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적인 관심 vs 진정한 함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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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인 관심 vs 진정한 함께함
  • 고든 맥도날드 | Gordon MacDonald
  • 승인 20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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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시나요? 정말 계세요? 예수님, 여기 계세요?

‘함께함’의 의미

자식을 가슴에 꼭 품고 있는 어머니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아기는 안전과 평화와 돌봄과 사랑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함께함이다.

엄마가 아기로 하여금 이러한 느낌을 갖게 한 것이다. 또 자기 양을 볼보고 있는 목자를 떠올려 보라. 목자가 양 무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양들은 마음이 든든하다.

위험한 곳에서는 보호받을 것이며 병이 걸리거나 다쳤을 때에는 치료받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바로 목자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주치의와 함께 있는 환자를 생각해 보라. 의사가 진료를 하면 환자의 걱정과 고통이 줄어든다. 또 병이 치료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내일이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소망을 갖는다.

이것 역시 의사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환자로 하여금 이러한 느낌을 갖게 하는 존재는 의사이다.

나는 아주 극적인 함께함을 경험한 적이 있다. 9ㆍ11 테러사건 직후 첫 주를 아내 게일과 나는 그라운드 제로[2001년 9월 11일 테러로 초토화된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자리]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어느 고결한 프란체스코 수사와 돈독한 우정을 맺게 되었다.

나는 그와 함께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경찰관들이 미친 듯이 사체 수색 활동을 펼치고 있는 쌍둥이 빌딩의 잔해사이를 함께 걷곤 했다. 그 친구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특유의 갈색 사제복을 입고, 허리엔 흰 끈을 묶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입고 있었을까? 나는 청바지에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스웨트셔츠를 입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달려온 사람들이 내 친구 수사에게만 무릎을 꿇고 “신부님, 저를 축복해주시겠어요? 제 고해를 들어주시겠습니까?”라고 부탁했던 것도 아마 내 복장 탓이리라.

우리 옆의 건물들이 언제 붕괴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를 찾았다. (누구나 그러하듯) 죽음을 가까이에서 대하면 두려워진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수색과 구조작업이 너무도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수사는 기도로 그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내 친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간략하고 경건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들의 이마에 성호를 그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예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평강이 함께하기를.”

이것이 바로 함께함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수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한 사람들은 자기 하던 일로 돌아갔다. 정말 수십 번이 넘게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내 새 친구가 된 수사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축복기도를 마지막으로 받은 것이 언제입니까?”

“언제 받았는지 까마득합니다.”

“제가 지금 기도해 드릴까요?”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러운드 제로 존의 먼지더미 위에 무릎을 꿇었고 나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의 이마에 성호를 그으면서 기도했다. 그리고 내가 들었던 그의 기도를 그대로 따라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예수님이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나는 그 친구를 일으켜 세우고는 끌어안았다. 가톨릭 수사와 개신교 목사 두 사람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 함께 계심이 느껴졌던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따질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같은 축복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이 이러한 함께함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내 경험과 캐서린과의 관계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녀는 나를 단지 프로그램이나 운영하고 사람들을 관리하는 교회의 지도자로서만 보지 않았을까? 아니면, 군중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개개인과의 만남은 피하는 설교가로 보았을까?

예배가 시작되기 전까지 “대기실”에 혼자 머물면서 보호받고 있다가 예배가 끝나자마자 모습을 감추는 존재로 여겼을까?

예수님은 ‘함께함’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세리장 삭개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이 말씀에는 무리들에게서 벗어나 나와 함께하면서 너의 삶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뜻이 담겨 있다.

동네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수가성의 여인을 “우연히” 만나셨다. 남녀에 관한, 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관계에 대한 문화적 규범을 무시하고, 예수님은 슬기롭게 우물과 마실 물에 대한 대화를 그녀의 영혼에 대한 대화로 옮기셨다.

질문과 날카로운 지적을 곁들이면서 예수님은 성직자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결국 그녀는 물론 마을 사람들이 영적 탄생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병든 이들과 장애인, 또 귀신 들린 이들과 함께하셨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와도 함께하셨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니! 단 한 사람, 그것도 강도가 이 세상의 구세주가 함께할 수 있을까? 그것도 낙원에서? 이것이 사실일까?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 사역의 핵심은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는 인격적 만남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 역시 함께함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이 에베소에 2년간 머물렀을 때의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이다(사도행전 20장).

바울이 장로들에게 했던 말을 요약해 본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제가 낙심할 때, 멸시당할 때, 위험에 처했을 때에도 제 마음은 여러분을 향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집에 머물렀고, 여러분과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도자가 되도록 훈련시켰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이러하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제가 여러분과 함께했던 것처럼 사람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전문 보기: 형식적인 관심 vs 진정한 함께함]

 


고든 맥도날드 〈리더십 저널〉의 편집장이며 덴버신학교 명예총장이다.

Gordon MacDonald, “Token Appearance VS. Real Pres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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