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투스 빅토르’는 왜 충분하지 못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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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투스 빅토르’는 왜 충분하지 못한가
  • 리처드 마우 | Richard Mouw
  • 승인 2020.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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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보다 십자가의 진리를 더 잘 담아내는 속죄론은 없다

 

글로벌 가스펠 프로젝트
Global Gospel Project

강의 중간 쉬는 시간이었다. 마침 젊은 목회자 몇 사람이 토론하는 내용이 귀에 들어왔다. 방금 전에 들었던 강의 주제인 속죄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그중 한 사람이 다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이제는 설교할 때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신 그리스도가 소비주의, 군국주의, 민족주의, 광신적 애국주의와 같은 “권력들”에 어떻게 맞서셨는지 이야기한다고 했다. 나는 그 대화에 끼고 싶은 유혹을 애써 참았다.

강의가 끝난 후에도 그 사람이 했던 말이 마음을 계속 불편하게 했다. 몇 시간 후, 운전을 하고 가다가 뭔가 들을 만한 것이 없나 하고 라디오 채널을 돌리던 중에 기독교 방송을 듣게 됐다. 한 남자가 실업가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영적 여정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그 남자는 사업에 성공하여 탄탄대로를 달렸지만 개인 생활은 망가져가던 당시를 회상했다. 술을 많이 마셨고,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했으며, 자녀들과는 서먹서먹했다. 결혼 생활은 파탄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의 아내와 딸은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지만, 그는 교회 문턱을 밟지도 않았다.

어느 토요일 밤, 마티니 몇 잔을 들이킨 그에게 열 살 난 딸아이가 다음날 아침 교회에 같이 가자고 졸랐다. 딸아이의 찬양 팀이 예배에 서게 됐는데 아빠가 꼭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마지못해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숙취가 덜 풀린 채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전날의 약속이 무척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켰고, 딸아이와 함께 교회에 갔다.

그날 예배에서 그는 자신이 죄인이며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되었다. 예수가 그의 죄를 대신하여 갈보리에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설교를 듣는 내내 그는 눈물을 쏟았고, 자신의 수치와 허물을 가져가달라고 기도했다. 그날 이후 그의 삶은 새로워졌다. 

나는 강의에서 봤던 그 젊은 목사에게 이 간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다. 간증을 했던 그 남자가 그날 아침 그 젊은 목사의 교회에 갔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그는 예수가 갈보리 언덕에서 소비주의, 군국주의, 민족주의, 광신적 애국주의라는 ‘권력들’과 어떻게 싸웠는지에 관한 설교를 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설교가 삶을 변화시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설교가 십자가 앞에 죄를 가지고 나아가라는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예수의 구속 사역이 소비자와 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실제적인 관련 있음을 부인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실 성경은 십자가 사역을 다양한 면에서 바라보며, 속죄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상징을 보여준다. 자기희생적 사랑, 원수를 용서하는 것, 빚의 청산, 포로의 몸값, 어둠의 통치자와 권세자들에 대한 승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신학자 스캇 맥나이트는 이처럼 다양한 속죄의 이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탁월한 비유를 들었다.

그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속죄: 살아있는 신학」A Community Called Atonement: Living Theology에서 속죄의 다양한 이미지는 마치 여러 개의 골프채가 가득 들어있는 골프 가방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각 골프채는 각기 다른 상황에 사용한다.

골프를 많이 쳐본 사람이면 드라이버나 웨지나 퍼터를 사용할 적절할 시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젊은 목사가 다양한 신학이 담긴 골프 가방을 가지고 있고, 적절한 상황에서 ‘승리’라는 채를 사용한 것이라면, 그의 이야기를 듣고 걱정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목사는 대속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에게는 그 말이 그의 신학이라는 골프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들렸다. 그 목사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의 말은 젊은 세대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최근 널리 유행하고 있는 하나의 풍조를 보여준다.

그들은 대속이라는 주제를 불편해하고 ‘크리스투스 빅토르’Christus Victor의 접근법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십자가에서의 ‘해방’

속죄론은 갈보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신학적 답변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동안 어떤 중요한 계약이 이루어졌는가?

전통적인 기독교는 십자가 사역이 삼위일체의 내적 계약이었다는 점을 매우 강조해왔다. 예수는 자신을 아버지께 ‘바쳤다’. 즉 그분은 우리 인간이 갚을 수 없는 빚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자신을 드려 십자가에 달리셨다.

20세기 초반 개신교 자유주의자들은 속죄에 대한 이러한 시각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해리 에머슨 포스딕은 전통적인 속죄론에 대해 “도살장 종교”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1922년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것인가?”라는 유명한 설교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성난 하나님을 달래야 한다는 그러한 관점은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성”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최근 몇 년 사이 몇몇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이 이와 비슷한 과격한 견해들을 다시 내놓았다. 이 신학자들은 아버지가 아들을 처벌한다는 개념이 가족 간의 폭력을 조장한다고 보았다.

그중 조앤 칼슨 브라운은 전통적인 속죄 신학의 신이 가부장제를 지배하는 “피에 굶주린 하나님”이라는 극단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예수의 죽음으로 원죄에서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 폭력적인 가부장제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전통적인 관점에서 ‘해방’시키려는 신학자들은 예수의 사명에 초점을 맞춘다. 즉 ‘도덕적 표본’이라는 주제에 무게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십자가는 다분히 도덕적인 관점에서 해석되는 무언가를 계시해준 사건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예수의 말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예수의 고난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납을 묘사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이웃과 원수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투스 빅토르’의 관점 역시 그보다 오래된 자유주의의 ‘도덕적 감화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닮는 데 강조점을 둔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이 속죄의 의미를 도덕적 모방으로 바꾸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크리스투스 빅토르’ 관점은 ‘초자연적’ 성격이 강하다.

십자가는 성숙한 인간성의 표상뿐 아니라 악에 단호히 맞서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집단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권세자들은 당대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종교적 권력자들을 대표했다.

사실상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꺾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 영적 ‘통치자와 권세자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하지만 예수는 “힘없는 자들을 용납하셨으며”(이는 메노나이트 신학자 존 하워드 요더의 유명한 표현을 인용한 것이다), 타락한 상태에 있는 우리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강제적이고 폭력적 수단을 거절하셨다.

이를 이해한다면 부활이란 권세자들과 그들이 상징하는 것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사건이다. [전문 보기 : ‘크리스투스 빅토르’는 왜 충분하지 못한가]

 


리처드 마우 풀러신학교 총장

Richard Mouw, "Why Christus Victor Is Not Enough" CT 2012:5; CTK 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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