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학교,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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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학교, 시편
  • 벤 패터슨 | Ben Peterson
  • 승인 2019.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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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배우는 것은 거장들과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과 같다

 

대학교 2학년 때, 나는 친구들과 함께 불신 고등학생 친구들의 구원을 위해 2시간 정도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교회에서 기도회를 열 예정이었는데, 그날 밤 교회에 빈 공간이라고는 세제와 살균제 냄새가 풀풀 풍기는 덩그런 청소 도구실 뿐이었다.

할 수 없이 그곳에 모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가 아는 기도 방법은 총동원했다.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 죄를 고백한 다음, 학생들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 가며 기도했다.

그런 다음 또 얼마간 찬양과 고백과 중보가 이어졌다. 그런데 막상 시계를 들여다보니 고작 15분밖에 지나지 않았지 뭔가! 그 이후에 계속된 1시간 45분여의 기도회는 내 평생 가장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으려고 작정하고 왔는데, 정작 드릴 말씀이 별로 없었다. 나는 수년이 지난 후에야 그 이유를―그 당시 어째서 내가 기도와 시편 모두를 하나님께 소원을 이루어 달라 조르는 도구로만 여겼는지―깨달았다.

내 소원이 너무 소박한 것이 문제였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한 것이 있다면, 기도를 배우는 것이란 우선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그것을 달라고 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기도로 표현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다.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상냥하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우리 기도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 기울여 주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신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구하지 않는 것까지도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신다.

대학 시절 “청소 도구실” 사건 이후, 나는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를 배웠는데, 특히 시편에서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제임스 보이스James Boice는 기도를 배우는 것은 거장들과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과도 같다고 말했다. 처음 악기를 배우기 시작할 때는 이보다 더한 소음이 없다.

끽끽대는 소리만 요란하다. 그러나 일단 제대로 배울 각오가 서면, 학생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방송하는 클래식 음악 방송 안내 책자와 악보를 꼼꼼하게 챙긴다. 각 협주곡의 악보를 구입한 다음, 방송을 듣고 따라서 열심히 연습한다. 물론 처음에는 엉망진창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명연주자와 비슷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학생이 형편없는 소리를 내는 동안에도, 전체 오케스트라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훌륭한 연주자들의 소리에 묻혀 학생의 부족한 연주 실력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다. 시편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선율에 맞추어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

훌륭한 기도서인 시편이 노래이기도 한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시편은 기도의 악보이자 오선지요, 대본이며, 영원한 음악의 기초다.

나도 시편에 맞추어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중인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꽤 뒤늦게야 발을 들여 놓은 셈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건 열 살 무렵이지만, 그 후로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시편의 기도를 배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성인식을 치른 것은 한참 전이지만, 지금 독자들이 읽는 글은 초신자의 말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시편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그저 놀랍고 흥분되고 때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열정이 넘친다.
 


일상의 기도

맨 처음에는, 기분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아무 때나 어울릴 만한 기도문에 끌렸다. 나는 그런 시편들에게 “누가 입어도 맞는 ‘프리 사이즈’” 시편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예를 들어, 시편 103편은 언제 기도해도 괜찮은 그런 내용이다. 어느 시각, 어느 장소에도 딱 들어맞는 기도 말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그 다음에는 내 기분과 어울리는 시편, 그러니까 특정 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대변해 주는 시편이 눈에 들어왔다.  “맞춤 사이즈” 시편이다. 예를 들어, 죄책감을 느낄 때는 시편 51편이 제격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시편 130편도 마찬가지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도무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이런 시편들을 보면 그분 앞에 나아가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프리 사이즈” 시편과 “맞춤 사이즈” 시편 이외에도, 분류가 되지 않는 수많은 시편들이 있다. 그런 시편들에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라는 무시무시한 구절로 마무리하는 시편 137편이 그중 하나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나 인생에 대해 좋은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없이,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라는 말로 끝맺는 시편 88편은 또 어떤가? 이런 구절들은 내가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곤란한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용하셨던 시편 22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설교 본문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 스스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기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기도를 내가 한다면, 신성모독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시편은 물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기도하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 마음의 소원이 곧 하나님의 소원이 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시 37:4).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대학 시절 “청소 도구실” 기도 사건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기도란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도록 만드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원하도록 가르치시는 수단이다. 성경 전반, 특히 시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그분이 우리에게 허락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회당의 신도들이 기도서 내용이 자기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자, 위대한 종교 철학자 아브라함 헤셀Abraham Heschel은 현명하고 성경적인 답을 제시했다.

기도서는 그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신자들이 기도서의 내용을 느껴야 한다고 대답했다. 성경이 알려 주는 기도법을 배우려면 성경이 말하는 내용을 똑같이 바라고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와 같은 기도를 꾸준히 훈련하는 사람들은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시편의 정서를 이해하게 되면, 마음과 소원의 폭도 넓어진다. 자신이 한때 아주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 시시하고 어리석은 소원이요, 좋은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하찮은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당연한 일이다! 자기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더 잘 아시지 않겠는가? 또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께 그것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루이스(C. S. Lewis)는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 홍성사 역간)에서 그 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복음서가 당당하게 약속하는 보상, 그 엄청난 보상들을 생각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갈망이 너무 강하기는커녕 너무 약하다고 말씀하실 듯합니다. 우리는 무한한 기쁨을 준다고 해도 술과 섹스와 야망에만 집착하는 냉담한 피조물들입니다.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자고 말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상상하지 못해서 그저 빈민가 한구석에서 진흙 파이나 만들며 놀고 싶어 하는 철없는 아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합니다.”

시편은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털어놓도록 도와준다. 시편은 간구와 중보, 찬양과 감사, 한탄과 묵상 등 온갖 종류의 기도를 통해 인간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 희망, 두려움과 절망, 의심과 고통, 공포와 바람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설명하며, 성화하고 변화시킨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시편은 마치 거울 같아서 그것을 읽는 사람을 밝히 드러낸다. 그뿐이 아니다. 당신이 시편을 읽으면, 시편도 당신을 읽는다. 시편을 기도하면, 시편이 당신을 변화시킬 것이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몽골 선교사 제임스 길모어James Gilmour는 기도 생활이 막힐 때마다 시편을 읽곤 했다. “경건 생활에 진전이 없을 때면 시편을 펼치고 제 카누를 꺼냅니다.

그러고는 성경 구석구석으로 흘러들어 가는 기도의 물결에 내 자신을 맡깁니다. 이 조류는 항상 하나님을 향하고, 대부분 아주 강력하고 깊습니다.” [전문 보기 : 기도 학교, 시편]

 


벤 패터슨 캘리포니아 주 산타바버라에 위치한 웨스트몬트 칼리지의 교목이다. 「일과 예배」, 「내가 매일 기쁘게」(이상 IVP 역간) 등을 집필했다. 이 글은 벤 패터슨의 「하나님의 기도서」God's Prayer Book: The Power and Pleasure of Praying the Psalms에서 간추려 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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