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빠지기 쉬운 잘못된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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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빠지기 쉬운 잘못된 가르침
  • 체리스 피, 마가렛 슈스터, 아모스 용
  • 승인 2019.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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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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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스 피 노들링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라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성경과 역사적 신조들과 예배는 바로 이 지점에서 뚜렷이 만난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 오해가 ―엄격히 말하면, 거짓 가르침이―생겨난다. 예수님의 인성에 초점을 맞추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무엇보다도 역사적 복음주의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논쟁이 된 적은 거의 없지만 예수님의 인성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모두 인정하지만 그분의 인성, 특히 예수님의 인간적 삶을 우리의 삶과 연관 지을 때는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신약은 예수님의 인성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주장과 초대 교회가 예수님을 주Lord로 경배한 것은 매우 급진적인 태도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빌2:6) 예수님은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한계를 고스란히 받아들임으로써 당신의 능력을 포기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처럼 사셨다는 것을 (그리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역사의 첫 몇 세기에 교회 지도자들은, 인간이시며, 성육신하시고 창세 전부터 계신 성자, 나사렛 예수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경배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단, 곧 이러한 신비 속에 존재하는 긴장을 완화하려는 거짓 가르침이 난립했고, 이러한 거짓 가르침에 맞서기 위해서 신경이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니케아신경과 사도신경은 복음을 가장 집약하여 보여준다. 이 두 신경은 우리의 하나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의 통일성, 역사에서 예수님의 위치, 그리고 성삼위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위치를 선언한다.

예수님의 신성에 압도되어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는 이단에 빠질 때가 많다. 우리는 너무 자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증명하실 뿐 아니라, 병을 고치고 가르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빌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복음”이라고 착각하는 이 사상의 이면에는 몇 가지 아주 잘못된 생각이 들어 있다. 가령 물질세계는 악하다, 하나님의 신적 아들은 “우리의 인성을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죄를 짓지 않고 멋진 일을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등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 그 결과는 심각해진다. 인성이 없는 구주시라면, 깨어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에게는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한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능력과 권위, 우리의 성화에 대해서 알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새 아담, 인간을 중재하시는 대제사장,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그분의 자녀인 우리가 마지막 날 부활할 때 우리와 함께하실 왕을 갖지 못하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지 않으시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되지 않아도 그만이다. 하지만 요한 1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인생들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로 하여 진리와 거짓을 분별한다고, 곧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이 세상에서 그렇게”(요일4:17) 산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십자가 이미지를 닮은 이들이다.

 


체리스 피 노들링 일리노이 주 롬바드의 노던 신학교Northern Seminary 신학과 조교수


 

 

마가렛 슈스터
은혜가 으뜸이 아니라는

 

복음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물어보라.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하신 일 곧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믿기 때문이다.

결코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해서가 아니다. 복음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기본 교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근본적 신앙에 대해 혼란을 느끼지 않는다.

문제는, 행위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렉스 오란디, 렉스 크레덴다’Lex orandi, lex credenda (“기도의 법칙은 곧 믿음의 법칙이다”)라는 고대 교회의 공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가 하는 행동과 예배와 일을 보면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의 예배를 한번 보자.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동기부여 설교, 대중 심리학, “행복한 가정을 위한 좋은 정보”로 예배 시간을 채우는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기껏해야 더 나은 삶을 위한 “성경적 원리” 시리즈 정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거나 우리가 해야 할 일만을 이야기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셨다는 선언은 사라지고, “안녕하세요”라는 유쾌하고 완전히 세속적인 인사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그것도, 회중의 충분한 반응이 나올 때까지 반복된다.

한 신학생이 내게 어떤 교회는 예배시간에 기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배 순서를 정하는 사람들이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도 순서를 빼기로 결정한 까닭이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우리는 책임(우리가 해야 할 것에 대한 가르침)을 듣기보다는 축원(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에 내려주시는 복)만 듣는다. 우리는 그야말로 전혀 힘을 들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전문 보기 : 그리스도인이 빠지기 쉬운 잘못된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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