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수련회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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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수련회의 추억
  • 임지원
  • 승인 201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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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줌마, 공감일기

 

 

여름이 되면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다양한 수련회를 경험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수련회는 여전도회 연합 수련회다. 장소가 일영이었는데, 집회가 이루어지는 수양관 가까이 넓은 개울물이 맑게 흘렀다.

개울 아래는 둥그런 돌들이 깔렸고, 위로는 소금쟁이가 뛰고 있었다. 한 여름 잔뜩 푸르른 나무들이 종일 개울에서 버둥대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서 있던 곳. 지금은 운전을 하기 때문에 어떤 곳이든 지리적으로 이해를 하고 기억하지만, 그때는 그냥 할머니와 함께 교회버스를 타고 가야 만나는 개울이었다.

꽤 여러 번 그곳에 갔던 거 같다. 나처럼 할머니의 수련회를 따라온 손자손녀들이 많았다.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됐다. 꽤나 지루했던 시간은 바로 집회 시간. 새벽집회 때는 할머니 옆에서 자면 되고, 오전집회는 개울물에서 놀면 되는데, 저녁집회는 참아내야 했다. 절대로 끝나지 않는 설교 말씀. 그리고 통성기도와 끝없는 찬송가 열창.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합소서!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성령의 불을 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는 할머니가 무섭기도 했다. 늘 심야기도회까지 이어졌던 거 같다. 나는 할머니 옆에 누워 빨리 잠들고 싶었다. 까무룩 잠들었다 다시 일어나면 또 시작되는 찬송가. 새벽집회다.

그렇게 2박3일인지, 3박4일인지 나는 그곳에서 할머니와 함께 밥도 먹고, 수영도 하고, 집회의 지루함을 견디며 지냈다. 정말 오래 전 일이다. 그 수련회에 가셨던 우리 교회의 수많은 집사님, 권사님들은 한분 두 분 천국으로 가셨다….  

우리 할머니는 교회 식당에서 봉사를 많이 하셨는데, 여름에는 각 부서의 수련회에 따라가 밥을 해주셨다. 요즘처럼 좋은 수양관도 아니고, 그냥 큰 가마솥을 걸고 밥도 하고 국도 끓이고 그랬다.

냉장고도 없었나? 늘 수박과 천도복숭아가 초록색의 네모 난 아이스박스에 얼음도 없이 수돗물에 담겨 있었다. 언니 오빠들은 성경암송을 하고 밥을 탔다. 식판에 밥과 반찬을 타고, 테이블도 없었던지 그냥 그걸 들고 이곳저곳에 모여서 밥을 먹었던 기억.

오후가 되면 커다란 솥에 옥수수를 쪘다. 그리고 조별 성경공부를 하는 곳으로 배달을 했다. 아이스박스에 담겨 있던 천도복숭아도 함께. 그때 그 수련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던 청년들은 지금 장로님, 권사님이 되어 우리 교회를 섬기고 있다.

특히 유쾌했던 한 청년은 장로가 되어 올해 열린 교구별 찬송가 경창 대회에서 랩을 선보였다! 늘 똑같은 행사였던 거 같은데, 장로님의 랩 덕분에 분위기가 확 살았다. 내년이 더 기대된다.   

 

중등부가 되자 내가 소속된 부서 수련회에 참석했다. 드디어 할머니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수련회에 참석한 것이다. 그 시절 수련회하면 ‘천로역정’을 빼놓을 수 없다. 늘 떠나는 전날 밤 마지막 행사로 일정표가 적혀 있었다. 

교사 한 분이 예수님으로 분장을 하고 십자가를 진다. 다른 교사들은 채찍질을 하는 로마군인 역할을 하고, 또 침 뱉고 욕하는 시민도 맡는다. 저녁집회 때 이미 통성기도와 찬양으로 성령이 충만해진 우리들은 채찍으로 맞는 예수님을 보며 엉엉 울었다. 

”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부인했어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런 고통을 당하셨는데, 저는 사소한 일로도 친구를 미워했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렇게 분위기가 고조되면 어떤 아이가 십자가를 진 예수님에게 달려가 끌어안는다. 로마군인의 채찍을 예수님 대신 맞겠다는 거다. 그렇게 모두 몰입한 상태로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면 예수님의 가상칠언이 시작된다. 우리는 그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고 울면서 기도했다. 주여! 주여! 우리 죄를 용서해주세요!       

그때, 느꼈던 뜨거운 마음이 기억난다. 중학생이 뭘 알았을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어떻게 그토록 확실하게 인정할 수 있었을까 싶다. 어쩌면 일영 수양관에서 우리 할머니가 그토록 부르짖으시던 성령충만이 그 순간 우리에게 이루어진 건 아닐까.

눈물을 쏟으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부르던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 예수님을 위해 인생을 바치겠다고 서원한 친구도 있었는데, 정말 선교사가 됐다. 어떤 아이는 목사가 됐다. 우리는 그렇게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부채 의식을 느끼며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청년부가 되자, 우리는 광덕에 있는 농촌 교회로 수련회가 갔다. 가서 주일학교 아이들과 여름성경학교를 하고, 성경학교가 끝나면 마을로 가 농촌봉사활동을 했다. 장을 보러 읍내로 나가는 날엔 찬양팀을 구성해 일명 ‘길거리 찬양 전도’를 했다. 

나는 유치부 아이들을 맡았는데, 그 더운 여름 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경학교에 오던 한 꼬마아이가 떠오른다. 그 아이는 매일매일 같은 남색 줄무늬 런닝을 입고 왔다.

밤에도 이 옷을 입고 잤나? 땀에 푹 절어 끈적이는 그 런닝을 벗겨서 빨아 줄 수도 없고, 다른 옷을 입혀 줄 수도 없고. 무릎에 안고 있었는데, 아직도 기억이 날 만큼 힘들었다. 나도 어렸으니까…. 오후에는 농촌봉사활동. 어떤 팀은 담배 밭으로  갔고, 나는 깨밭으로 갔다. 깨밭에서 풀을 뽑았던가?

아무튼 쪼그리고 앉아서 뭘 했다.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그냥 우리는 모두 행복한 얼굴이다. 그렇게 몇 년 우리는 여름만 되면 광덕으로 갔다. 그 시절 청년부 회장이 지금 나의 남편이다. 

이렇게 수련회의 달인으로 거듭난 우리 동기들은 이제 보조교사라는 이름으로 타부서 수련회의 스텝으로 참여했다. 수련회 한 달 전부터 담당부서 목사님과 기도모임을 하고, 기도모임이 끝나면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나는 그때 레크리에이션 순서를 맡아서 진행했다는! 참 좋은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면 학교생활보다 교회생활에 더 목숨을 걸었던 거 같다. 친구들이 교회에 있었고, 나를 칭찬하는 어른도 학교보다는 교회에 더 많았다.

어쩌다보니 나는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선한 뜻을 위해 협력하는 트레이닝을 받으며 자라는 은혜를 누렸다. 교회를 통해 받은 것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다. [전문 보기 : 여름 수련회의 추억]

 


임지원 주부. 딸 둘과 남편, 넷이서 경기도 일산에서 씩씩한 아줌마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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