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XX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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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XX 같은!”
  • 캐롤린 아렌즈 | Carolyn Arends
  • 승인 2019.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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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

 

WRESTLING WITH ANGELS 
캐롤린 아렌즈의 천사와 씨름하기

마 전 치과 예약 시간에 늦어 서두르던 중에 결정적인 좌회전 신호를 놓쳤다. 무척 놀랍게도 나는 그만 우리 가정에서는 쓰지 말아야 할 ‘나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이해해 주시기를. 치과 접수원들은 지각을 가볍게 넘기지 않는데, 그동안 나는 시간 약속을 썩 잘 지키지 못했다.)

“엄마!” 아이들이 소리쳤다. “응, 왜?”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한 척하면서 폭언에다 기만의 죄까지 하나 추가하며 말을 더듬었다.

역시 엄마 말씀이 다 옳았던 것 같다. 죄는 또 다른 죄를 낳는다. 그리고 우리는 나쁜 말을 해선 안 된다.

물론 뜻밖에도…요즘은 그리스도인이 막말하는 것을 ‘쿨’하다고 여긴다. “나는 예수님을 믿지만 율법주의자는 아녜요”라는 표시다. 최근 욕과 솔직함에 얽힌 행동 연구에 대한 트윗 하나가 (아무도 실제 연구의 링크를 찾지는 못했지만) 교회 친구들 사이에 퍼진 적이 있다. 많은 친구들이 욕설 체계의 자의성(arbitrariness)에 대해 이야기했다.

“만약에 ‘식탁’이 욕이라면요?” 우리 딸이 물었다. “아님, ‘팔꿈치’는?”

일리 있는 말이다. 특정한 단어만을 상스럽다고 규정하는 데는 분명 말이 안 되는 구석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식탁’이나 ‘팔꿈치’는 욕설의 범주에 속하지 않을 뿐더러 대다수 욕은 어떤 타당성을 가지고 정해진 것이기도 하다.

대다수 비속어는 성적인 부위의 생물학적 기능이나 배설과 관계가 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을 걸고넘어지는 욕은 논외로 하자. 그렇게 빼더라도 여전히 많은 ‘상스러운 말’들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다뤄야 할까?

모든 언어는 일종의 사회적 협약이다. 수세기에 걸쳐 언어가 발전하면서 팔의 튀어나온 부분을 ‘팔꿈치’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야비하게 느껴지는 것을 ‘속되다’라고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언어 자체는 우리가 그에 부여한 힘만을 갖는다. 그러나 악담은 확실히 그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갖는데, 말로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생물학적 기능 (혹은 그 결과물) 정도로 깎아내리는 것은 대체로 경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경멸은 독이다.

말콤 글래드웰은 그의 저서 「블링크」(21세기북스 역간)에서 심리학자 존 가트만의 실험에 대해 설명한다. 가트만의 연구실에서 부부들은 센서가 심리적 반응을 기록하는 동안 가벼운 논쟁이 될 만한 내용으로 대화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수년간 이 대화들의 뉘앙스를 연구한 후, 가트만은 어떤 부부가 이혼할지 놀랄 만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신호는 경멸을 드러내는 것이다.

눈알을 굴리거나 은근히 무시하는 말을 하는 것이 노골적 갈등보다 더욱 우려스러웠다. 사실, 결혼생활에 존재하는 경멸은 관계의 존속뿐 아니라, 당사자의 면역 체계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만성적인 경멸 속에 사는 배우자들은 그러지 않는 사람들보다 감기에 더 잘 걸린다.

경멸은 분노와 혐오가 뒤섞인 채 우월한 쪽에서 쏟아진다. 상대를 폄하하고 평가절하하며 묵살한다. 아주 미묘한 수준의 경멸일지라도, 왜 그것이 결혼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악영향을 끼치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만일 욕하는 말들이 경멸의 어휘들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욕설을 피하라는 고유한 명령을 받은 셈이다. 경멸하는 언어를 삼가서 홀로 고결한 척 후광을 두르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함과 존재의 성스러움을 되새기며 살도록 부름받았다는 뜻이다. [전문 보기 : "이런 XX같은!"]

 


캐롤린 아렌즈 가수이자 작곡가로서 아홉 장의 CCM 앨범을 발표했다. CTK 2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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