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가 목적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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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가 목적은 아니지요”
  • 이진경
  • 승인 20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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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4일 월요일 ‘무시무시한 4차 항암’ 

4차 항암이 있었던 날. 4차가 몸에 끼치는 영향은 1, 2차보다 훨씬 강렬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점심을 먹을 때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얼굴과 손발은 금세 부어올랐다. 집에 돌아와 1〜2시간이 지나자 진동하는 메스꺼움을 느꼈다.

잠도 잘 오지 않았다. 1, 2차 때는 무언가를 먹으면 잠시나마 메스꺼움이 나아질 때도 있었으나, 이번엔 먹는 동안에만 기분이 좋았지, 먹고 나니 더 메스꺼워졌다.

잠도 겨우 들 수 있었으니 일단 잠들면 나를 깨우지 말았으면 했는데, 저녁을 먹어야 약을 먹을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엄마는 날 깨우셨다. 저녁은 숭늉 누룽지를 해달라고 했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냄새가 나는 것은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엄마가 김치를 꺼내시는데 역한 기운이 올라와 김치를 치울 수밖에 없었다. 조금 매운 것도 혀에 닿으면 혀가 얼얼해져 먹을 수 없었다.

누룽지와 연근조림을 오래오래 씹어 먹으며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시 앉아 있으니 다시 메스꺼움이 심하게 올라왔다. 물을 많이 마셔놓은 탓에, 자다가 화장실에 열 번 정도 들락날락했던 것 같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항암의 가장 무시무시한 첫날이 이렇게 흘러간다.
 


10월 17일 목요일 ‘포도농부, 내 친구’

기나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도래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진다. 어젠 낮잠도 자지 않고 많이 걸어 다녔는데도 밤 11시경에 잠들었으나 새벽 3시경에 깨고 말았다.

메스꺼움인지 배고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고, 전체적으로 몸이 맑지 않았다. 몸이 무척 탁하다는 느낌이라고 하면 전달이 되려나. 무언가를 먹으려고 부엌에 나갔는데, 어제 엄마가 씻어놓으신 샤인 머스켓 청포도가 놓여 있었다.

어제는 포도가 싱겁다고 별로 먹지 않았는데, 새벽에 깨어 먹으니 그 신선도와 식감이 좋아 잘 들어갔다. 미숫가루도 우유에 타 먹고 파인애플 두 조각과 귤도 하나 먹었다. 하지만 아직도 밤이라는 게 싱숭생숭했다.

이렇게 탁한 몸으로 자는 것은 참 마뜩찮은 일이다. 그렇다고 깨어 있으면? 밤에 깨어 있으면 더욱 탁해진다. 낮에는 탁한 몸으로라도 걸을 수 있다.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조금이라도 걷거나 앉아 있으면 몸이 조금은 맑아지는 느낌이 드니까. 그리고 책도 읽을 수 있고 드라마도 볼 수 있으니까. 아마 그래서 요즘은 낮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어제 엄마가 우연히 샤인 머스켓 청포도를 사 오신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제 오후, 유럽식 고급포도를 재배하는 친구와 거의 2시간가량이나 통화를 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기르는 포도 중에 샤인 머스켓 청포도도 들어 있었다.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건 것은 나에게 회복될 수도 있는 어떤 기회를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어제 읽은 책  「아픈 몸을 살다」  앞부분에서, 이미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들어 있었는데, 이런 것이었다. “병이 가져오는 위험 중 가장 명백한 위험은 경계를 넘어가 죽는 것이다.

이 위험이 제일 중요하며, 또 언젠가는 이 위험을 피할 수 없는 날이 오고야 만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다른 위험이 있는데, 바로 질병에 집착하게 되는 위험이다. 질병은 계속 매달리고 있을 만한 무엇이 아니다.

(할 수 있다면) 그저 회복하면 된다. 그리고 회복의 가치는 새로 얻게 될 삶이 어떤 모습일지 얼마나 많이 알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삶이라는 게임을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다른 나….’ 지금까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찾아 헤매며 살아온 끝에 여기에 이르렀다.

희미하게 알아왔으나 질병에 이르니 조금 더 명확히 보이는 것이 있다. 내 안의 갈망. 왜 나는 자꾸만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자연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연을 잘 다룰 줄도 모르면서? 하지만 수련회를 가든 여행을 가든, 나는 어디서든 자연과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자연과의 교감이 깊었다. 특히 식물들.

40대가 되면서 점점, 머리로만 살고 문서 작업에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 몸과 손을 이용해 생명을 키워보고 싶은 갈망이 내 안에 들어차가고 있었다. 그러나 생계와 노후 등의 걱정과 염려에 붙들려 내 안의 갈망은 눌러두고 있다가 암을 맞이한 것이다.

암에 걸리고 나니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노후에 붙들려 살 이유가 없어 보였고, 생계는 이렇든 저렇든 계속 잘 먹고 살아왔으니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목회자이자 포도농부가 된 대학 동기가 생각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친구는 여러 모로 내게 실제적이고도 영적인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무수히 쏟아내 주었다. 내가 가고 있는 렉시오 디비나와 향심기도의 길을 그는 이미 집중해서 가고 있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사역의 길을 찾아냈다. 그는 모태신앙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사역하시는 교회에서 평생 컸으나, 그 안에서 사람의 중심이 변화되지 않는 것으로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이후 다른 교회에서 청년 사역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말씀이 물론 중요하지만, 기도가 깊어져야 중심이 변화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향심기도로 들어갔다. 침묵 속에서 자신의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 그분만을 지향하는 것. 거기서 복음을 제대로 만났고, 일상 속에서 기쁨과 평안이 늘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향심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고백하는 공통된 이야기다. 그는 대규모 강의나 제자훈련보다 개인적인 영성지도가 사람의 중심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영성지도 사역으로 가려면 담임목사로 사역하는 게 아닌, 동행자로서 사역하는 게 더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교회 담임목사에게 자신의 깊은 영성적 상담을 지속적으로 받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신자들은 담임목사님을 자신이 잘 보여야 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담임목사 한 명이 너무 많은 수의 신자들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사역을 하기 위해 그는 자비량 사역을 선택했다. 포도 재배는 영성 사역과 매우 어울리는 일이라고 했다.

포도가지들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떤 포도는 작은 짐에도 크게 눌려 상할 수 있으니 빨리 가지를 쳐줘야 하는 등의 각 포도의 개성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연농법은 많이 개입하지 않고 벌레가 있는 곳을 재빨리 알고 관리를 해주는 것이 얼마나 필수적인지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물론 실제적인 어려운 이야기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일을 새롭게 시작하려면 어려움과 위험은 따르기 마련이다. 유럽식 고급 포도를 자연농법으로 키우는 방법을 수년간 이곳저곳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도 많은 돈과 시간이 들었다는 그는, 지금은 충남 아산에서 포도농장을 임대하여 재배하고 있다. 작년에 날씨가 좋아 판매가 꽤 쏠쏠했다며 기분 좋게 이야기하였다.

올해는 막판에 장마가 들어 그만큼은 아니었는데, 농부가 된 지 4년차가 된 지금, 매년 이렇게 배워간다고 했다. 그는 내게, 무엇을 경작하고 싶은지, 어떤 걸 키워내고 싶은지 먼저 알기 위해, 일단 다른 분들이 경영하고 있는 농장이나 밭에서 몇 개월 실습을 해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느 지역부터 땅값이 내려가는지 시세도 이야기해주고, 친구와 가족들, 병원이 있는 서울과 교통이 그렇게 멀지 않으려면 어느 지역이 괜찮다는 등의 현실적인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의 전언에 따르면 또 다른 남자 대학 동기는 대학 졸업 후 곧바로 들어간 사립고등학교에서 지금껏 영어교사로 일하다 마흔 넘어 결혼하고 드디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은 꽃 농장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우리 대학동기들 중에 이렇게 멋지게 손으로 무언가를 키워내고 작업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너무 좋다. 빵을 만들고, 포도를 재배하고, 꽃을 키우고…. 그들이 마흔 이전까지 다른 삶을 살다가, 이후 이렇게 새로운 길로 들어선 것도 나의 열망과 크게 다름 아니리라. 일단 먼저 그 길을 걷기 시작한 나의 선배이자 동기들에게 묻고, 두드리고,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 동기와 갈망도 살펴보고 하면서 천천히 움직여볼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인도하시면 길이 열리리니. [전문 보기 : "치료가 목적은 아니지요"]

 


이진경 CTK 창간에 힘을 보탰고, 에디터로 일했다. ‘싱글 이야기’를 연재했으며, 지금은 암 투병 중에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희망의 속도 15km/h」, 「좋은 죽음 나쁜 죽음」, 「감각의 제국-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감각의 모든 과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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