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남겨진 추억의 전등에 불을 밝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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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남겨진 추억의 전등에 불을 밝히며
  • 이규철
  • 승인 2020.1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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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교회의 문턱을 처음 넘은 때,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나의 기억으로는 성탄절이었다.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오늘 교회에 가면 떡을 준다는 것이었다. 주전부리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서 ‘떡’의 유혹(?)은 쉽게 뿌리 칠 수가 없었다.

용감하게 교회로 향했다. 예상대로 교회에서는 무지개떡을 해 놓고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달려들어 떡을 잽싸게 낚아채서 도망가 버렸다. 이렇게 ‘무지개떡’은 나에게 성탄절의 추억을 남겨 줬다. 그 후로 계속해서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으니, 그 때 당시 교회의 성탄절 전략은 꽤 쓸 만했다고 생각한다.

중학생 때에는 이미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충성스런 그리스도의 군사가 돼 있었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나였지만, 이곳에서도 당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새벽송’을 했다.

사실 교회 형, 누나들과 함께 모여서 ‘성탄절 올 나이트’를 하면서, 새벽에 차를 타거나 걸어서 교인들의 집을 방문한다. 재밌던 것은 집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면 집 안에 있는 집사님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다.

새벽 쌀쌀한 날씨를 녹여 주는 따뜻한 차를 마시거나, 고구마 구운 것, 가래떡 등을 주시면 그것을 손에 받아 들고 맛있게 먹었다. 어떤 분들은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몸을 녹이는 시간을 주곤 했다. 누군가를 축복하러 다녔던 새벽송,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서 손수 준비해준 애찬들.

나에게 이런 온기가 가슴에 남아 있다. 가끔 새하얀 눈이 내리는 성탄절이면 미끄러운 도로를 함께 걸으면서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함께 만들어서 교회 앞에 세워 놓았던, 옛 성탄절의 따스함이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난다.

나는 구세군교회를 다녔다. 그래서 성탄절 때 자선냄비 자원봉사 활동이 청소년 시절부터 몸에 학습되어 있다. 주로 성탄절 전야 때 사람들 왕래가 많았던 곳에서 자선냄비 자원봉사를 많이 했다.

보통 2시간 정도 밖에서 종을 치면서, 큰 소리로 ‘불우이웃을 도웁시다’라고 외치곤 했다. 처음에는 종 울리는 것도 어색하고, 소리 지르는 것도 생소했지만, 익숙해지면 꽤 재미가 났다. 아이들에게 돈 천원을 주면서 물끄러미 쳐다보는 부모님들이 많았다.

간혹 우리가 추위에 떨고 있으면, 고구마나 따뜻한 커피를 가져와서 주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였다. 그 때의 정겨움은 세월이 흘러도 가슴에 남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지금은 목사 된 친구를 따라서 친구들과 함께 정신병원을 성탄절 이브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복음송가 몇 곡과 율동 등을 준비하고 과일, 떡을 준비해서 찾아갔다.

이곳은 사실은 내 친구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었다. 그 친구는 우리에게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을 알려 주고 싶어서 그랬는지, 사전에 그곳의 정보를 전혀 알려 주지 않았다. 우리는 큰 철문을 몇 개 지나서 환자복을 입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송가와 율동을 했다. 어설픈 손짓과 어눌한 발음,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환희의 복음송가를 불렀다. 아주 특별한 성탄절의 경험이었다. 성탄절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진실을 깨닫게 했다.

성탄절이면 청년부에서는 연극을 했다. ‘돌아온 탕자’는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연극이었다. 여러 편의 연극이 무대에 올려 졌지만, 이 작품은 전문적인 연출가에 의해서 이루어진 제법 연기력이 요구되었다.

청년들은 두 달 넘게 갖은 싫은 소리를 들어가면서 연극을 만들어 갔다. 눈빛 연기, 손동작, 대사 한 마디에 에너지를 쏟았다. 포기도 하고 싶었지만 성탄절 연극의 전통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에 의무감에서 했다. 그 후로도 많은 작품들이 계속해서 성탄절 이브를 장식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성탄절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크리스마스트리였다. 대개 청년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우리 교회에 거의 매년 크리스마스트리를 도맡아 오던 집사님이 계셨다.

그 분은 망가진 전구를 갈아 끼우고, 청계천에 가서 새로운 형태의 크리스마스트리를 사오곤 했다. 그리고 세상 곳곳을 밝히는 크리스마스트리에 점등을 하셨다. 우리가 사는 동네는 서울에서 하늘이 가장 가까운 동네여서 밤이면 별빛이 가로등처럼 밝혀주던 곳인데, 성탄절이 되면 우리 교회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동네의 가로등이 되어 주곤 했다.

이제는 어른이 되었고, 아이들이 꾸미는 성탄절을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의 재롱 잔치를 보면서 기뻐한다. 성탄절의 설렘도 없다.

그리고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도 사라진지 꽤 오래된 것 같다. 거리에 캐럴이 사라지고, 교회의 크리스마스트리도 없어졌다. 새벽 송은 옆집에 피해를 준다는 민원이 많아서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산타크로스의 상업주의 열풍과 성탄절 때에는 두 배가 넘는 폭리를 취하는 얄팍한 상술이 판치고 있다. 몇 해 전에 덴마크를 다녀 온 적이 있다. 그 때 가져온 양초가 있는 데, 12월 25일까지 날짜 눈금이 표시되어 있다.

성탄절을 고대하면서 기다리는 마음 자세를 표현한 것이란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성탄절의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나 축제의 장이 아니라 성탄절의 설렘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내 가슴 속에 예쁘게 남아 있는 무지개떡, 옆집까지 축복을 기원했던 새벽송, 전혀 다른 세상 속에 사는 내가 접해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의 만남, 힘들었지만 열심히 연습해서 무대에 올렸던 성탄절 연극, 그리고 손수 만든 크리스마스트리. 이 모든 것은 내 마음의 사진기로 촬영된 사진들이다. 나를 키운 8할의 빛바랜 성탄절의 흑백 사진들. CTK
 


이규철 좋은교사 수업코칭연구소장이며 「수업 딜레미: 나의 수업, 어디서 흔들리는가」(맘에드림)의 저자이다. CTK(2014년 6월호)의 “이제 공감의 지대로 한 걸음 들어설 때” 등 여러 편의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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