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창조의 샘,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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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창조의 샘, 고독
  • 성유원
  • 승인 2020.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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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원의 사유의 정원_열한 번째 산책

 

창조의 샘, 고독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자기의 시대를 산다. 
그러나 고독한 사람은 모든 시대를 산다. 
개성적인 사람일수록   뛰어난 사람일수록   독자적인 세계를 가진 사람일수록 
고독하기 마련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글 성유원
그림 고여정 

 

인간, 하나의 섬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이고, 남의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저마다의 괴로움은 황량하고 쓸쓸한 섬과도 같다.”

알베르 코엔의 장편소설 〈내 어머니의 책〉의 첫 문장이다. 오래전 나는 이 한 문장에 끌려 책을 샀다.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사모곡이자 조사弔辭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화자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인간은 모두가 외로운 섬”이라고 말한 대목이다. 코엔은 이어서, “그 섬의 기슭은 각자가 처한 상황과 타인의 적의敵意에 의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이기심에 의해 나날이 마멸되어 간다”고 했다. 

그리스령 코르프 섬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프랑스로 이민을 와서 마르세유에 정착한 알베르 코엔. 스위스 주네브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문학에 빠지면서부터 글을 쓰며 국제기구에서 활동하던 그는 영국에서 일하던 당시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는다. 타지에서, 세상에 제대로 발 디디지도 못한 채 평생 남편과 외아들인 자신만 바라보며 살았던 어머니였다. 크나큰 슬픔과 후회 속에서 어머니에게 무심했다는 자책을 안고 코엔은 가슴 아픈 사모곡을 자서전 형태의 소설로 발표한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내 어머니의 책〉은 각종 언론이나 문예지를 통해 찬사를 받는다. 어머니에 대한 가슴 아픈 고백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깊이 있게 움직이는 영원하고 아름다운 책이라고.

세간의 평대로, 화자의 절절한 심정이 담긴 어머니에 대한 회상은 깊은 감동과 공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내게 짙게 남아 있는 것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진 ‘고독’에 관한 인상이다. 얼핏 보기엔 책의 제목이나 표면적인 줄거리와는 동떨어진 듯하지만, 본질의 차원으로 들어가면 결코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은 첫 문장, 오히려 더 근원적인 문제를 건드렸기에 울림이 컸던 서두는 코엔과 그의 어머니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인간이 가진 실존적인 문제나 그에 따르는 고통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코엔 또한 어머니의 외로움이나 죽음을 덜어줄 수도, 막아줄 수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어머니의 책〉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고통조차도 함께 나눌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비탄의 노래이기도 하다. 책의 첫머리에 내놓은 구절처럼 인간은 누구나 고독한 존재요, 저마다 외로운 섬이기에. 

‘인간’을 ‘섬’으로 비유한 코엔의 문장에는 ‘고독’에 관한 두 가지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하나는, 관계의 친밀도와 상관없이 인간은 근본적인 문제 앞에선 누구나 고독하다는 것이다. 아무도 나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대신해줄 수 없다. 육체적 아픔이든, 정신적 괴로움이든 미래를 결정해줄 중요한 시험이든, 책무든…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극복해나갈 수 있는 능력과 내면의 힘을 기르는 일이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면 인간이 가진 모든 힘—돈, 권력, 지위, 재능, 체력, 정신력 등—은 무력해진다. 그 순간에는 누구나 고독하다. 죽음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만든다. 절대적인 죽음 앞에서 누구는 더 외롭고 누구는 덜 외롭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 고독에 관한 진실 중의 하나다. 

두 번째는, 고독이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 양면은 인간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고독을 기피하고 타인과의 소모적 관계나 이기심 등으로 나날이 닳아 없어지게 하면 고독의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독은 쓸모없어진다. 때론 잘못 써서 더 황폐질 수도 있다. 반면 고독을, 자기 정체성을 견고히 하고 내면적 자질을 키우며 지속적으로 성장해가기 위한 창조적 삶의 원천으로 삼는다면 인생은 질적으로 충만해진다. 고독이 인생을 더욱 값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고독에 관한 또 하나의 진실이다. 

〈내 어머니의 책〉의 첫 문장처럼 겉으로는 부정적으로만 보이는 고독이, 안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새로운 차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다. 외부적 요소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의해 마멸되지만 않는다면, 고독은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비원秘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찍이 이러한 고독의 가치를 알았던 사람들은 필요할 때 울타리를 치고 그곳에 머물면서 자기만의 섬을 창조와 풍요의 공간으로 가꾸었다. 그들이 대중을 떠나 홀로 충만해지는 섬을 필요로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현종 시인의 ‘섬’이라는 시에 담긴 마음처럼. [전문 보기: 창조의 샘, 고독]

 


성유원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2017년까지 예원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어린 예술가들과 풍요로운 나눔의 날들을 보냈다. 퇴직한 후에는 대학생과 대학원생과 직장인으로 구성된 인문학 독서모임을 이끌며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사유의 정원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고여정 글쓴이 성유원의 예원학교 제자이자 함께 독서하며 생각을 나누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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