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것이 우리의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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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것이 우리의 것이니
  • 사라 힌리키 윌슨 | Sarah Hinlicky Wilson
  • 승인 20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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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의는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취하는 이들의 것이다

[글로벌 가스펠 프로젝트 Global Gospel Project]

선한 행위 이전과 이후

루터는 이행칭의justification by works를 반대하며 개혁의 여정을 시작했다. 이행칭의란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서툰 방식이든 치밀한 방식이든) 궁극적으로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워지려는 개인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루터의 이 훌륭한 통찰은 루터를 따르던 일부 추종자들에 의해 반율법주의로 변질됐다.

그들은 선한 행위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필수적인 것이 아니며 심지어 자기 자신을 믿도록 유혹하는 위험한 행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전통적 진영에 대해 느끼는 바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왜곡된 견해를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 두 가지는 같은 오류, 즉 그리스도가 없는 그리스도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믿음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존재를 강하게 깨달은 루터는 베르나르와 성경의 결혼 비유를 좋아했다. 그는 사역 초기(1519년경)에 “두 종류의 의”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신랑이 신부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신부가 신랑의 모든 것을 소유하듯이 (두 사람이 한 육체를 이루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게 된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의 영이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기 때문에, 죽음과 멸망을 낳는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것이 된다(고전1:30). 루터의 말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밖으로부터 온 의”alien righteousness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 “본연의 의”proper righteousness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루터에게 구원의 조건으로 행위를 요구하는 하나님은 리무진에 탄 신랑처럼 나쁘다. 우리의 행위가 구원에 충분한지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가? 멸망에서 구원으로 가는 경계선을 넘으려면 얼마나 많은 의가 필요한가?

우리가 실패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매의 눈으로 항상 우리를 감시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는가? 우리를 도우시겠다는 약속은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바울 서신을 반복적으로 읽던 루터는 마침내 깨달았다.

의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점점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루터는 (의를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선물로 받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혼의 유익을 누리면서도 사랑이나 헌신을 약속하지 않는 무감각하고 냉담한 신부는 루터의 개념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 의로워지려 하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소유하기 때문에 오직 다른 사람의 복만을 구하게 된다.”

다시 말해, 행위가 구원의 문제와 분리될 때, 그리고 의가 우리가 치르는 값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일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선한 행위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에게 선한 행위는 중요하지만 하나님께는 중요하지 않다. 선한 행위가 하나님이 정한 정의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는 하나님이 의라는 선물을 주시기 이전에 창조의 선물이었던 사람들과 세상에게 중요하다.
 


은혜인가, 믿음인가

의로워지는 것,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들어갈 자리는 어디인가? 루터는 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주장하는가?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개념은 왜 충분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행위에 강조점을 두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결국 믿음을 갖는 것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암시하는 것 같다.

또한 믿음이야말로 가장 선한 행위라는 논리 아래 행위로 인한 구원이 슬쩍 끼어든다.

이 주제는 개신교에서 인기 있는 논쟁거리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를 훑어보면 토마스 아퀴나스와 중세 스콜라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칭의가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주장에 진지한 반론을 폈던 사람은 없다.

은혜가 매우 중요한 개념인건 분명하지만, 문제는 은혜라는 개념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가? 루터는 앞선 몇몇 신학자들, 특히 독일 학자 가브리엘 비엘이 정의한 은혜의 개념에 기초해 은혜를 이렇게 정리했다.

은혜란, 의를 추구할 수 있지만 너무 게으르고 의지가 박약해 어떤 자극 없이는 의를 이룰 수 없는 인간 본성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비엘은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이 인간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은혜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선행을 실천할 기회가 주어졌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은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책임을 요한다. 그래서 루터에게 그것은 복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정을 세우며 조건을 붙이는 결혼 서약과 다름없었다. 자신의 배우자가 마지막에 어떤 모습이 될지 관찰하며 기다리는 그런 서약은 배우자의 삶을 서서히 망가뜨릴 것이다.

루터는 우리가 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지 설명하며 은혜를 더 명확히 정의한다. 우리의 믿음은 은혜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간절히 찾으시는 성령님에게서 시작한다.

성령님은 모든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그분의 부활을 우리의 삶과 환경에 가져오신다. 성령님은 세례와 설교를 통해 당신과 나,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롬5:8).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 약속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주시는 약속이다. 하지만 그 실제적인 증거를 지금은 볼 수 없다. 하나님은 아주 드문 경우에만 경험적인 증거를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기드온과 양털 사건(삿6:36-40)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사람들은 그런 증거들을 보고도 확신을 갖지 못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부활한 예수를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이 등장한다.

약속을 받는 유일한 길은 그 약속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믿는 것을 의로 여기신다(롬4:5).

하지만 여전히 문제점이 남아 있다. 내가 정말 약속을 믿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는 진짜 믿음, 충분한 믿음, 의롭게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 답이 내 안에 있다면, 행위에 의지할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실패할 것이다. 감사하게도 그 답은 하나님께 있다. 바울이 말했듯이 내 안에서 나를 위해 믿으시는 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아버지는 나를 의롭다 여기신다. 이는 그럴 듯한 가설이 아니다. 이것은 진리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스도가 소유한 의로움을 나에게 주셨으며 성령을 통해 내가 그것을 받았기 때문이다. 칭의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를 믿음”the faith in Christ과 “그리스도의 믿음”the faith of Christ은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그 둘의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루터가 바울의 로마서 3:28 및 몇몇 다른 구절들에 동의하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주장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줄 정도로 강력했다.

루터를 반대하던 이탈리아 추기경 카예탄은 루터의 이러한 견해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카예탄은 루터의 이 주장이 그저 하나님에 대한 추정에 불과하다며, 이 주장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과 다름없다고 일갈했다.

예언적인 시각에서 볼 때 불행히도 카예탄의 가정은 옳았다. 하지만 그 후 수 세기 동안 믿음에 대한 루터의 견해는 같은 개신교인들에 의해 수없이 왜곡됐다. 믿음은 무모한 것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실제적인 복음과도 분리됐다. 게다가 믿음은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나쁜 신학으로 변질됐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 지식, 즉 무조건 동의만 하면 된다는 식의 믿음으로 격하되기도 했다. 또한 믿음은 심리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 내 믿음이 강한지, 내 믿음은 구원받기에 충분한지 고민하다 마침내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믿음은 우리의 의심을 다 끌어안기에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우리 생각뿐 아니라 마음까지 변화시키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자기만족을 끊어버린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살아계신 주님의 살아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전문 보기: 그의 것이 우리의 것이니]

 


사라 힌리키 윌슨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한 인스티튜트 포 에큐메니칼 리서치Institute for Ecumenical Research의 연구조교수이며 계간지 <루터주의자 포럼>Lutheran Forum의 편집장이다.

Sarah Hinlicky Wilson, "What's His Is 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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