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지만 끌린다
상태바
두렵지만 끌린다
  • 마크 갤리 | Mark Galli
  • 승인 2020.03.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마주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글로벌 가스펠 프로젝트 Global Gospel Project]

 

200만 년 전에서 1만 년 전 사이의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해발 약 2700m 높이의 화강암 지대로 흘러들어와 침식작용을 일으키면서 놀라운 장관을 만들어냈다.

오늘날 캘리포니아 중부의 요세미티 계곡이라 불리는 명소가 바로 그렇게 태어났다. 빙하가 깎아 만들어낸 놀라운 작품 중에는 요세미티 계곡 바닥에서부터 1600m 높이까지 솟아 있는 ‘하프돔’Half Dome이 있다.

계곡에서 이 민둥한 바위산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 암벽 등반가들은 돔 앞쪽을 기어 올라간다. 관광객들은 대개 정상까지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오른다. 나는 차로 글래이셔 포인트Glacier Point까지 이동한 후 계곡 너머에 있는 하프돔을 정면에서 마주 보곤 한다.

차에서 내려 하프돔까지 걷기 시작하는 관광객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두려워하며 경이로움을 느끼거나, 경이로움을 느끼며 두려워하는 것이다.

딱히 무엇이 먼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이런 반응은 깎아지른 듯한 거대한 바위산과 계곡 아래까지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낙차 때문이다. 낭떠러지의 가장자리로 갈라치면 사람들은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부모들은 아이들 손을 꼭 붙들고 친구들은 서로 팔에 매달린다.

말 그대로 숨을 멎게 하는 경치를 앞에 둔 관광객들은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는다. 사람들은 아래로 떨어질까 두려워하면서도 최대한 벼랑 끝까지 가보고 싶어 한다.

이처럼 죽음과 경이로움의 가장자리에 다가가는 순간 우리는 언제나 압도적 침묵을 경험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언론인 크리스토퍼 레이놀즈는 글래이셔 포인트의 “입이 떡 벌어지는 경치”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 장관은 영원을 기억하고 하찮은 인간사를 잊으라는 권유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경험 앞에서 사도신경의 첫 문장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여기서 내 관심을 끄는 부분은 ‘전능’이라는 단어, 그 전능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두려움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사역자들은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두려움은 뭔가 우리를 무력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사실상 목회란 사람들이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돕는 것 아닌가?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5:36)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요한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4:18)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아마 여호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개념일 것이다. 하나님이 못하실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그분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먼 과거의 종교적 유물일지도 모른다.

부활 사건을 겪은 우리는 좀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표현을 그분에 대한 가장 훌륭한 표현으로 여긴다. 두려움을 낳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쫓아내는 완전한 사랑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래이셔 포인트와 같은 곳에 가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끌리는 경향이 우리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멀리 떨어지기보다는 죽지 않을 만큼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한다. 삶이 다소 복잡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두려워하느냐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성경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을 덕으로 칭송하거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장면을 자주 발견한다.

다음은 시내산 아래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을 묘사한 구절이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었다]”(출19:16).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자신이 죽을 줄 알았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6:5).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두려워하길 원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주 너의 하나님을 버린 것과 나를 경외하는 마음이 너에게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고통스러운가를, 보고서 깨달아라. 나 만군의 주 하나님의 말이다.”(렘2:19)

‘친절한 예수’가 출현했지만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됐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폭풍우를 잠잠케 하신 후에 겁에 질렸고(막4:35-41), 변화산 사건 이후에는 “몹시 무서워했다”(막9:6).

혈루증을 앓다가 치유된 여인은 처음에 “두려워하여 떨며” 나아왔고(막5:33), 부활을 목격한 이들은 “몹시 놀라 떨며…무서워”했다(막16:8).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마주할 때 두려움에 떤다.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주님, 당신의 영광을 보이소서”라고 즐거이 찬양할 때 차라리 ‘우리를 죽여주소서’라고 바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죽도록 두려운 무언가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있는 듯도 하다.

자, 이스라엘 백성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라. 그들은 달아나지 않고, 그 산 주위를 계속 어슬렁거렸다.

이사야 역시 성전에서 도망쳐 나오지 않았다. 예수님이 무시무시한 기적을 행했을 때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몰려들었다. 무덤에서 달려 나온 여인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도망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천사의 말에 순종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소식이었다.

전도란 배고픈 사람이 다른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이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 아름다운 두려움을 어디서 경험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다.

부활이란, 적어도 처음에는, 모든 일이 잘될 거라는 훈훈한 위로의 소식이 아니었다. 부활의 메시지는 “믿지만 말고 두려워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성경에서 얼마나 자주 백성들을 향해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가. 그것도 자신의 능력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을 잔뜩 두려워하게 하신 뒤에 말이다. 이 말은 누가복음에서 후렴구처럼 자주 등장한다.

천사는 두려워 말라는 말과 함께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예고한다. 설교에 자주 인용되면서 가장 널리 알려진 예는 딸의 죽음을 알게 된 회당장에게 예수가 한 권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5:36).

두려워 말라는 반복적 표현은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는 말씀의 트위터 버전이다.

결국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보다 더 크고 강력하고 무서운 것은 없다는 뜻이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해치고 그중에는 힘 있는 것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한 힘을 지닌 유일한 분, 즉 전능하신 분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그러니 긴장을 풀고 두려워 말라. 아니, 최소한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들에 겁먹지 말라. [전문 보기 : 두렵지만 끌린다]

 


마크 갤리 CT 편집인
Mark Galli, "Tidings of Chaos and Joy"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