 힘들다는 말을 한번만 해도 한 번에 알아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구천구백 번 힘들다고 말하면서 펑펑 울면 ‘아, 좀 힘들구나’ 하면서 알아주는 느낌이다. 나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그렇다. 이상하리만치 불친절하다.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로 자전거를 타러가거나 할 때 내가 꼭 하는 말이 있다.

“동네 분들에게 다정하게, 친절하게 인사해!” 들을 리 없지만 나는 외친다. 타인이 너무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도 싫고, 자신이 이유 없이 친절한 것도 이상한 남자. 이런 성향은 내 인생철학과 근본적으로 반대편에 위치한 거라 나는 남편의 그런 모습이 때로는 인정머리 없게 느껴진다. 결국 남편의 낮은 공감능력이 문제인 거다. 상대방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거부하는 그의 몸짓.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듣기를 거부하는 그를 이제 포기하고 놔두기로 하던 차, 놀랍게도 그에게 작은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년에 방영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 남편은 이 드라마에 완전히 빠졌다. 보다가 갑자기 눈이 빨게 지더니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러다 갑자기 껄껄 웃기도 하고.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의 아저씨가 TV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코를 푸는 모습은 정말 혼자보기 아까운 광경이었다.

중년 남자의 호르몬 불균형으로 인한 극단적 감정변화라고 생각했다. 어떤 드라마이길래 저러나 궁금한 마음도 있었지만, 땅을 꺼질 듯 우울한 배경음악도 싫고, 어쩌다 본 장면에는 요정같이 예쁜 아이유가 거적때기 같은 옷을 입고, 사채업자한테 마구 폭행까지 당하길래 이건 정말 못 볼 드라마구나! 딱 마음을 접었다.

 

작년 여름, 주말에 당시 고3이던 큰 아이를 학교 자율학습에 보내고, 둘째 아이와 우리 부부는 어떤 공원에 간 적이 있다. 그냥 몇 시간 때울 심산으로 들어갔는데, 가보니 걷기대회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목에 이름표를 건 참가자들 대부분은 중학생이었다. 그런가 보다 하면서 우리 가족은 다리에 달라붙는 모기를 때려잡으며 숲길을 걸었다.

그러다 조금 멀리까지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길을 잃은 중학생 여자아이 둘을 만난 것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디로 가야 하냐면서 서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했었다 하면서 투닥거리고 있길래 뭐 도와줄 게 있나 싶어 다가가려는 순간, 우리 남편이 먼저 아이들에게 다가가 왜 그러냐며 물어보는 거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주며 한참 대화를 하는 것이다. 어? 이런 모습 처음이다.

타인과 저렇게 대화를 하며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공감을 한다? 이 남자, 왠지 낯설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냐며 물었다. 그러자 남편이 하는 말, 자기가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고 깨달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너도 꼭 보라고. 아니, 어이가 없다. 친절해라, 다정해라, 그렇게 말해도 꿈쩍도 안하더니만, 갑자기 드라마를 보고 뭔가를 느꼈단다.

아니, 아내의 말은 다 잔소리이고, 예쁜 아이유가 눈물 몇 방울 좀 뚝뚝 떨어뜨렸다고 그게 그렇게 가슴이 아팠나? 그 오랜 고집을 순순히 꺾을 만큼? 나는 다시 한 번 결심했다. 이 드라마 절대로 보지 않겠어.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고, 남편의 〈나의 아저씨〉 드라마 약발이 이제는 떨어질 법도 한데, TV는 그 약발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 드라마를 재방송해준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들리는 드라마의 주제곡 “눈을 감아보면〜 내게 보이는 내 모습 지치지 말고, 잠시 멈추라고〜.’ 영락없이 TV 앞에 남편이 있다. 또 눈시울이 붉어진다. 딸과 나는 ‘못 볼 꼴’이라며 남편을 놀린다.

가끔 나는 가족들에게 나의 선행을 뽐내기도 하는데, 뭐 대단한 건 아니래도, 오래 전 함께 일했던 동료가 찾아달라는 어떤 종류의 파일 같은 거, 그런 걸 끝까지 찾아 내 보내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며 잘난 척을 하면, 남편, 가소롭다는 듯, “〈나의 아저씨〉를 보세요. 아직도 안 보고… 쯧쯧.” [전문 보기 : 남자가 울어야 하는 이유]

 


임지원 주부. 딸 둘과 남편, 넷이서 경기도 일산에서 씩씩한 아줌마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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