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향해 분노하는 것이 의로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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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향해 분노하는 것이 의로울 수 있는가?
  • J. 토드 빌링스 | J. Todd Billings
  • 승인 2019.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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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은 하나님께 신실하게 항의하는 법을 보여 준다.

 

5년 전 암 진단을 받고 나서 나는 시편을 다시 펼쳤다. 먼저, 전에는 단순히 읽기만 하거나 아예 건너뛰었던 시편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독한 항암 치료를 받고 있을 때 한 신학생이 말하기를, 나를 위해 시편 102편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5-6).

 

이 시를 읽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계속 읽어나가면서 나는 이 시가 불평과 탄원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나도 그렇게 불평하고 그렇게 탄원하고 싶었지만 표현 방법을 몰랐었다.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23–24).

 

제발 주님, 제 아이들은 이제 겨우 한 살, 세 살입니다. 주님을 위해 “중년에” 내 인생을 중단시키지 마옵소서, 오 하나님, 하나님의 날은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당신에게는 무궁하게 많은 날이 있지 않습니까?

 

 

복음주의의 모순

이 경험을 통해 나의 복음주의적 신앙 배경에 내재된 모순에 직면했다. 우리는 성경 중심 교회의 일원으로, 시편 구절을 외우고 최신 찬양곡들과 더불어 시편 찬송을 불렀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생 때 주목하기 시작했다시피, 우리는 정서情緖에 관해 도량이 좁았다. 찬양과 감사? 좋아. 슬픔이 기쁨으로 변했다고? 좋아. 하나님께 고백? 좋지. 하지만 시편을 읽다 보니 이 틀에 들어맞지 않는 시가 많았다(대부분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 항의를 하는 듯한, 하나님께 화를 내고 두려움을 표현하는 듯한 시는 어떤가? 나는 시편이 우리 나름의 기도를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배워 왔다.

그런데 가장 광범위한 유형의 시편(전체 시편의 약 40퍼센트)이 애통의 시편이라는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시편의 멜로디가 단조短調일 경우, 심지어 불협화음일 경우 나는 그냥 함께 부르기를 포기했다.

애통의 시편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암 진단 이후 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과 대화를 나누며 의견을 들었는데, 이들의 반응은 공통적이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대학생이든 수십 년 동안 장로로 교회를 섬겨온 65세의 회계사든, 이들의 상투어는 똑같았다. 찬양, 고백, 감사라는 틀에 들어맞지 않는 시편으로 기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경을 아주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지만, 사실상 시편은 세심하게 골라서 읽었다. 좋아하는 구절만 골라서 읽고 까다로운 부분은 건너뛰는 나처럼 말이다. 이들은 이것이 사실 성경을 높이 평가하는 태도가 전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기도는 시편만큼 폭이 넓고 깊이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에서 우리의 대답은 ‘아니요’이지만, 나는 우리가 대부분 ‘예’로 대답하고 싶어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길을 가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핵심 사항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우리가 회피하고 있는 부정적 정서를 하나님 앞에 털어 놓는 게 과연 용인될 만한 일인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화를 내는 게 허용될 만한 일이냐는 것이다.

 

전인적 삶이라는 근육

최근, 등 쪽에 날카로운 통증이 있어서 물리치료 센터를 찾아갔다. 검진 후 치료사는 벽에 붙어 있는 근육 해부도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의 이쪽 등 근육이 무리를 하고 있어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나 물건을 들어 올릴 때 똑같은 근육만 계속 쓰시는 거죠. 근육이 굳어 있고 피곤한 상태인데, 통증은 근육이 약해서가 아니라 혹사당하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근육의 긴장을 풀 수 있는지, 이 통증의 전조가 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쪽 다른 근육을 강화시켜야 해요.” 치료사는 말했다. 일부 근육만 지나치게 쓰면 다른 근육이 약해지고, 그 결과 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교적 강한 근육마저도 아프고 굳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해부학상의 다른 중요 근육이 이 근육을 지탱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시편은, 그 물리치료 센터 벽에 걸린 그림처럼 우리에게 해부학적 교훈을 준다. 시편을 소개하면서 장 칼뱅은 시편이 “영혼의 다른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도”라고 말한다.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감정치고 마치 거울에 비치듯 시편에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없기” 때문이다.

온갖 감정을 다 지닌 피조물은 그 감정만큼 폭이 넓은 기도 책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시편이라는 기도 책은 분노와 절망을 드러내는 탄식을 비롯해 인간의 해부학적 구조에서 아주 다루기 힘든 다른 모든 부분들을 포괄하고 있다.

“행복에 찬” 시편을 위해 “부정적” 시편은 건너뛴다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놓치게 된다. 칼뱅이 일깨우다시피, 시편에서 “성령께서는 비탄ㆍ슬픔ㆍ두려움ㆍ의심ㆍ소망ㆍ염려ㆍ혼란 등 간단히 말해 우리가 결코 들쑤시고 싶지 않은 모든 심란한 감정을 여기 우리의 삶에 다 끌어다 놓으셨”으니 말이다.

내가 보니 여러 기독교 라디오에서 “힘이 되는 성경 구절”을 간간이 섞어 “긍정적인 기독교의 명언”을 방송한다. 마찬가지로, 많은 교회들에서도 시편 기자의 레퍼토리 전체가 아니라 한정된 영역의 몇 가지 감정에만 호응한다. 기쁨과 격려는 멋지다. 하지만 시편에서 볼 수 있는 다른 감정들, 절망, 분노, 혼란, 고독은 어떤가?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시6:6-7)라고 시편기자는 말한다.

그는 “긍정적이고 힘이 되는” 말에 관한 메모를 받지 못한 게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어색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 시는 자기 연약함이 다 드러나는 절망을 표현하는 한편 지극히 인간적인 이 감정을 여호와 앞에 아뢰고 있다.

우리는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할 수 있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해부학적 구조에 있는 그 근육을 잘 사용하려면 다른 근육을 움직여서, 실망·고통·비탄 같은 반응을 언약의 주님 앞에 기도로 내놓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비교적 “부정적인” 정서를 제쳐 놓으면 기쁨과 감사가 소진될 수 있고 심지어 냉소적 태도를 갖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절망과 분노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느낀 탓에 신앙에 아예 등을 돌려 버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전문 보기 :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는 것이 의로울 수 있는가?] 

 


J. 토드 빌링스 웨스턴 신학교 고든 지로드Gordon H. Girod 개혁신학 연구 교수. 최신 저서로 Remembrance, Communion, and Hope: Rediscovering the Gospel at the Lord’s Table (기억, 성찬, 그리고 소망: 주님의 만찬에서 복음 을 재발견하기, Eerdmans)이 있다.

J. Todd Billings, “Can Anger at God Be Righteous” CT 2019:1/2; CTK 2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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