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를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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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를 회복하라
  • 존 오트버그| John Ortberg
  • 승인 202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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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지기 쉬운 유혹과 다다르기 힘든 진정한 권위

 

권위는 위조될 수 있다. 그래서 경찰관 사칭은 범죄 행위다. 때로 겉만 번지르르한 권위가 사람들을 속인다.

영적 권위도 위조될 수 있다. 이따금 겉모습은 그럴듯하다.

한 사람의 태도가 그의 진지함과 본질과 열정을 암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타고난 능력의 결과일 뿐 진정한 영적 권위의 발현은 아닐지 모른다.

진정한 영적 권위란 내뱉은 말의 진실, 그 말 뒤에 감춰진 영혼과 관련이 있다. 권위란 진실, 곧 정직하게 살아 있는 진실에 관한 것이다. 진실한 말이 무게 있는 까닭은 그 말이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실체(reality)를 멋들어지게 정의한다. “실체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진정한 영적 권위란 우리를 실체와 맞닿게 해주는 그 무엇이다.

 

 

권력 있는 말

복음서에서, 예수는 “권위 있는 자처럼” 가르쳤고,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주목했으며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비교했다. 흥미롭게도, 바리새인들은 누구 못지않게 성경에 푹 잠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가르침은 성경적이었으나 진실한 울림이 없었다.

예수가 활동할 당시, 율법 선생들은 대개 선례를 인용해 가르쳤고, 다른 사람들이 앞서 내린 결정을 토대로 자기주장을 펼쳤다. 오늘날의 사법 체계와 비슷했다. 판사는 대개 “판사로서, 판사로서, 당신에게 말합니다”라고 하지 않는다. 판사는 과거로 돌아가 판례를 인용하고 판례를 토대로 판결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질적으로 전혀 달랐다. 예수의 말은 분명 성경에 기반을 두었지만 그는 거듭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했다. 그는 진리를 몸으로 구현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는 이런 의미에서 유일무이한 권위를 지녔다.

한 인간일 뿐이고 신이 아닌 게 틀림없는 설교자로서, 나는 예수가 했듯이 그렇게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는 무게 있고 권위 있는 진리를 말하려 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모두 예수의 권위를 힘입어 말하고 싶어 한다.

지은이(author)와 권위(authority)는 틀림없이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게를 갖듯이 우리의 말도 무게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눈곱만큼도 어김이 없다. 하늘의 말씀은 하나도 헛되이 오지 않는다. 목적을 갖고 온다. 우리가 하는 인간의 말도, 비록 죄로 뒤틀렸지만, 여전히 미약하게나마 진실을 담고 전달하는 능력이 있다. 우리의 말이 실체를 빚어내고 전달할 때가 있는데, 이는 우리가 권위를 갖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언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에서 왕들이 사용하던 언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왕은 “세금이 있으라”라고 말할 수 있었고, 왕이 그렇게 말하면 세금이 생겨났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주권자요 왕이신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무엇인가를 지어(author) 존재하게 하셨다. 이것이 권위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신뢰와 존중이 있을 때, 우리는 너나없이 이것을 느낀다. 부모가 아이에게, “방 청소 해라”라고 말했을 때,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바르고, 부모가 바른 마음과 바른 방식으로 말한다면, 부모의 말이 적어도 조그마한 실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이 짓는 것(authoring)이다. 이것이 권위(authority)다.

나는 권위 있는 설교와 효과적인 설교를 구분한다. 그러나 둘은 연결된다. 두 설교자가 동일한 말씀을(동일하게 권위 있는 말씀을) 읽고도, 한 설교자는 청중의 심금을 울리는 설교를 하고 다른 설교자는 죽을 쑨다.

죽을 쑨 설교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은사가 부족하거나 자신이 하는 말을 자신조차 믿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효율성을, 메시지가 청중의 머리와 가슴을 파고들게 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그의 설교는 진실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설교가 감동을 준다는 뜻은 아니다.

언젠가 세계 최대의 강사 단체를 운영하는 어느 여성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누군가 그에게 “성공적인 강사의 첫째 조건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다. 그가 명료한 표현력이나 지성이나 감성을 꼽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의 대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는 열정을 꼽았다. 성공적인 강사의 첫째 조건은 자신이 말하는 바를 열정적으로 전하는 태도라고 했다. 생각할수록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었다.
 


열정의 제자리

열정이라는 말을 듣고 학창 시절 선생님을 떠올린다면 제대로 짚은 거다. 우리는 내적 열정을 느낄 때 감동도 받았다. 선생님에게 내적 열정이 있었다는 말은 큰 소리로 말하거나, 외향적이거나, 감성이 풍부했다는 뜻은 아니다. 누군가 한 주제에 온통 마음이 사로잡힐 때, 우리는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여러 해 전, 윌로크릭교회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다. 죽을 쒔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리로 돌아가 옆에 앉아 있던 빌 하이벨스에게 말했다. “횡설수설한 거 같아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아주 제대로 짚으셨네요.”

그때 그는 우리가 정말 좋은 강연을 들었다면, 강사는 시작한 지 5분 안에 “우리가 이 주제를 얘기하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라는 질문에 답을 했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물론, 매주 “왜 우리가 이것에 관해 얘기하는 게 정말 중요한지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공식처럼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한 후로, 나는 그의 말대로 했다. 정말이지 그가 말한 그대로였다.

그래서 이제는 대화할 때, “왜 우리가 이 주제를 놓고 얘기하는 게 중요한가?”라고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그 주제에 관해 말하지 말아야 하거나 그 주제를 다루는 올바른 방식을 찾지 못한 것이다.

지난 가을, 한 친구에게 물었다. “우리 교회가 삶이 변하는 곳이 되게 하려면 내가 어떤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할까?”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네가 매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누리면서 그 안에서 깊은 만족과 기쁨과 확신을 체험하는 것, 아닐까.”

나는 이 문구를 내 사무실 문에 걸어두었다. 설교 원고를 쓰거나 모임을 인도하거나 계획을 세울 때면, 이 문구를 보면서 나 자신을 일깨운다. 내가 교회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깊은 만족과 기쁨과 확신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아무도 그 일을 막지 못한다.

그 어떤 환경도, 그 어떤 사람도 그것을 막지 못한다. 내가 진심으로 그 일을 항상 먼저 두고 추구한다면, 그로부터 열정이 쉼 없이 흘러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나의 최우선 목표로 두지 않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면, 열정은 위험한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나는 열정을 위조하려는 유혹, 즉 억지 감정이나 조작으로 이러한 열정을 대신하려는 유혹을 받을 테니 말이다.
 


남용되는 권위

자신의 열정을 조작하는 것만큼이나 권위의 남용도 끔찍한 문제다. 우리는 권위가 남용되는 방식을 자주 접하면서 권위를 크게 의심하는 시대에 산다. 이따금 설교하는 강단에서도 권위가 남용된다.

고백하건대, 나도 이따금 권위를 남용했다. 어떤 때는 설교 원고를 쓰면서 특정 교인에게 화가 치밀기도 했다. (물론, 지금 교회에서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예전의 교회들에서 그랬다는 말이다…) 내가 험담하고 있다면, 험담의 대상이 되는 누군가를 생각하거나.

어쩌면 나를 험담하는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교할 때는 그 사람을 짐작할 만한 단서를 남기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금 누구 들으라고 말하는지 당신이 정확히 알았으면 좋겠소.” 물론, 이렇게 할 때, 내 권위는 남용되고 있는 것이다.

자주, 권위 남용은 조금 지나친 격렬함으로 표현된다. 지나친 열기로 표현된다. 지나친 감정으로 표현된다. 그런가 하면 지나치게 판단하거나 독선적인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권위는 이렇게만 남용되는 게 아니다. 복음을 가르친다는 미명하에 교인들을 조종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게 만든다면, 이것도 권위를 남용하는 짓이다. 이를테면, 나는 교인들이 교회 일에 자원하길 바란다.

그러면 교회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저도 이해합니다. 직장에 나가 일을 해야 월급을 받지요. 그러니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께 나오길 원하신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신다면, 교회에 나와 봉사하세요.”

내가 이렇게 한다면,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을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소홀히 하는 셈이다. 각자의 일터에서 일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라는 개념 말이다. 게다가, 그것이 내 자아를 만족시켜준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재우쳐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게 만들려고, 이를테면, 거룩과 세속을 인위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권위 남용도 있다. 감정을 억지로 쥐어짜내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감정을 조작하려 드는 것이다. 이따금 설교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본다. 이따금 나 자신도, 본인도 전혀 모르게, 그런 행동을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설교하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깊은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러면 아무 생각이나 의도도 없이 잠시 멈춘다. 잠시 멍해진다. 잠시 목소리가 떨리는 게 마치 “지금 제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것은 인위적이다. 누군가 정말로 이런 데 능하다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권위를 손에 넣으려고 소통 수단을 조작하는 짓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거짓 감정을 자아내려는 유혹을 받지는 않지만, 논쟁에서, 대개 신학 논쟁이나 정치 논쟁에서 이기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것도 설교 강단에서 말이다. 이들은 되갚아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억지 논리를 내세운다. 이들은 상반된 관점을 잘못 제시하거나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비웃는다. 이들은 논리를 내세워 결론에 이르려 들지만, 그 결론에는 사랑도 없고 배려도 없으며 전혀 사실도 아니다. [전문 보기 : 권위를 회복하라]

 


존 오트버그는 캘리포니아주 멘로파크에 있는 멘로파크장로교회 담임 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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