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효도의 본’을 보여주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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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효도의 본’을 보여주신 걸까?
  • 권해생
  • 승인 202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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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26-27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복음 19:26-27

어느 설교자의 효도 강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자기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아주 특별한 말씀을 하신다(요19:26-27). 자기 어머니에게 사랑하시는 제자를 아들로 소개하고, 사랑하시는 제자에게는 자기 어머니를 그의 어머니로 소개하신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는 어버이 주일에 효도를 강조하면서 이 본문을 근거로 예수님의 효도를 본받으라고 성도들에게 촉구한다. 예수님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 어머니를 걱정하셔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자기 어머니를 봉양할 것을 부탁하셨다는 것이다.

이 본문은 효성이 지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과연 그럴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친히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에 순종하시며, 효도의 본을 보여주신 것일까? 신약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며,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엡6:1-3; 골3:20).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좀 더 심오한 구속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부모 공경을 넘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계시적 진리가 있다.

어느 신학자의 상징 강조

일찍이 신학자 불트만R. K. Bultmann은 예수님의 어머니는 유대 기독교를, 사랑하시는 제자는 이방 기독교를 각각 대표한다고 보았다.

이방 기독교가 유대 기독교로부터 유래되었기 때문에, 이방 기독교는 유대 기독교를 어머니로서 당연히 존중해야 하고, 유대 기독교는 또한 이방 기독교를 집처럼 편안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가톨릭 신학자 브라운R. E. Brown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새 하와라 부르며, 하와를 통해 인류가 시작된 것처럼, 새 하와를 통해 새 인류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예수님의 어머니를 미화시켜, 그녀가 구속사에서 어떤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좀처럼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바른 해석을 위한 열쇠, 하나: “여자여”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호칭하신다(요19:26). 어머니를 향한 이런 호칭은 요한복음에서 여기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셨다(요2:4). 자신의 어머니에게 “여자여”라니.

우리말 예법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 어디 우리의 예법뿐이랴, 서구 사람들에게도 이런 호칭은 낯설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자여”라는 말은 당시 유대 문화에서 볼 때, 일종의 극존칭 표현이라 한다.

예수님은 극존칭을 사용하여 자신의 어머니를 부르시며 존경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요한복음 자체 내에서 부정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그리고 간음한 여인에게도 똑같은 호칭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요4:21; 8:10).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이나 간음한 여인을 비하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극존칭을 써가며 존중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문맥에서 그러한 극존칭을 들은 여인들이 별로 놀라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정도의 존중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존중의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사용하는 것은 굉장히 의외다. 예수님은 왜 이러한 표현을 어머니에게 사용하셨을까?

예수님은 자기 어머니를 객관화하여, 한 명의 제자로 보신 듯하다.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영적인 제자로 보시며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와 영적 관계를 맺어 주신 것이다. 어머니를 이렇게 대우하는 것은 일찍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도 있었다(요2:1-11).

자신의 어머니가 잔치의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자신에게 알리자, 예수님은 “여자여”라는 호칭을 사용하신다(요2:4). 자신의 어머니가 매우 다급한 상황을 알리며, 문제 해결을 위해 자기를 아들 이상으로 대우하시자, 예수님도 어머니를 어머니가 아니라 한 명의 제자로 보신 것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서도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어머니를 객관화하여 십자가를 통한 새로운 관계를 설명하신다. 다시 말하면, 제자와 제자가 맺을 새로운 관계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 새로운 관계는 바로 ‘가족’이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였다.

 

바른 해석을 위한 열쇠, 둘: 요한복음의 ‘가족’ 개념

요한복음은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설명한다. 먼저 서문에 따르면,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요1:12).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태어난다(요1:13).

다른 말로 하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다(요3:3, 5). 하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그의 자녀를 낳으신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가장 분명하고도 빈번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호칭하여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으로 유대인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받으셨다(요5:18).

예수님은 하나님의 가족에서 독생자라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신다(요1:14). 유일하시며 독특하신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와 달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독특하신 하나님의 아들과는 구별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가족에 편입된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관계인가? 부활 이후에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은 형제 관계로 명명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온 마리아에게 형제들에게 가서 자신의 부활 사실을 알리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요20:17)

여기서 “내 형제”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가 아니라 그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에서 예수님은 독생자로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시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형제가 된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건넨 “아버지 집”이라는 표현도 관계적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요14:2-3). 집을 뜻하는 헬라어 ‘오이키아’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건물로서의 집을 나타내기도 하고(요11:31; 12:3), 관계로서의 가족을 나타내기도 한다(요4:53; 8:35).

따라서 본문은 아버지의 집도 될 수 있고, 아버지의 가족도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 안에서 머무는 곳은 단지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은 장소적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서로 형제 자매가 되어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사는 것도 우리가 기대하는 종말론적 모습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새로운 관계로 제자들을 초청하시며, 그의 떠남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위로하신다.

 

바른 해석을 위한 열쇠, 셋: 십자가의 의미

그렇다면 왜 하필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이런 권면을 하신 것일까? 왜 죽는 순간에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연결하시는 것일까? 좀 더 일찍 하실 수는 없었을까? [전문 보기 :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효도의 본’을 보여주신 걸까?]

 


권해생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작은목자들교회 협동목사. 「요한복음 주석」(고신총회출판국, 2016)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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