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호한) 정치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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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호한) 정치적 삶
  • 존 스택하우스 주니어 | John G. Stackhouse Jr.
  • 승인 20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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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는 이 세상이 온통 뒤섞여 혼란한 곳이라 했다. 하나님 말씀조차 어떤 땅에 떨어지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열매를 맺고, 알곡과 가라지가 한데 얽혀 자라기에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알곡까지 상하게 하는 곳이 이 세상이다.

세상 경제를 따르더라도, 알곡과 가라지뿐 아니라 밭에서 자라는 모든 식물이 추수 때까지 충분히 여물어 제 모습을 드러내도록 가만 두어야 한다. 추수 때가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뿌리가 뽑힐 것이며 심판을 받고 복과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어거스틴이 경고한 것처럼, 아직은 그리스도의 원수들과 최후의 결전을 벌일 때가 아니다.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친구가 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은 타락의 영향으로 이미 부패했다. 원수는 인간 대리인들에게 지구 자원을 부질없는 일에 사용하도록 부추기고,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 샬롬을 추구하는 사람들 옆에 그들을 붙여 놓는다. 간단히 말해, “가라지” 역할을 맡긴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다가오는 선거와 거기서 선출될 차기 정부, 그리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구상에서 살아갈 모든 삶에서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해야 하는가?

먼저 죄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부정한 돈을 받는 정치인들이 있을 테고 뇌물을 수수하는 관료들이 있을 것이다.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회사와 주주, 고객을 저버리는 기업체 임원들이 나올 것이다. 음주 운전, 마약 밀매, 부정 담합, 성폭력, 주가 조작, 테러 등도 예상해야 한다.

죄를 예상한다고 해서 죄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아니다. 죄를 묵과하겠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죄를 예상한다는 것은 죄에 대비해 계획을 세우겠다는 실제적인 의미다. 벌써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것처럼 살지 않겠다는 뜻이며, 죄를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세워 가겠다는 뜻이다.

우리는 또한 죄를 넘어서 낭비까지도 예상해야 한다. 정부와 군대, 기업들이 돈을 헤프게 쓴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학교와 병원, 자선 기관들은 사람들의 시간과 재능 그리고 지구 자원을 허비한다. 창세기 3장이 예고하듯, 일은 고된 노동이 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사방을 덮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죄와 낭비뿐 아니라, 어리석고 터무니없고 헛되고 지저분한 일까지도 예상해야 한다.

이처럼 악이 넘쳐 나는 환경 속에서 알곡은 가라지 같고 가라지도 알곡처럼 보인다. 당장 앞길은 보이지 않고 결과도 예측하기 어렵다. 밭은 악뿐만 아니라 모호함까지도 우리에게 선사한다.

하지만 이를 예상하고 대비책을 세울 만큼, 이 모호한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다. 진보든 보수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선과 악 양 극단으로만 보려고 한다. 하지만 밭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뒤섞여 있는 법. 그렇다면 우리는 모호함이라는 어두운 진실을 주시해야만 한다.

 

 

목회자와 정치

분명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정치 활동에 필요한 은사와 소명을 가지고 있다. 반면 은사는 없는 것 같지만 경험을 통해 지지를 얻고 결국 기회까지 얻게 된 이들이 있다. ‘음주 운전을 반대하는 어머니들’이나 사법 개혁의 선봉에 선, 희생자의 부모 같은 이들이다.

어떤 섬김이 선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일에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분별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정치인들과 정치학자들은 정치에 대해 가장 도움이 되는 충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교육자들과 사회학자들과 학부모들은 학교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의학교수들과 원목들과 환자들은 의료 서비스에 대해 제안할 것이 제일 많을 것이다.

목회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두 가지 방식으로 섬길 수 있다. 하나는 그들에게 기독교적 사회 참여의 원칙, 기독교적 사명과 부르심의 본질을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소명을 추구하라고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목회자가 정치나 교육, 의료 같은 영역에서 실제로 일해본 경험은 드물기 때문에 그 영역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잘 알거나 더 잘 하기란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목회자가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정작 자신의 주된 부르심의 자리에서 신뢰를 잃고 쓸모없는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어느 목회자도 설교를 듣는 회중들이 이렇게 생각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좀 아는데, 이 목사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군. 영적 문제에 대해서 이 목사를 신뢰해도 될까?”

물론, 목회자가 정치 문제에 대해 발언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왜일까? 성경에 근거한 대답을 듣고 싶어서다. 이것저것 뒤섞어 놓은 타협 같은 것이 아닌, 진실하고 솔직하고 의롭기까지한 대답을 바라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현실 정치에서는 이처럼 명약관화한 답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일차적 소명은 우리를 불러 하나님께 응답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하며, 악을 버리고 선을 붙들게 하고, 새롭게 태어나 천성을 바라보며 꾸준히 전진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이분법적 사고는 목회에는 전적으로 들어맞을지 모르나 정치 현장에서는 현실적이지도 않으며 영향을 주지도 못한다.

목회자는 최대한 순수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타협 없이 거룩하게 살 것을 요청한다. 반면 모든 것을 회색빛으로 보는 정치인은 훗날을 기약하며, 한시적이고 부분적인 해결책을 현재 가능한 최선으로 여기며 타협안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목회자가 추구하는 것과 정치인의 능력은 충돌하게 마련이다. 선한 정치인이 드문 것처럼, [정치에] 실질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선한 목사도 드물긴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러저러한 문화적 도전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고 현실 문제에 개입하기를 목회자들이 진심으로 바란다면, 직접 뛰어들 것이 아니라 “성도로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엡 4:12) 하는 것이 자신의 구체적 소임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전문 보기 : 이(모호한) 정치적 삶)]

 


존 스택하우스 주니어(John G. Stackhouse Jr.)는 밴쿠버에 있는 리젠트칼리지의 석좌교수다. 이 기사는 「최선을 다하여: 진짜 세상에서 그리스도 따라가기」(Making the Best of It: Following Christ in the Real World)에서 발췌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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