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남겨진 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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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남겨진 그 날
  •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 Barbara Brown Taylor
  • 승인 20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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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 (사도행전 1장 9절)

주일 아침이면 교회를 가는 사람들과 집에 남아 있는 이들 사이에 확연한 구분이 일어난다. 집에 머무는 이들은 그저 한 주만 빠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그들의 삶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에게 예배의 처소는 작은 골동품에 지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오류를 언제쯤에야 인정할지 모른 채 집에는 돌아가지 않고 법석을 떠는 낙천가들의 전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21세기를 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기괴한 짓이란 매 주일마다 쓸모나 생산성 없이 모여 장식된 벽을 멀뚱거리며 보이지도 않는 신에 관해 증명할 수 없는 것만 늘어놓는 것이리라.

우리는 이것을 예배라 부른다. 이 시대에 이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예배를 수차례 계속 반복하는 우리들은 예배에 의지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우리가 맞는 곳을 배우는 방식이다.

이것이 우리 자신을 과거와 미래 사이에, 소망과 두려움 사이에, 지상과 하늘 사이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방식이다. 이것이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배우는 방식이다.

함께 모여 노래하고 기도하고 침묵하고 잠잠히 있고 함께 어둠을 응시하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본 것을 서로 나누는 것이 그 방식이다.

우리는 믿지 않는 친구들과 이웃을 바라보며 당황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복음’을 전하면서도 이것이 복된 소식이 아닐 때, 빛을 믿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두울 때, 구세주를 계속 기다리지만 모든 증거가 그분은 짐을 싸 오래 전에 달아나 버리셨다고 외칠 때 우리는 당혹한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첫 승천의 날 이후부터 구속자를 기다려 왔다. 예루살렘 성 밖 감람산에서 구름 속으로 영영 사라지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 사도행전 1장 6절-11절은 예수님께서 한 순간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가 불현듯 사라지셨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축복하시기 위해 두 손을 드셨다. 그분의 얼굴은 밝게 빛나며 희미해지고 형체는 마치 사실이기에는 너무나 행복한 꿈처럼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예수님의 형체는 그렇게 그들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다.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을 위해 지상에 계시지 않았다. 더 이상 현재가 아닌 과거에 계셨다. 그날의 기억은 제자들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잊히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하늘나라란 물리적 위치로서의 위쪽이라기보다는, 그 너머라 할 수 있겠다.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하시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시작하신 일을 마무리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이는 그저 우리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 정도였다.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이 세상의 육체가 하나님께로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 우편에 앉기 위해 자신의 부서지고 부활한 몸을 보이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그 거룩한 곳에 육체와 피를 가져가셨다. 우리를 위해 길을 준비하셨던 셈이다. 우리가 이후에 도착했을 때 천국에 있던 자들이 우리를 보고 놀라지 않도록 말이다.

예수님은 피조물들, 특히 우리의 선함을 회복하셨다. 육체 그대로 승천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체와 피가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것임을 보여 주셨다. 육체와 피는 예수님께도 충분히 선하고 하나님께도 선함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피와 육체를 입으시고 또한 그 모습으로 천국에 가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셨다. 

나는 지난주에 이 모든 사실을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굉장하지 않아? 승천이 정말 피부로 느껴지지 않니?”

친구는 답했다. “흥미롭네. 하지만 감탄할 정도는 아니야.”

그의 말은 이것이 아직도 추상적 생각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의 매일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설명 말이다. 예수님께 일어났던 거의 모든 일들이 나의 삶에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예수님은 사람인 어머니를 통해 태어났고 나도 그렇다. 그분은 먹고 마시고 잠을 청하셨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람들을 사랑했고 분노했고 용서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는 흐느끼며 울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는 죽었다. 나도 죽을 것이다. 그는 죽음에서 일어났다. 죽음 가운데 일어나는 것에 관해 나도 조금 안다고 생각한다. 내 삶에서도 부활의 아침처럼 고통 가운데 기쁨을 찾고 죽음 가운데 생명을 찾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는다? 이 부분에서 나는 예수님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부분이 예수님이 나를 뒤에 남기고 떠나시는 부분이다.

승천에 관한 나의 유일한 경험은 지상에 한정되어 있다. 목을 뒤로 힘껏 젖히고 입을 딱 벌리고 내 주를 보니 그를 감싸 하늘로 올리는 구름 뒤로 태양이 보인다.

누가는 복음서를 마무리하며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기쁨 속에 돌아갔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 승천이 방금 전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란 사실이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이 모든 것이 기억에 아직도 생생했다.

그들은 흥분으로 분비된 아드레날린에 휩싸여 있었다. 그림에서도 쉽게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거의 모든 교회가 승천을 그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하나쯤은 꼭 갖고 있다. 그 창문 속에서 우리는 공중에서 축복하시며 손을 들고 계신 예수님과, 얼굴에 기쁨과 놀라움이 역력한 제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다. 심지어 창문에서도 그들과 함께 계시다. 그렇다면 그들이 기쁘게 돌아갈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 예수님이 하루나 이틀 뒤에, 늦어도 일주일쯤 뒤에 돌아오시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조금 다르게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상황을 묘사할 새로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필요하다. 천사도, 예수님도, 천국의 광명도 없이 우리만, 오직 우리만 마냥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의 스테인드글라스 말이다.

우리의 얼굴은 마치 그분의 임재로써만 채울 수 있는 빈 잔처럼 하늘을 향하고 있는 모습일 듯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예전처럼 물리적 상태로 존재하지 않으신다.

승천의 날은 우리 주님께서 사라지신 날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력 중 가장 잊어버리기 쉬운 날일지 모르겠다. 어느 누가 뒤에 남겨진 날을 기념하고 싶을까?

누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다시는 나타나시지 않기 위해 떠나가신 날을 기념할까?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안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니면 이것이 우리가 남겨진 진짜 이유일까? 다른 이유 뒤에 숨겨진 진정한 이유일까?

우리는 공허한 밤이나 우리의 심장이 두근두근 뛸 때나 우리의 응답되지 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부재를 느낀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낙심케 하여 이곳에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들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찾을 수 있는 이곳으로 오게 한 것이 아닐까?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그리워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재를 느끼는 것,
특히 하나님의 부재를 민감히 느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한 번 알았고
또 다시 알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최고의 증거이다.

가끔 부재를 느끼는 것이 과소평가된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취된 의식이고 날이 선 듯 한 미각이며 잘 조준된 시각이다. 나에게 중요한 누군가가 떠나면 그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주었는지 깨닫는다.

함께할 때는 지나치기 쉬웠던 세세한 사실을 떨어져 있으면서 깨닫게 된다. 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명료한 느낌은 내 마음을 활짝 열어놓는 힘이 있다. 지나쳤던 가치, 놓친 기회를 보게 되는 것이다. 가까이에서는 나를 너무나 짜증나게 했던 사소한 일들이 멀리서는 따스하게 느껴지게 된다. 이렇게 확장된 시각을 통해 나의 누구가 단순히 아무개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부재중에 일어나는 또 하나의 일이 있다. 만약 관계가 진실되고 탄탄하다면 자리를 떠난 이가 다시 곁에 존재하는 길이 있다. 육체가 아닌 생각과 영혼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 남편은 우리 동네인 조지아 주로 돌아오는 매와 검독수리를 무척 좋아한다. 그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와중에도 운전대 너머로 목을 내밀고 공중의 유별나게 큰 새를 살펴볼 때마다 나는 안절부절 하게 된다.

“독수리일까? 아니면 대머리독수리일까?” 그는 꼭 알아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도로를 갈지자로 운전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가끔은 길에서 벗어난 적도 있었다.

“운전에 집중해요!” 그럴 때마다 난 소리친다. “저 새가 무엇인지 뭐가 그리 중요해요? 조류 사전이라도 사줄게요. 아니, 새를 사줄게요. 지금 가는 길에 집중하라고요.” 2년 전 우리 부부는 두 달간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드디어 독수리에게서 해방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어디를 가든지 독수리만 보게 됐다. 원호를 그리며 공중을 날고, 하늘을 빙그르르 돌며 비상하며, 나뭇가지에 날개를 접고 앉아있는 그들을 보게 되었다.

난생 처음 독수리들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내 남편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없었다. 그래서 난 그를 위해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부재중이었다. 진실로 부재중이었을까? 그는 내 안에 있었다.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 만약 임재를 느끼지 못하면 부재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부재가 상처가 되고 통증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예전에는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부재는 한밤중 팔을 벌려 사랑하는 이의 빈자리를 느끼며 침대의 한편을 뒤척이는 것이다. 부재는 고요함과 먼지만이 가득한 아이의 방이다. 부재는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행복으로 사람들의 웃음으로 가득 찼던 옛 집터에 무릎 넘어 자란 풀이 가득 찬 것이다.

전혀 알지 못한 것을 그리워할 수 없다. 그래서 부재를 느끼는 것이, 특히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민감함이 우리가 하나님을 한 번 알았고 또다시 알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최고의 증거인 것이다. 부재를 통해 잃는 것이 있지만 소망 또한 있다.

한 번 있었던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빈 잔 만이 다시 채워질 수 있는 법이다. 숨겨 놓았던 빈 잔을 꺼내 놓을 때, 내면의 빈 구석과 부재, 갈망을 시인할 때 이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부재라 느끼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를 찾아 교회로 향하게끔 한다. 남겨진 제자들처럼 우리는 그 언덕 위로 다시, 또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그 곳이 바로 우리가 그를 잃어버린 곳이다. 우리가 그를 마지막으로 보고, 그가 다시 돌아오리라 모두들 생각하는 곳이다.

우리는 이 자리로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반복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재중이심에도 이곳은 그를 기념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기억하며 세세한 부분까지 함께 나누고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그러한 이야기들이 되살아 움직이길 기다린다.

마치 저렸던 팔다리에 피가 다시 도는 것처럼 처음에는 아프지만 곧 괜찮아진다. 고통이 기억의 기쁨을 일으키는 작은 대가였다 생각하게 된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예루살렘 성 밖 감람산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누가는 그들이 흰 옷을 입었다고 이야기하지만 난 이들이 천사였다고 확신한다.

하나님의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올려다봐도 소용없다고 알려주러 내려온 천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위를 올려 보는 대신 주위를 바라보며, 서로를 바라보며, 세상을 바라보며, 그리고 보통 삶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더 유익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을 찾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았던 그분은 아니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육체가 아닌 그들의 육체의 모습으로 그곳에 계셨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은 이 세상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오히려 세상 그 모든 곳에 계셨다.

그날 제자들이 하늘을 향해 들었던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한 순간, 얼마나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조차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결코 위대한 순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열성을 증명할게 아무것도 없는 버려진 제자들 11명이었다.

그러나 수일이, 수년이 흘러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뚜렷이 드러났다. 오직 약속과 기도로 이 11명은 교회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로 시작하여 어느 것도 예전과 같지 않게 변화되었다.

인도를 받았던 자들은 앞서 이끄는 이들이 되었고, 듣고만 있던 자들은 선포자가 되었으며, 회심했던 이들은 선교의 사명을 품은 자들이 되었고, 치유받았던 이들은 치유자가 되었다. 제자들은 사도가 되었고,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되었다. 그 어떤 것도 예전 같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 그들이 계획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들의 방식대로 하길 원했다면 예수님을 묶어두고 지상을 떠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디에서 찾아뵈어야 하는지 알고 그렇게 영원히 의존하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떠나셨다. 예수님은 불려 가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때 그들은 하늘보기를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며 교회가 되기 위해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렇게 함께 일하기 시작하자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말하기 시작했고 예수님만 할 수 있었던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담대해졌고 능력을 갖게 됐고 지혜로워졌다.

언제든지 두세 사람이 모일 때에는 보이지 않는 그 어느 누가 함께 하는 듯했다. 떡과 포도주를 통해 강력하고 지속적인 부재자의 임재를 서로의 익숙한 얼굴처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폭발하신 듯했다. 그래서 예수님께만 축적되어 있던 거룩함이 모든 곳 구석구석 멀리까지 흩어진 듯했다. 천국의 씨앗이 이 세상의 밭에 뿌려진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향한다. 주님의 부재를 인정하며 주님의 임재를 갈망하기 위해 노래하며 기도하고 고요하게 잠잠히 빈 잔을 손에 들고 나아가 떡과 포도주로 지속되는 부재중이신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그의 임재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가끔 주님이 그리워지는가? 남겨지지 않았다는 확신을 갈망하는가? 그렇다면 왜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는가? 주변을 보라. 주변을 살펴보라. 주성현 옮김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rbara Brown Taylor)는 God in Pain(Abingdon)의 저자이며, 이 글을 쓴 1998년 당시 조지아 주 데모레스트 소재 피드몬대학 교수였다. CT 1998:5; CTK 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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