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서 희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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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희망으로
  • 이진경
  • 승인 2019.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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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생 투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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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3일 토요일  ‘전기맨’

약국 다녀오신 엄마가 오늘은 봄 날씨 같다고 하시던데, 정말 그렇다. 몸을 휘감는 공기의 기운이 안온하고 바람은 정적이다. 잊을 만하면 오는 진료 안내 문자를 보며, 닷새 정도 만에 항암을 깜빡할 정도면 하루를 길게 사는 거라 느낀다.

손도 발도 조금씩 저릿해지기 시작했다. “내 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아. 나 전기맨이야.”

며칠 전 엄마에게 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충분히 견딜 만하고, 저릿한 발로라도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으로 여겨지는지.

우리집에 오는 모임 사람들에게 커피를 내려주기 위해 필터를 사러 가고, 엄마에게 맛 보여드리기 위해 근사한 쿠키를 사러 가는 지금, 내 의지로 내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새삼 감사하다.

또, 손과 팔이 저릿하도록 뜨개질을 하여 곧 완성될 워머를 눈앞에 두고선 뿌듯하다. 뜨개질에 골몰하다 오후에야 처음 신선한 바깥바람을 쐬는, 길고도 짧은 하루.

 

11월 25일 월요일  ‘우리들의 간절한 위시wish

삼엄한 분위기의 종합병원에 놓인 따뜻한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은 잠깐이라도 몸과 마음을 멈추어 서게 한다.

죽음과 맞닿아 있는 최전선에서 용감하게, 또는 좌절한 상태에서 싸우고 있는 군사들은 이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며 잠시나마 마음의 빈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주로 상기하게 되는 것은 내게 아무 일도 없었을 때는 크게 느끼지 않았던 것들이다. 따스한 가족의 사랑, 열정적으로 일했던 시간들, 연인과의 평범한 데이트, 친구나 동료들과의 커피 한 잔의 순간들이다. 구석구석 걸으며 돌아다녔던 소박한 여행지들도 떠오른다.

몸은 살벌한 곳에 있지만, 마음은 아늑한 추억으로 들어가 있는 잠깐 동안의 시간은 꿈속 같다. 다시 현실로 돌아 나오면 내 앞엔 채혈실의 두꺼운 주사 바늘과 심전도 검사실의 차가운 집게 전극이 기다리고 있다.

이곳과 저곳 사이는 얼마만큼의 간극일까. 모두가 이곳과 저곳 사이에서 살고 있는 걸까. 

크리스마스트리 장식과 함께 환자 및 보호자들이 소원을 적어둔 위시카드 나무가 있다. 위시카드엔 어머님, 아버님, 남편, 아내, 자기 자신, 자녀의 회복을 비는 손 글씨로 빼곡하다.

꾹꾹 눌러 정성들여 쓰면 그 소원이 정말 이루어진다고 여기는 듯, 그곳의 글씨들은 하나같이 또박또박 명확하다. 이런 소원은 아무도 날려 쓰지 않는구나. 

오늘은 CT 촬영을 앞두고 휠체어에 앉아 허리를 90도로 구부리고 오열하는 중년여성 환자를 보았다. 그 옆에서 간호사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그분이 겪고 있을 통증과 고통, 그로 인한 절망과 무기력이,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엉엉 토해내는 어른의 울음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그 옆에서 기도로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 가운데서도 깊은 위로, 심지어 즐거움과는 전혀 다른 질감의 기쁨joy이 하나님의 임재로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위해 기도했다. [전문 보기 : 지금, 여기에서 희망으로]

 


이진경 CTK 창간에 힘을 보탰고, 에디터로 일했다. ‘싱글 이야기’를 연재했으며, 지금은 암 투병 중에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희망의 속도 15km/h」, 「좋은 죽음 나쁜 죽음」, 「감각의 제국-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감각의 모든과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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