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하루씩만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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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하루씩만 살아요!
  • 이진경
  • 승인 2020.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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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생 투병일기

4월 9일 목요일 “역경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은 없다”

열한 번의 방사선치료를 끝냈다. 이제 열일곱 번 남았다. 지금까지 만 9개월에 가까운 치료를 받으면서 내가 뛰어넘어야 하는 몇 번의 고비가 있었는데 이번 방사선치료의 고비는 피로감과 무기력이다. 몸과 마음에 에너지가 돌지 않아, 저 밑바닥에서부터 펌프질을 해야 할 정도이다.

하루 중 그렇게 좋아하고 간절했던 기도 시간도 가끔 빠뜨리는 날이 생겼다. 무엇보다, 내 인생에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심지어 항암치료 때도 경험한 적이 없는) ‘입맛 없음’을 실감하면서 입맛이 있었던 게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입맛 없는 사람은 살이 찌지 않으니 관리할 필요가 없어서 좋겠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철없는 생각이었던지.

입맛이 없어지니 삶의 의욕이 떨어진다. 밥은 모래알을 씹는 것 같고, 어떻게든 맛있는 음식을 생각해내던 뇌는 정지한 것 같다. 맛있는 것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사라졌다. 

사실 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 아무 느낌도 없다. 방사선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잠시 누워 있다가 오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방사선을 쬐는 부위가 불긋불긋해지고 따가워지며, 점점 피로감과 무기력이 심해지고 식욕이 떨어지며 우울감이 찾아온다. 매일매일 1〜2분의 방사선인데도 이토록 몸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생각해보니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자체가 방사선을 쬐는 것 같을 때가 참 많은 것 같다. 각 사람들의 이기심과 탐욕, 자기 영광에 대한 욕망 등이 서로 얽히고설켜 하나의 거대한 방사선 세계를 만들어간다.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분명 존재하는 통념적이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늘 노출되어 있다 보면 자연히 피로감과 무기력, 우울감이 찾아든다. 

이럴 때 잠시라도 하나님의 빛을 쬐는 건 강력한 힘을 지닌다. 처음엔 잘 모르지만, 매일매일 잠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꾸준히 가지면 내 안에 어떤 힘이 생겨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요즘 나는 매일 아침 시편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 내게 다가온 한 구절을 붙들고 하루 내내 순간순간 떠올리고 되뇐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니, 내게 두려움이 없습니다.”(시편 56:11) “내 마음이 약해질 때, 땅 끝에서 주님을 부릅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시편 61:2)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시니, 백성아, 언제든지 그만을 의지하고, 그에게 너희의 속마음을 털어놓아라.”(시편 62:8) 방사선치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 뒷산에 오를 때에도 그 하루의 말씀을 기억한다.

오르막길, 내리막길을 오르내리며 그 말씀을 속으로 되뇔 때 잔잔하고도 단단한 힘이 내 안에서 샘솟는 것을 경험한다. ‘말씀이 살아 숨 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나는 걸으며 암송하고 기도할 때 그것을 느낀다. 

세상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기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지 않으면 내 영은 금세 세상의 영으로 잠식된다. 이것은 암을 맞이한 후, 지난날을 돌이켜보았을 때 깨닫게 된 것이다.

암이라는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명확히 깨닫고 그것을 추구하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특별한 고난이 없었던 때에는 많은 것이 안개처럼 희미하게 보였고, 그래서 쉽게 유혹에 빠지며 그것이 좋은 것인 줄 착각하기도 했다.

내 욕망, 내 바람이 충족되었을 때 잠깐씩 아드레날린이 나오는 것을 행복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암 투병을 하며 주님과 긴밀히 동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경험하게 되면서 그때와는 전혀 다른 질감의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세월을 견디어낸 책들이나 명설교자들의 설교에서 나온 메시지가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이해되는 행복이 있다. 그 전까지 마음속 깊이까지 들어오지 않았던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부셔하고 황홀해하게 되는 행복이 있다. 내 곁에 있는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닫고, 날마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사랑해요” 말할 수 있는 행복이 있다.

베란다에 심은 상추 모종에 물을 주며 생생하게 자라나는 생명에 기쁨을 느끼는 행복이 있다. 수술 후 그토록 아팠던 팔의 통증이 점차 사라지고, 발바닥 통증과 다리의 근육통이 나아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경험하는 행복이 있다.

“역경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은 없다.” 영성 작가 조앤 치티스터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삶은 각각 분리된 순간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모든 순간이 연결되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한 편의 드라마이기 때문에, 각각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경험과 순간을 깊이 파헤쳐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라고 권한다. 예기치 못한 때에 맞이한 암 덕분에 나는 깊은 육체의 고통도 맛보았고, 과연 회복될 수 있을까 하는 불신의 순간도 맞이했고, 차츰 진행되는 회복도 경험했다. 고통의 골짜기를 건너면서 삶의 눈부심도 경험했다. 골짜기가 깊을수록 그곳을 헤어 나왔을 때의 빛은 딱 그만큼 밝았다.

예전이라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던 것들이 깊이 와 닿고, 다수의 행렬에 동참하지 않아도 나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는 기쁨을 알아가고 있다. 단 하루, 단 한 순간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정성껏 보내는 법도 익혀가고 있다. 

이렇게 내 것이 된 하루가 모여 가니, 이전보다 몸의 한계는 여실하지만 삶의 기쁨은 확실히 크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순간들이 한 컷 한 컷으로 연결되어 내 인생이라는 잘 짜인 드라마로 완성될 것이라 믿으면 희망을 품게 된다.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3-4) 아멘. [전문 보기: 꼭 하루씩만 살아요!]

 


이진경 CTK 창간에 힘을 보탰고, 에디터로 일했다. ‘싱글 이야기’를 연재했으며, 지금은 암 투병 중에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희망의 속도 15km/h」, 「좋은 죽음 나쁜 죽음」, 「감각의 제국-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감각의 모든 과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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