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무한한 확장, 자유
상태바
영혼의 무한한 확장, 자유
  • 성유원
  • 승인 2019.05.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유원의 사유의 정원_두 번째 산책

 

 

영혼의 무한한 확장, 자유

 

글 성유원
그림 고여정

 

그 한 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폴 엘뤼아르(Paul Eluard) ‘자유’ 부분

 

 

내가 만난 ‘자유’

젊은 시절,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무엇입니까?”라고 누군가 물었다면 나는 언제나 “자유요!”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자유’라는 말이 품은 근원적인 에너지를 좋아하지만 그에 대한 생각과 느낌은 지나온 시기마다 조금씩 달랐다.

중고등학교 때는 주어진 틀과 그것에 맞춰진 일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이 컸다. 자유를 향한 동경이 갈증처럼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 갈증을 일면 해소해 준 것은 책 읽기와 음악 듣기였다. 시간을 초월하여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만나게 해주고 인생에 대한 사유의 문을 열어 준 것이 독서였다면, 음악은 이 세계가 아닌 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때 가장 즐겨 들었던 것은 영화 음악, 그중에서도 〈빠삐용〉의 OST ‘바람처럼 자유롭게’ Free as the wind였다.

책과 음악 속에서 자유를 향한 목마름을 해소하며 청소년기를 보내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또 다른 차원의 자유를 만났다. 그렇게 갈망하던, 스스로 선택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자유가 당연한 것이 되었을 무렵 학교의 교훈이 마음속에 큰 울림을 일으키며 들어온 것이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1의 말씀이 심장을 두들겼다. 그리고 시나브로 내 안에 깊이 자리 잡았다. 그 문장에는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진리’ ‘자유’ 이런 말들이 가슴을 뛰게 하던 시절, 현실적으로 결핍된 것은 많았지만 그것을 크게 느끼지 못할 만큼 자유가 주는 힘이 컸다.

그 시기에 싹트고 자란 두 가지 깨달음이 있었다. 진정한 자유는 진리 가운데서 본질을 따라 살아갈 때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성경구절을 마음으로 환히 알게 된 것은 다른 차원의 앎이었다. 진리의 차원에서 보면 일상에서 겪는 일들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기에 진리를 붙잡으면 중심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은 비행기나 배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자이로컴퍼스와 같았다.

당시 나에게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성경에서 말하는 가치들을 실천하는 삶이었다. 진리의 길은 자유의 길과 통했고, 그 자유는 나를 구속하는 환경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내적 자유,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영혼의 자유’를 의미했다. 영혼의 자유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이루는 바탕이면서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그것이 깊숙이 자리한 후부터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유로운 마음만은 잃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마음은 항상 자유로웠음에도 일상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며 사느라 바빴기에 나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인생을 멀리 보면서 당장의 필요보다 내면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될 공부에 시간과 마음을 쏟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나중에야 찾아왔다. 그 아쉬움에서 한 가지 더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영혼의 자유는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한 근본적인 바탕이지만, 물리적 자유를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인생의 내용을 결정하는 핵심이라는 점이었다. 일상 속에서 자유는 곧 자유로운 시간을 의미한다. 그 시간을 어떤 내용으로 채우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다.

역사상 유례없이 큰 자유가 허용되고 있다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 외형적으로는 자유로워도 마음은 저마다 무언가에 얽매어 있거나 세상에서 추앙하는 가치에 조종당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돈, 권력, 지위, 명성, 남의 관심과 인정에 영혼이 매어 있는데 신체적인 자유 때문에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고통을 피하여 세상과 떨어져 살거나 자기 속에 둥지를 틀고 안주하는 것으로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예속도 도피도 참된 자유는 아닐진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자유로 알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물리적 자유마저도 낭비하면서….

이삼십 대 젊은이들과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자유롭게 노닐다) 편을 함께 읽고 ‘자유’에 대한 생각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참여한 젊은이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한 대학원생은 세상에 편입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했고, 다른 학생은 사회가 주입하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다른 청년은 남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거나 자신에 대한 믿음 없이 기대만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 큰 문제는 스스로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식할 틈도 없이 주어진 틀 속에서 바쁘게 사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삶의 선택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몫이다. 너무 분주하다거나 세상의 물결에 떠밀리며 산다고 느낀다면 매몰된 일상에서 깨어 나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엇엔가 함몰되어 있지는 않은지, 생각 없이 세상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면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나 자신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알맹이의 삶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으므로.

“그 한 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진정한 삶과 행복은 자유로운 영혼에 깃든다고 생각했던 폴 엘뤼아르의 시구가 일깨워주듯이. [영혼의 무한한 확장, 자유]

 


성유원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2017년까지 예원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어린 예술가들과 풍요로운 나눔 의 날들을 보냈다. 퇴직한 후에는 대학생과 대학원생과 직장인으로 구성된 인문학 독서모임을 이끌며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사유의 정원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고여정 글쓴이 성유원의 예원학교 제자이자 함께 독서하며 생각을 나누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학생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