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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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 강영안
  • 승인 2019.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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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오류를 드러내어 삶을 이야기하다 : 강영안 교수의 철학과 신학 강의

 

 

시월이 다가왔습니다. 시월이 오면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부르거나 듣고 싶어 할 분이 계실 테고, ‘옥토버페스트’를 떠올리며 뮌헨으로 가고 싶어 할 분도 계시겠지요. 개신교 신자들은 ‘종교개혁’ 또는 좀 더 정확하게는 ‘교회개혁’ 운동을 생각하는 달입니다.

502년 전,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 출입문에 마르틴 루터가 면벌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대자보를 붙였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개신교회는 이날을 교회개혁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교회개혁을 기억할 때 우리는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머릿속에 함께 떠올립니다. 여기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더하여 이른바 ‘교회개혁의 다섯 가지 솔라’The Five Solas of the Reformation 이야기도 하곤 합니다.

루터나 츠빙글리, 마르틴 부처, 그리고 칼뱅이나 불링거가 이 표현들을 쓰기는 했지만, 한 번도 셋을 같이 묶거나, 다섯 가지를 함께 묶어 구호로 외친 적은 없습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만들어 낸 구호라는 의견이 현재로는 거의 정설이 된 듯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구호를 교회개혁자들이 외친 줄 알고 있지요. 오늘은 이 ‘구호’와 관련해서 16세기에 있었던 교회개혁 운동을 주로 루터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개혁의 구호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떠오르는 물음이 있습니다. 루터는 왜 자신의 주장을 대자보의 형태로 만들어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 출입문에 붙였을까요? 다른 방법, 다른 수단이나 통로가 있을 텐데 말이지요. 이 물음에 답하자면 루터가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 출신이면서 동시에 대학 교수였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죄 문제로 고뇌에 빠진 루터는 수도사 출신이지만 죄에 대한 벌을 면하게 해주는 ‘면벌부’ 판매에 저항한 루터는 대학에 자리 잡은 교수였습니다. 중세 대학에는 ‘논쟁’이라는 제도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교수나 학생이 어떤 주장을 장기적으로 제안하고, 제안된 주장을 두고 서로 논박하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를 따라 루터는 ‘면죄부 효력 해명을 위한 논쟁’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을 제안합니다.

빽빽하게 쓰면 전지 두 장에 들어갈 분량의 글인데, 알려진 바로는 한 달 내에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습니다. 인쇄술의 발달 때문이었습니다. 비텐베르크만 해도 인쇄소가 세 군데 있었고, (지금은 벨기에 땅이 된) 안트베르프에도 대량을 찍어낼 수 있는 인쇄소가 있었습니다.

‘교회개혁’이 이렇게 시발되었습니다. 얀 후스Jan Hus나 위클리프Wycliffe, 베슬 한스포르트Wessel Gansfoort 등 개혁운동의 선구자들의 노력은 미미한 결과에 그쳤지만, 면벌부 판매의 과오를 지적한 루터의 목소리는 빠르고 넓게 전달되었습니다. 이것이 촉매제가 되어 독일과 프랑스, 스위스와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교회개혁 운동이 그야말로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돌이켜 보면 16세기의 교회개혁 운동은 교회의 개혁에만 그치지 않고 삶의 많은 영역의 개혁을 가져왔습니다. 예컨대 당시 유럽의 화가들은 성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교회개혁과 더불어 성상 제거 운동이 일어나고 교회에서는 ‘성화’가 사라졌습니다. 화가들은 이제 일상의 삶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얀 스테인Jan Steen이 두드러졌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찬송을 맡은 사람은 신부였습니다. 그런데 예배개혁 운동이 일어나면서 성도들이 이제 찬송을 부르게 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곡과 가사를 새로 쓰게 되고 성도들로 구성된 성가대가 등장합니다. 

칼뱅의 경우는 이자 제도를 서양 최초로 허용하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자본주의의 시작이라 할 수는 없지만 돈을 가지고 돈을 버는 은행 제도가 신학적으로 정당성을 얻게 된 것은 중세 전통에서 보면 커다란 변화였습니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은행이 등장하지만 은행 제도는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전문 보기 :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강영안 미국 칼빈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 철학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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