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고 싶은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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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고 싶은 예수
  • 제임스 에드워즈
  • 승인 202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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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역사에 걸쳐 교회는 그리스도를 불편하게 여겨 왔다

 

확신 없이 내려온 역사

슬프게도, 교회의 역사는 주님을 저버리는 풍조로 점철되어 있다. 때로 교묘한 신학적 궤변까지 곁들여 가면서 말이다.

2세기부터 4세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격의 사상이 제시되고 즐겨 논의되었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게 거대한 그리스도론 이단들만이 아니다.

초기 교회에서 노출되었던 그러한 논쟁들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아타나시우스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이단설을 논파한 사건 이후로 그러한 풍조가 극적으로 드러난 일은 더 이상 없었지만 말이다.

중세 신학자들은 예수의 자리에 교회 및 교회와 연합한 “기독교 세계”라는 서구 문화를 갖다 놓았다.

종교개혁기에 루터와 칼빈은 부패한 교회와 교황청이 그리스도와 복음을 성유물과 공로로 대체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다시 급진 개혁가들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문화 아이콘으로 전락시켰다며 “종교” 개혁가들을 비판했다.

철학적 논증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고 하나님을 알고자 했던 실험들을 떠올려 보자. 사람들은 존재론, 우주론, 목적론, 도덕론 등을 동원하였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탐구하고자 했던 오랜 논쟁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수세기에 걸쳐 준수한 엄격한 규범들을 보라. 많은 이들이 안식일 준수와 금주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선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과학과 기독교가 두 세기 가까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진화론 논쟁을 보라. 이 논쟁에 참여한 거의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았던가?

오늘날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보라. 타협하거나 포기한 복음의 첫 번째 조항은 다른 게 아니라 성육신이다. 그래야 기독교가 타종교의 믿음과 더욱 양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시며, 인류는 모두 형제다”라는 19세기 자유주의 슬로건은 또 어떤가. 이 구원 방정식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의도적으로 빠져 있다.

18세기 계몽 운동부터 1985년의 “예수 세미나”(The Jesus Seminar)까지 아우르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보라. 특히 “예수 세미나”는 예수님을 우리와 동일한 평범한 인간으로 전제하기까지 했다.

공립학교 행사에서 기도하는 문제나 낙태 문제를 놓고 벌이는 논쟁도 보라. 교회는 이러한 세속 문화의 문제를 자연법, 종교의 자유, 신명론의 범주에서만 이해하고자 했을 뿐, 성육신의 의미에서 고민하고자 하는 시도는 거의, 아니 아예 없었다.

이 같은 몇 안 되는 사례는 우리의 위기가 결코 이례적인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오랜 역사에 걸쳐 교회는 그리스도를 불편하게 여겨 왔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거부당하고 로마 군인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러나 4복음서 모두 명시하듯, 그를 가장 먼저 부정하고 내친 이들은 다른 이들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 모두였다.

역사를 돌아보노라면, 우리는 슬픈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 안에서보다 더 예수를 껄끄럽게 여기는 곳도 없다고 말이다.

 

중심 이동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그리스도론 위기의 양상은 어떤가? 신학의 중심이 구속의 신학에서 창조의 신학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고 나는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이루신 구속의 행위와 약속의 신학에서, 사물의 현 상태를 하나님 의지의 옳고도 최종적인 표현으로 여기는 신학으로 중심을 옮기고 있다. 이 새로운 신학의 마지막 화두는 “하나님이 복음 속에서 무엇을 하실 수 있고, 또 하실 것인가”가 아닌, “하나님이 창조 속에서 이미 무엇을 이루셨는가”다.

신학만이 그리스도론에서 창조로 중심을 옮긴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회개와 죄에 관한 교리 또한 중심을 옮기고 있다. 새로운 신학은 무엇이 본질적으로 선한 것인지 고민한다.

이와 같은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인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변화’를 요청하는 대신, 인간의 현재 모습 그대로를 확신하는 신학적 선언을 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복음이 주는 구원의 은총을 대개 ‘믿다, 돌이키다, 회개하다, 좇다’라는 변화의 타동사를 사용하여 선언하였으나 새로운 신학은 ‘~이다, ~이 되다’라는 확언의 자동사로 표현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초월성의 신학에서 내재성의 신학으로 중심이 이동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오늘날 하나님을 추정하는 진술은 인간성과 인간 사회, 그리고 창조에 관한 내용이다.

“위에서부터의” 신학이 “아래에서부터의” 환원주의적 신학으로 교체되고 있는 것이다. 이 환원주의적 신학은 이신론(Deism)과 유니테리어니즘(Unitarianism)과 맞닿아 있으며, 본질적으로 삶과 죽음의 가치가 있는 것은 자아뿐이라는 유아론(Solipsism)의 성격을 띤다. [전문 보기 : 감추고 싶은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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