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네 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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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네 가지 방법
  • 고든 맥도날드 | Gordon MacDonald
  • 승인 2020.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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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생존을 넘어서서

마태복음 5장은 매우 유명한 본문이다. 이 본문은 오늘날 특히 더 중요하게 다가오는데, 그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려고 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13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절).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절).

예수님은 소금과 빛이라는 은유를 통해 비기독교적 사회나 기독교 이후 사회, 또는 기독교에 미치지 못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무엇인지 가르치신다. 그분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 교회와 세상의 차이를 강조하시고, 그리스도인이 비기독교적 환경에 어떤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지 강조하신다.

둘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세상은 썩은 고기 같지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은 어둔 밤 같지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교회와 세상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이 차이점에서 영향력을 이끌어내신다. 썩어가는 고깃덩어리에 뿌려진 소금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부패를 막아야 한다. 캄캄한 어둠을 비추는 빛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사회를 밝히고 더 나은 길을 제시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이 두 단계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교회와 세상이 다르다는 사실은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인 교회는 마치 썩어가는 고기가 소금과 구분되듯이, 어둠과 빛이 구분되듯이 옛 사회와 구분된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단순 생존, 즉 세상과의 구별된 삶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 사람들은 소금은 짠맛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금이 오염되면 큰일이라면서 말이다. 빛은 계속해서 빛을 내야지, 어둠에 잠식되어서는 안 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목숨을 유지하는 데 불과하다. 소금과 빛은 주변 환경과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라, 그 환경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 고기에 소금을 뿌려야 부패를 막을 수 있다. 빛은 어둠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불을 켜서 등경 위에 올려놓아야 주변이 환해진다. 이처럼 주변 환경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단순 생존과는 차원이 다르다.

 


네 가지 능력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은 어떤 종류의 영향력인가? 그리스도인들이 능력을 드러내는 방법을 몇 가지 제시해보려 한다.

첫째, 기도에 능력이 있다.

이 말을 허울 좋은 경건으로 치부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회 운동을 너무 활발히 하느라 기도는 내팽개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잘못이다. 그렇지 않은가?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다.

교회가 자기가 속한 사회와 그 지도자들을 위해 해야 할 으뜸가는 의무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

평화보다는 폭력이, 겸손보다는 무례함이, 정의보다는 압제가, 거룩함보다는 세속주의가 사회에 만연하다면, 그 이유는 교회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공공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에 5-10분은 충분히 할애해야 한다.

온 회중이 함께 하나님 앞에 고개 숙여 이 세상과 그 지도자들을 주님께 올려드리고 그분이 개입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기도 모임이나 소그룹, 개인기도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 시간에 전 세계를 품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교구나 지역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품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온 세상의 하나님이 세상에 품으신 관심사를 우리도 공유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우리 기도에 이런 관심사를 담아내야 한다.
 


둘째, 진리에 능력이 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에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는 말씀을 즐겨 하며, 전도할 때 복음의 능력을 확신한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과 구속을 받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복음에만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진리에는 능력이 있다. 무엇이 됐든 하나님의 진리는 사탄의 거짓말보다 훨씬 더 막강하다. 당신은 이 사실을 믿는가, 아니면 비관주의자인가? 사탄이 하나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가? 거짓이 진리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진리가 거짓보다 강력하며, 하나님이 사탄보다 더 강력하시다고 믿는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3:8에 기록한 것처럼,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다.” 요한이 요한복음 앞부분에 썼듯이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새번역). 당연하다. 그 빛은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전설적인 소련 반체제 인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진리가 거짓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진리라는 한 단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작가들에게는 발사할 로켓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아주 대수롭지 않은 보조 운송 수단도 없습니다.

전투력이라고는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문학은 공공연한 폭력이라는 무자비한 공격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솔제니친은 우리가 결코 무기력하지 않다고 말한다. “진리라는 한 단어가 온 세상보다 더 큽니다.”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이 말을 굳게 믿어야 할 이들이다. 그의 말이 옳다. 진리는 폭탄과 탱크와 무기보다도 더 강력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진리가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논쟁을 통한 설득이다. 복음의 진리를 설득하는 전도 과정에 교리 변증가가 필요하듯이, 하나님의 도덕법에 깃든 진리와 선함을 설득하는 사회 행위 과정에는 윤리 변증가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기독 사상가가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지성을 활용할 사람들, 강연과 집필, 언론과 방송 활동을 통해 대중의 의견에 영향을 미칠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한 가지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법을 정해 사람들을 억지로 교회에 나가게 만들 수는 없다. 일요일에는 무조건 쉬라고 강제할 수도 없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그것이면 만사 해결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 편에서 최선의 주장을 내놓을 수는 있다.

인간은 심리적ㆍ신체적으로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하고, 주중에는 모이기 힘든 가족 구성원들이 일요일에는 한데 모이는 게 가족생활에 유익하다는 주장을 펼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일을 강요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가족생활을 권장하는 법안을 지지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접근은 기독교적 관점을 강요하는 것도, 비그리스도인들의 관점을 방치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을 독단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신체적ㆍ심리적ㆍ사회적 근거를 총동원하여 지혜와 진리가 담긴 성경의 가르침을 권하는 것일 뿐이다. 왜? 우리는 진리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논거로 성경의 진리를 설득시키는 것이 미심쩍게 느껴진다면, 1977년 미국 잡지 <세븐틴>에 실린 다음 기사를 한번 생각해보라. “동거 반대론”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오하이오주립대학의 사회학자 낸시 무어 클랫워시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클랫워시는 10년간 혼전 동거 현상을 연구했다. 처음 연구를 시작하면서는 동거에 호의적인 입장이었다. “젊은이들은 동거가 아주 만족스럽다고 말했어요.” 그는 그 사람들의 말을 믿었다고 했다. 두 사람이 서로 알아가는 연애에서 동거는 합리적이고 유용한 단계처럼 보였다.

그러나 연구 과정에서 수많은 기혼, 미혼 커플을 조사하고 난 이후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동거가 두 사람, 특히 여성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혼전 동거 커플들은 초조함과 두려움에 시달렸고, 결혼생활에서 있을 수 있는 문제와 고통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었다.

클랫워시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행복과 존경과 적응 면에서, “결혼한 부부보다는 혼전 동거 커플 사이에 더 문제가 많다.” 혼전 동거 커플은 그렇지 않은 커플보다 모든 면에서 불화가 더 심했다. 클랫워시는 동거가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두 번째로는, 사람들이 부부 관계에서 기대하는 것, 즉 헌신에 대해 지적했다. 부부가 서로 헌신해야 결혼생활이 가능하다. 그런데 동거생활에는 문제가 있다. “혼전 동거처럼 어떤 상황을 일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에 대한 헌신의 정도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혼전 동거 커플들은 그 관계를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 열심을 덜 내기 마련이다. 결국, 혼전 관계의 75%는 깨진다. 특히 여성쪽이 상처를 받는다.” 클랫워시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통계적으로 보면, 혼전 동거보다 결혼이 훨씬 더 낫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온전한 헌신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다 빠져나갈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클랫워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의 연구는 성경의 권위가 아니라 사회학적 조사 결과에 근거한 것이다. 그럼에도 결혼 제도에 대한 그의 사회학적 연구는 기독교 윤리학의 정당성을 입증해준다. 이런 사실은 성경의 진리는 물론, 일반 지식에 드러난 그분의 진리에도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전문 보기 : 소금과 빛]

 


존 스토트(Jonh Stott, 1921-2011년)는 런던에 위치한 올소울즈교회에서 목회했다. 랭햄 파트너십 인터내셔널을 설립했고,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이 기사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자매 웹사이트인 프리칭닷컴투데이에 실린 설교문을 편집한 것이다.

John Stott, "Salt and Light" PreachingToday; CTK 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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