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부활인가
상태바
왜 부활인가
  • J. R. 다니엘 커크 | J. R. Daniel Kirk
  • 승인 2020.03.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십자가에서 죄가 해결되었다면, 부활은 왜 필요한가

 

일러스트레이션_ 안태이
일러스트레이션_ 안태이

칭의와 빈 무덤

복음의 심장부에 어느 정도 근접하면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과 칭의를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선언이다.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들은 심판 때 혐의 없이 무죄판정을 받게 된다.

우리가 종종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는 이유는 그 부활을 통해 우리가 의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활은 신실한 신자들, 특히 죽을 때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상이다. 

이런 시나리오라면, 하나님의 법정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스스로를 변호하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은 사이비 왕으로 조롱을 받고, 하나님 우편에 앉을 자라고 스스로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진실하고 신실하다고 판단하고, 하나님 우편에 앉히심으로 그의 주장을 인정해주신다. 예수님은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딤전3:16).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다고 확언하는 것은 우리에게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지금 이곳에 선포되었으며, 2) 이 심판은 우리가 누릴 부활을 미리 맛보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죄 사함 받고 그의 부활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적 논리를 전개하자면 끝도 없을 진리를 몇 문장으로 정리해보았다.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현재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 미래의 부활이 지금 살고 있는 세상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현재와 우리 미래 사이에 우리가 삶으로 연기하는 드라마는,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진리와 아름다움으로 풍성하게 채워질 것이다. 


장차 맞이할 세상 

앞서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기 위해서 창세기에 나타난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본 바 있다. 부활과 새 창조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새롭게 빚으시고,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로 채우실 때 비로소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미래가 시작된다. 따라서 부활은 우리에게 다가올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한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새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로마서 8장은 예수님의 부활과 다가올 새 창조의 연관성을 아주 분명히 이야기한다. 바울은 그 본문에서 고통에서 부활생명으로 옮겨가는 드라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창조세계를 묘사했다. 예컨대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망의 고통이 아니라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고통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새로운 탄생과 부활을 기다리면서 신음한다. 

피조물의 신음은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영과 이어졌음을 뜻한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되는 것, 즉 우리의 부활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도 신음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탄식으로 간구한다고 그는 덧붙인다. 성령의 기도는 우리가 부활한 그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 

피조물의 신음은 장차 다가올 부활을 통해 창조세계가 완성된다는 메시지가 섞여 있다. 그러나 만일 이 피조물이 우리처럼 회복을 바라고 신음한다면, 놀랍게도 이 세상의 종말은 소멸이 아니라 구원이다. 

바울의 말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먼저 피조물도 구원을 기다린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이기에, 예수님과 그 형제자매들은 첫 아담의 사명인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복종시키며 풍성하게 하는 책임을 맡은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사람은 물론,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이 다스릴 피조물 둘 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제학에 따라, 우리가 현세에서 하는 일들은 영원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래에 미칠 영향을 인식하며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권면은 피조물의 운명을 껴안고 그것이 현재에 열매를 맺도록 하라는 부르심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적용되는 말은 더 넓은 창조세계에도 적용된다. 미래는 이미 밝아오고 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역사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기에 이 모든 일이 가능해졌다. 옛 왕은 쫓겨나고,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헛된 피조물은 무너졌다. 새 왕이 주인이 되시고, 새로운 자아가 태어났다. 이제 피조물도 희미하게나마 소망 가운데 영원을 보고 있다.



보내심을 받다

예수님의 부활이  부르심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조명하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을 빌려 우리는 우리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마태복음은 복음서의 대표 격이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이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가라!”(마28:18-20) 부활하신 예수님이 무덤에서 마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에게 마지막으로 나타났을 때에도 예수님은 항상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다. 보냄을 받은 자인 교회의 소명과 임무는 곧 부활하신 예수님이 부여하신 것이다. 

앞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을 변화시키고, 그 소명을 확실히 깨닫게 한다. 그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를 보내신 분은 모든 만물 위에 계신 주님이시다. (2) 주의 부활에 연합한 우리는 현재의 삶과 미래가 그분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3) 이 소명에는 모든 창조세계가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단지 죄 사함을 받는 이야기가 아니라 권능과 변화와 소망의 이야기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착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에 등장하는 정신병자는 이 세상을 뒤흔드는 예수의 부활을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예수님이 약속대로 부활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내던지고 그분을 따라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대한 쾌락을 즐겨라.” 

오코너와 신약성경 기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부활이 전부라고 외친다. 부활주일에 이 세상이 정말로 완전히 뒤바뀌었는가? 아니면 그날 하나님은 구원을 호소하는 예수님과 인간과 전체 창조세계를 버려두고 그냥 떠나버리셨는가?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부활의 진실 여부가 결정한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만큼 우리 신앙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 [전문 보기: 왜 부활인가]

 


다니엘 커크 풀러 신학교 부교수이며 「로마서 풀어내기」Unlocking Romans: Resurrection and the Justification of God 저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