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변화를 이끄는 대화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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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변화를 이끄는 대화 기술
  • 케빈 A. 밀러 | Kevin A. Miller
  • 승인 2020.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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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과 없이 경청하라. 분류하지 말고 분별하라. 고치려 하지 말고 권면하라. 잔소리 하지 말고 확인하라.

 

가 어렸을 때 토요일 아침은 허드렛일을 하는 시간이었다. “얘야, 가자.” 아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스테이션왜건에 올라탔고, 아빠는 후퍼 울프 철물점으로 차를 모셨다.

후퍼 울프 철물점 문은 오래된 나무로 만들었는데 손잡이 둘레의 닳은 곳을 빼고는 전부 새하얀 색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두 개의 통로는 비좁았고, 계산대 위나 선반에는 물건이 넘쳐났고, 천장에도 물건이 걸려 있었다. 도대체 여기서 물건을 어떻게 찾을 수 있지?

그러나 물건을 직접 찾을 필요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계산대 뒤에서 클레어런스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뒷마당에 등을 하나 걸려고요.”
“어디다 걸려고요? 테라스 위에다요? 그럼, 흠….” 아저씨는 계산대 뒤에서 걸어 나오면서 선반을 훑어보기 시작하다가 이내 딱 맞는 등을 찾아냈다. “이런 걸 원하시죠? 여기엔 이런 걸쇠를 사용하지 마세요. 실내에 사용하실 때나 어울리지 야외에선 아연으로 도금한 게 필요하실 겁니다.”

“벽돌 벽이죠?” 아저씨가 물었다. (우리 마을이 작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 집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아저씨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전선이 거기를 통과하려면, 음, 적어도 3/4인치 석재용 드릴 날이 필요하겠네요. 우리 가게에 재고가 없으면 저기 밀러네 목재상에 가서 구하세요.”

그러곤 아저씨는 귀에 걸었던 조그만 목수용 연필을 꺼내 들고는 작은 종이에 도면을 그렸다. “전선이 이리로 지나가죠. 아, 그리고 등을 천장 밑면에 너무 바짝 설치하지는 마세요.”

 

굿 바이, 클레어런스 아저씨

요즘은 토요일 허드렛일을 하려면 홈 디포 철물점으로 향한다. 옛날 후퍼 울프에서는 다른 차 뒤에 나란히 노상 주차를 해야만 했지만 지금은 확 트인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홈 디포에는 후퍼 가게보다 무려 80배나 많은 물품이 진열되어 있다. 가게 안은 밝은 할로겐램프로 눈이 부실 정도다.

오렌지색 앞치마를 걸친 점원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다. 그에게 다가가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죄송합니다. 손님. 저는 페인트 담당인데, 오늘 여기 점원이 아파서 제가 이곳 전기 파트에서 돕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알아서 물건을 찾아야 한다.

비슷한 일이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디즈니 수준의 질과 기술적 정교함을 갖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그런데 무언가가 빠져있다. 클레어런스 아저씨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클레어런스 아저씨 같은 분이 필요하다.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우리 교회 성도들이 늘 내게 하는 말이다. 20대와 30대 젊은이들이 꾸준히 내 목양실로 찾아온다. 때론 왜 오는지도 모르면서 오기도 한다.

알고 보니, 그들이 정말로 원한 것은 멘토요 영적인 지도자요 목자인 것 같다. 더 지혜롭고 성숙한 어른이 자신들의 믿음과 삶을 인도해 주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디지털 친구는 많지만 아날로그 친구가 없다. 느리지만 귀를 기울여주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나눌 존재가 없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소그룹을 자랑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일대일 모임을 원한다. 뭔가 근본적인 것이 내 속에서 솟구친다.

내가 목사가 된 이유 말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내 반대의 목소리를 낸다. “몇 사람은 몰라도 정기적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만날 시간이 어디 있니?”

나는 오늘날 교회에 클레어런스 아저씨 같은 분이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더욱 더 넓은 장소” 와/또는 “더욱 더 많은 목자”라는 규모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신약성경은 두 가지 해결책 모두를 지지하는 것 같으나, 강조하는 것은 목자이다. 이는 신약에서 ‘장로’ 또는 ‘목자’(베드로전서 5장), ‘아버지’(요한일서 2장), ‘나이 많은 여자들’(디도서 2장)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맞다.

나 역시 심히 제한된 시간 때문에 목회사역 역시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평신도거나 안수 받은 직분자이거나, 어떤 호칭을 쓰든) 목자의 수를 늘려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필요로 하는, 주의 깊고 성숙한 목자들을 어떻게 늘릴 수 있을까? 어떻게 클레어런스 같은 일꾼을 더 많이 찾아내어 훈련시키고 세울 것인가?

영적으로 성숙하고, 대개는 이미 반평생을 넘기신 분들이지만, 귀 담아 이야기를 들어주고, 비밀을 지켜주고, 사랑이 넘치며, 사람들을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는(갈라디아 6장) 사람들을 찾는 법을 나는 터득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놀랍도록 강력한 네 가지 목양 훈련을 시킨다.

 

 

하나. 여과 없이 경청하기

경청의 힘이 얼마나 큰지, 목회자로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경청하는 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경청하는 척 하는 법도 알고 있다.

일류 의사들이 진료하는 바쁜 병원을 찾아간 적이 있다. 예약 시간이 되어 그 의사가 진찰실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에 그의 한쪽 발이 문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했다. 내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것 같지만, 그의 몸은 말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진료를 빨리 마쳐야 한다.’

나도 이와 비슷하다. 누군가에게 머리를 끄떡이며 그의 눈을 바라본다. “그래요, 맞아요.” 말을 이렇게 하지만, 내 머리는 잡다한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아마도 한 시간 전에 다른 누군가와 나누었던 대화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있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 사람이 그 사역을 하는 데 적임자일까?’ 아니면, 내 영혼은 이렇게 아우성치고 있을 수도 있다. ‘성도들이 나를 영적인 목사로 생각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목회자로서는 성도들과 보내는 시간은 선물이요 은혜요 옥합을 깨는 일이다. 여과 없이 경청한다는 것은, 교회 일정 관리 차원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이, 지금 이 시간에 그 사람에게 목회자로서 우리의 최고의 시간과 에너지를 준다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 자크 필립Jacques Philippe은 말한다. “누군가를 만날 때, 시간이 짧든 길든, 그와 같이 있고 그를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 말고는 그 어떤 다른 일도 하지 않고, 그 순간에 그와만 완전히 모든 시간을 보낸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

좋은 매너, 좋다. 하지만 진심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매우 어려운 이유는, 우리에게는 시간에 대한 매우 강한 소유 의식이 있고, 원하는 대로 시간을 운영하지 못하면 금새 짜증이 나기 때문이다. 진심어린 마음으로 대하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

마가복음 8장을 읽다가, 예수님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 대부분 질문을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 계산해 보니, 이 장에서만 무려 16번 질문을 하셨다. 나는 이 모델을 따라 내가 목양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질문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만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미리 질문을 보내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질문은 이것이다. (1)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지 않나요? (2) “가장 활력을 느낄 때는 언제, 어디서인가요?”

이런 질문을 한 다음에 경청을 하면, 그 사람의 영적 은사들이 드러나고, 그 사람도 자신에게 그런 은사가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갈라진 땅 위로 희망의 싹이 돋는다. 성도들은 이런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이런 이야기를 전에는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었지만….” 이어서, 수년간 짊어져 왔던 짐을 내려놓듯, 등 근육의 긴장이, 문자 그대로, 풀어지면서 고백하기 시작한다.

이런 놀라운 경험을 하고 나서, 나는 치료 전문가인 한 성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와 이런 놀라운 대화를 나눴는데, 그분이 목회자인 나에게 그토록 진솔하게 대할 수 있다는 점이 믿기지 않아요.”

그는 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아직 모르셨군요.”
“글쎄, 그런 것 같긴 한데, 내가 뭘 모르고 있는 거죠?”

그는 대답했다. “사람들은 이런 대화를 원하죠. 그런데 그들은 어디서 그런 대화를 할 수 있는지, 어디에서 그 대화가 안전하고 의미 있게 될지 모르는 것이지요.” 안전하고 의미 있는 대화는 아무런 여과 없이 경청할 때 시작된다.

 

 

둘. 분류하지 않고 분별하기

성도들은 이런 가정을 한다. ‘목사님에게 온전히 정직한 마음으로 대하자면 내 삶의 이런 저런 죄들을 털어놔야 한다.’

한편, 목사는 이 가정에 상응하는 가정을 세우는데, 그것은 현대 의학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목사로서 내 의무는 잘못된 것을 찾아 바로 잡아주고, 그가 믿는 바와 행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거룩한 것인지, 찾아서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가정에 기초한 대화는 이렇게 진행될 것이다. 성도가 말한다. “제가 다시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했어요.” 그러면 목사는 이렇게 처방한다. “우리 교회 도우미 그룹에 도움을 요청하세요. 그리고 시편 119편 9절 말씀을 암송하세요.”

이것이 반드시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는 틀린 가정이기 때문이다. 아니, 적어도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내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 사람에게는 내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샘이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하기 훨씬 전에, 그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사람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에 관한 가장 진실하고 결정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그 결점과 상처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라고 질문하는 대신에, 나는 ‘내가 그 마음을 끌어안기 위해 그 사람을 어떻게 부르고, 어떻게 확신을 주며, 어떻게 격려할 것인가’라고 질문한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핵에너지이다.

누군가에게 당신의 고통과 죄와 상처를 보여주고, 그리고 당신의 좋은 성품을 보여주는 것, 바로 여기에 변화의 힘이 있다. 이것에 진정한 이름을 붙이자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인생 경험이다.

사실, 주님은 ‘승리의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선물을 약속하신다.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흰 돌을 주겠다. 그 돌에는 새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돌을 받는 사람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계2:17)

13년 전 어느 날 예배 직전에 친구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대뜸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케빈 목사를 축복하소서. 진리를 실천으로 전하는 지도자입니다.” 이 네 마디 말, ‘진리를 실천으로 전하는 지도자’가 내 안에 깊숙이 자리 잡았고, 나에게 이름을 부여했고, 하나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냈다. 이 말이 내가 이끌고 싶지 않을 때 내게 용기를 주고,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내게 말이 되어 주고 있다.

‘분류하기’는 사탄의 이름 붙이기 방식이다. 이것은 사람의 잘못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사람을 어떤 범주에 가둬버린다. 이것은 너무나 나태하여 그 사람의 진정한 독특함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고 그것에 경탄하지 못하게 한다.

예컨대, 우리 교회는 대학가에 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복을 받았다. “여기 졸업 후에 출세하려고 애쓰는 뛰어난 대학생이 또 있군.”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순간에 나는, 그 학생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분류하는 것이다. 경청하기를 멈추고,  내 눈을 집중하지 못하게 되어 그 사람의 마음을 볼 수가 없게 된다.

내가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 여직원을 편집 보조원으로 채용한 적 있었다. 편집 일에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녀는 그 일에 만족을 얻지는 못했다. 그 직원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외국 아이들을 위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하루는 그 직원에게 말했다. “내 생각에는 당신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특히 외국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소명을 받은 것 같네요.”

얼마 안 되어 그 직원은 우리 회사를 그만 두었고, 그 뒤로 5년간 별로 연락이 없었다. 나중에 페이스북으로 서로 연결이 되었는데, 거기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대학교 학창시절 내내 내게는 아프리카의 고아들을 위해 일하는 열정이 있었다. 졸업한 뒤 사무실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동료 직원들은 좋았지만, 일 자체는 별로였다.

결국 나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더 준비하려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사무실에서 마지막 업무 처리를 하고 있을 때, 내 매니저가 내게 이런 말을 적은 카드를 보냈다.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꿈을 펼칠 수 있도록, 그동안 하나님께 기도해 왔습니다.’

5년이란 세월이 눈 깜빡 할 사이에 흘러 나는 절대 예상치 못했던 고난과 굴곡의 여정을 거쳐 지금 석사 학위를 받았다. 모든 일을 겪는 동안 어디를 가든지 나는 그 매니저의 카드를 내 ‘중요’ 폴더에 넣어 다녔다.”

카드가 누군가의 ‘중요’ 폴더에 들어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분류하지 않고, 분별할 때 가능하다. [전문 보기 : 성도의 변화를 이끄는 대화 기술]

 


Kevin A. Miller “4 Conversation Skills that Transform" Leadership Journal 2012:여름
CTK 2015:03 "성도의 변화를 이끄는 대화 기술"

케빈 밀러 일리노이 주 휘튼 부활교회 부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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