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계 사이에 놓인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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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 사이에 놓인 다리
  • 알리스터 맥그래스 | Alister McGrath
  • 승인 202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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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어떻게 나의 이성적 신앙에 강렬한 희망을 불어넣었는가

[글로벌 가스펠 프로젝트 Global Gospel Project]

상당히 논리적인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나의 첫 반응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극단적 이성주의자의 반응과 똑같았다.

나는 항상 역사적 사실성을 문제 삼았다. 예수는 실제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는가? 그 증거는 무엇인가?

그 시기에는 신약이 과연 신뢰할 만한 내용인지 확인하는 데 몰두했다. 부활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면 신약은 믿을 수 없는 내용이며 그 반대의 경우라면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회심 후 질문을 퍼붓던 시기를 잘 지나왔지만, 성경의 권위를 입증하는 것 말고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뭔가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부활을 통해 어떻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 깊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독일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예수」Jesus: God and Man와 같은 작품을 읽으며 나의 신학을 정립해 나갔다.

이 책은 공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을 복합적으로 흥미롭게 변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부활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처음에 나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왜 믿는지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부활이 기독교라는 복잡한 그물에 꼭 들어맞는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전체적 틀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이 문제들과 몇 년간 씨름한 후 마침내 나는 기독교 정통주의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전통 기독교 신학을 지키는 데 헌신하게 된 것이다. 전통 신학의 가치를 확신했기에,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나의 초기 저작들에는 「예수 이해하기」Understanding Jesus나 「삼위일체 이해하기」Understanding the Trinity와 같은 제목이 붙어있다.

여전히 나는 기독교가 현실에 관한 ‘큰 그림’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확신한다. 과학, 역사, 문화, 그리고 개인적 삶의 경험을 이해하게 해주는 그림 말이다. 이는 기독교의 가장 큰 강점이며, 내가 회심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기독교에 훨씬 많은 강점이 있음을 깨닫게 됐다. 마치 다이아몬드를 집어 들어 불빛에 비춰본 후에야 다이아몬드의 수많은 면을 발견하고는 각 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제야 부활의 더 깊은 의미를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나는 늘 부활이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우리의 상황을 더 잘 이해하게 하는 것 이상으로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의미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인생의 더 심오한 문제들에 대한 부활의 영향력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심오한 차원 

1980년대 초 영국의 이스트미들랜즈 지역 교구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던 시절, 나는 복음의 더 깊은 차원을 경험했다. 당시 나는 고통을 겪고 있거나 죽어가는 사람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섬기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이 평범한 사람들은 부활 신앙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변하게 했는지, 아픔과 상실로 낙심한 그들에게 어떻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는지 말해주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오히려 그들이 나를 위해 사역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이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짐을 가르쳐주었다. 부활은 그들 인생의 슬픔과 불확실함과 고통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했다.

그 사람들은 판넨베르크의 저서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신약성경에 나타난 중요한 희망의 메시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늘 곁에 계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이 세상의 광야를 걸어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소망의 확고한 근거임을 알고 있었다.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이 결국 그분과 함께 일어나 새 예루살렘에 거할 것이라는 소망 말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고통을 평안하고 위엄 있게 마주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받은 이들이 그분과 함께 영화롭게 될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부활 신앙이 우리의 사고방식뿐 아니라 삶의 방식까지 변화시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객관적으로 이해했던 무미건조한 지식이 이제는 살아있는 현실이 되었다. 나는 이전에 연구했던 것을 삶으로 터득했으며, 머리로 이해했던 것을 가슴으로 껴안았다.

미들랜즈 지역에서 보낸 시간을 통해 나는 복음이 우리 존재의 모든 면, 즉 사고, 감정, 상상력, 가치 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당시를 되돌아보면, 그 시간은 기독교를 바라보는 제한적 틀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주었던 것 같다.

믿음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킨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고 풍성해지고 강건해지기 위해서는 복음이라는 치료제로 모든 상처를 치료해야만 한다.

많은 독자들에게 이는 너무 분명한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믿음의 순례를 시작했던 40년 전에는 복음이 내게 분명하지 않았다.

복음은 내가 발견해야 하고 어렵게 배워나가야 할 영역이었다. 루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복음에 관해 새롭게 발견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를 깨닫고 나서야 내 상상력은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나는 다시 부활로 돌아갔다. 나는 이미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확인했고, 부활이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큰 열쇠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이전에 알지 못했던 깊이로 부활을 경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경험했을까?

지면 관계상 한 가지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예배를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하게 됐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와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더 영광스러운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나누는 것은 언젠가 우리가 새로운 예루살렘에 거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나누는 것이며, 그곳에서의 예배와 경배에 함께 참여할 것임을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 훗날에야 천국의 뜰을 밟겠지만, 지금부터 그때를 기대할 수 있다. 이 땅에서의 예배는 하늘에서의 예배를 맛보는 것이다.  [전문 보기: 두 세계 사이에 놓인 다리]

 


알리스터 맥그래스 런던 킹스칼리지의 신학 교수이자 옥스퍼드기독교변증센터의 학장이다. 2013년 5월 틴데일출판사에서 그가 쓴 C. S. 루이스의 새 전기를 출판할 예정이다.

Alister McGrath, "A Bridge Between Two Worl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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