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일으키는 비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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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일으키는 비밀, 사랑
  • 성유원
  • 승인 2019.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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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원의 사유의 정원_세 번째 산책

 

기적을 일으키는 비밀, 사랑

 

영혼의 방법론은 사랑이다.

사랑은 그대의 의식을 심오하게 해 준다.

그대가 깊이 들어갈수록 노랫소리는 더욱 크게 들릴 것이다.

—제임스 앨런 ‘생각의 지혜’에서

 

글 성유원
그림 고여정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말의 근원은 그 말이 가진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사랑’이라는 말 역시 그렇다. 사랑을 뜻하는 라틴어 ‘아모르’amor는 ‘거부하다’anti와 ‘죽음’morte이 결합되어 만들어졌다.

말 그대로 ‘죽음을 거부하다’ ‘죽음을 뛰어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죽음의 두려움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어원에 담긴 의미처럼 사랑은 시대와 장소는 물론 죽음까지 뛰어넘어 인류사의 맥을 이어가는 근원적인 힘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핵심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흔히 쓰는 사랑이라는 말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일까? 사랑의 범위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사랑’만큼 다양하게 변주되거나 확장되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좋아한다는 단순한 감정에서부터 미움과 증오가 잠재된 격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

그런가 하면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포함하여 목숨마저 버리는 깊고 숭고한 아가페의 사랑도 있다. 어쩌면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말의 색깔과 무게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을지 모른다.

학교에 재직하던 시절, 학생들을 상담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부모의 말이나 행동이 오히려 자녀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주거나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는다는 것, 때로는 모든 것을 돈으로 보상하려는 태도가 아이의 내면성의 결핍을 심화시킨다는 것, 그런데도 부모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훌륭한 부모님을 더 많이 만났지만, 가끔씩 자녀의 모든 것을 지나치게 통제하거나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까지도 다 해결해 주려는 학부모를 만날 때는 안타까웠다. 어머니의 사랑이야말로 모든 장애를 뛰어넘을 만큼 크고 위대한 것이지만 간혹 왜곡된 사랑이 아이를 힘들게 하는 것을 보았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모성애가 가진 양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생명을 줄 수도 있고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소생시키는 자이고 멸망시키는 자이다. 어머니는 사랑의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어머니만큼 깊은 상처를 주지는 못한다.”

프롬은 모성애의 참된 본질은 어린애의 성장을 돕는 것이며 이것은 어머니로부터 어린애가 분리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려면 유년 시절의 보호와 책임을 넘어서 ‘삶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 주고,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에 대해 프롬은 성경에서 낙원의 상징으로 쓰이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비유를 통해, 젖(보호, 양육)을 주는 어머니는 많으나 꿀(스스로의 인생을 사랑하는 힘)을 주는 어머니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꿀을 주려면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정한 사랑을 주는 어머니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시금석은 “분리를 견디어낼 수 있는가, 분리된 다음에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명시한다.

성숙한 모성애에 대한 일깨움과 더불어 프롬은 우리가 남용하는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금 사유하게 한다.

사랑의 참된 의미를 일깨우며 사랑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태도를 주문하는 것이다. 순수한 사랑은 누군가에 의해 야기되는 ‘감정’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의 성장과 행복에 대한 갈망이고 참여라고, 사랑을 줌으로써 상대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말은 “위대한 사랑은 사랑을 갈망하지 않는다. 위대한 사랑은 그 이상의 것을 갈망한다.

상대방의 사랑을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려 한다”는 니체의 말과 통한다. 이는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배우고 키워가야 할 능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랑의 능력’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능동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내가 참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에 열려 있어야 한다. 세계를 사랑하고, 삶 자체를 사랑하며, 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참된 사랑의 의미다.

이러한 사랑엔 적극적인 참여와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야 한다. 프롬은 그것을 구약성경의 요나서를 통해 일깨운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의 주민들에게 가서 그들이 악행을 그만두지 않는 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라고 명령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뉘우치고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게 될 것이 두려워 전도의 사명을 피해버린다. 그는 질서와 율법에 대해서는 강렬한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지만 사랑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결국 요나는 도망가려고 애쓰다가 고래의 뱃속에 갇히게 된다. 이것은 사랑과 연대감의 결여로서 그에게 일어난 고립과 폐쇄의 상태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그를 구해주고 요나는 니느웨로 간다. 그는 니느웨 주민들에게 하나님의 명령대로 설교하고, 그가 두려워했던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니느웨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그들의 생활태도를 고쳐서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고 이 도시를 파괴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요나는 몹시 화가 나고 실망한다. 그는 자비가 아니라 정의가 실행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마침내 태양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이 자라게 한 나무그늘에서 간신히 위안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나무를 시들게 만들자 요나는 낙담하고 화가 나서 하나님께 불평을 한다. 하나님은 대답한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키우지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늘,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무엇인가를 위해서 ‘일하고’ 무엇인가를 ‘키우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며, 사랑과 노동은 불가분의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노동의 대상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일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사랑의 장’이라고 부르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비롯하여 요나서 같은 성경이 일깨워주는 사랑, 에리히 프롬이 일깨워 주는 사랑의 참된 의미를 안다면 ‘사랑한다’는 말이 다른 무게로 느껴질 것이다. 분명한 것은,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이며 배워야 할 능력이라는 점이다.

여기엔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수고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헨렌 니어링의 말대로 사랑은 먼 것과 가까운 것, 깊은 것과 얕은 것,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을 넘어선다.

그런 삶에는 생명을 살리고 세상에 좋은 변화를 가져오는 힘이 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다른 모든 결핍과 결함을 뛰어넘어 인생을 가장 의미 있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다. [전문 보기 : 기적을 일으키는 비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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