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식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함께 애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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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함께 애통해야 합니다”
  • 톰 라이트 | 앤디 배니스터 인터뷰
  • 승인 20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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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는 명쾌한 (신학적) 답을 제시하는 것이 교회의 급선무가 아니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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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뉴스 보도, 공중 보건 전문가 인터뷰, 다양한 전염병 퇴치 전략을 논하는 전문가들의 찬반양론 등,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수많은 정보와 주장의 홍수 속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답을 듣고 싶은 질문은 많지만 확답을 여전히 얻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과 팬데믹: 코로나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의 저자이자 신학자인 톰 라이트는 이 책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불확실성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지 논한다.

스코틀랜드의 솔라스 공공 기독교 센터Solas Centre for Public Christianity의 앤디 배니스터 소장이 톰 라이트와 이야기를 나눴다.

 

존 레녹스[Where is God in a Coronavirus World?]에서 존 파이퍼[Coronavirus and Christ]에 이르기까지,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미 이 팬데믹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지난 3월에 〈타임〉 매거진에서 전염병에 관한 글을 써 달라는 제안이 왔습니다. 그 글에 다소 도발적인 제목이 달렸습니다.

“기독교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도 안 된다.”

나는 그 기고문에서 이 팬데믹 상황이 우리를 로마서 8장의 자세로 이끈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 본문에서 성령 하나님은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로마서 8:26).

지금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그런 비상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이 팬데믹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우리가 모든 답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기사가 나가고 난 다음에 다양한 반응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질문하는 이메일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이 기사에 관해서 트위터로도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트위터를 하지 않습니다.)

이 팬데믹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성경을 그다지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하여 성경이, 그 전체적인 이야기와 흐름 속에서, 실제로 무어라 하는지 탐구해 보자는 시도입니다. 

 

코로나19가 강타하면서 우리 모두 충격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서구 교회가 너무 오랫동안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둠과 고난과 위기를 다루는 법을 잊을 정도로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몇 주 전에 바로 그런 이야기를 교회 원로 한 분과 나눴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톰, 우리는 애통할 줄 모른다네.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우리가 제대로 기뻐할 줄 아는 것도 아니지. 우리는 정말이지 자기도취에 빠져서 안일하게 살아온 것 같아.” 그분 말씀이 맞습니다.

“이대로 세상에 종말이 오는 건 아닐까?” 이런 말을 계속 듣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일을 우리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겪었다고 되새겨 주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1917-1918년에 스페인독감이 대유행했습니다. 그때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교회가 1년 동안 문을 닫았습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고 잊습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성장한 베이비붐 세대는 전쟁을 직접 치르지도 않았습니다. 팬데믹을 겪은 적도 없었습니다. 경제 위기는 몇 번 겪었지만, 그때마다 그럭저럭 견뎌냈습니다.

이렇다 보니 우리는 너무 나쁜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안일하게 지내 왔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잊고 살았습니다. 

최근에 마르틴 루터의 편지들을 읽었는데, 정말 빠져들었습니다. 이 책에도 한 편을 인용했습니다.

루터는 이런 전염병 유행에 몇 번이고 대응해야 했습니다. “도와주세요! 전염병이 돌고 있어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이 울부짖으면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루터는 사람들에게 약을 먹고 규칙을 준수하라고 말합니다. 가능한 실제적인 도움을 주라고 말합니다.

감염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병을 옮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루터는 매우 실제적이었습니다. 사실상 이렇게 말한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이 전염병에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이 전염병을 대단한 신학적 토론거리로 만들지 맙시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원수가 독과 치명적인 똥을 보냈으니,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다음에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하고, 약을 먹고, 나를 보호하고 내 부주의로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감염되어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꼭 가야할 것이 아닌 장소와 사람들은 피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시기 원한다면, 얼마든지 나를 찾으실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을 완수했으니, 나의 죽음이나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

하지만 이웃에게 내가 필요하다면, 어떤 사람이나 장소도 피하지 않고, 그를 찾아가 도울 것이다.

― 루터의 영성 상담 편지, 「하나님과 팬데믹」(비아토르), 114쪽에서 재인용 

 

이 책은 구약에서, 특히 시편과 욥기에 나온 주제를 가져오는데요, 욥기를 말씀하시면서 “욥기의 핵심은 이것이 정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 모호한 것을 못 참는 이유가 구약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지 못해서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약에도 모호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에도 점. 점. 점[…], 물음표로 끝나는 곳이 많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반적으로, 나는 지난 2, 3백 년 동안 교회에 스며든 합리주의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합리주의자들이 이런 식으로 말하기 때문이지요.

“봐라. 현대 과학이 기독교가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합리주의자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대응합니다.

“아니다. 기독교가 전적으로 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자!” 이러니 우리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갖고자 합니다. 또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니, 뜻이 있으셔서 이렇게 하셨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뜻이 있으셔서 이것을 허락하셨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계획하고 계신지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그런 접근 권한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약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몇 장면 중에 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편지에서 노예 오네시모에 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오네시모]가 잠시 동안 그대[빌레몬]를 떠난 것은, 아마 그대로 하여금 영원히 그를 데리고 있게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빌레몬서 1:15)

말하자면, 바울은 하나님이 이 상황에서 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아마도 자신이 알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겸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니, 뭘 어쩌겠어?”라는 잘못된 자세로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 또한 현명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이드라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세부 사항을 아는 것은 우리 능력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이 특별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하나님이 알려 주실 때,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관한 대목에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서 우시는 예수님을 모범으로 강조하십니다. 고통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그들이 “울고 있는 하나님이 무슨 유익을 줄 수 있습니까? 나도 울 수 있습니다. 다들 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결책입니다. 예수님이 우신다고 무슨 도움이 됩니까?”라고 물을 때,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복음서 이야기 속에는 정말 많은 행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동은 눈물에서 비롯됩니다. 복음서에는 눈물이 핵심적인 요소인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 눈물은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은 어딘가 높은 곳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좋아, 너희가 저지른 문제를 해결해 주지”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우리가 있는 곳에 우리가 함께 계시고 그곳에서 우리를 구해 내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가 탄식할 때 예수님이 나와 함께 탄식하시며, 성령께서 내 안에서 탄식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크나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내가 아는 다른 어떤 세계관과도 뚜렷이 구별됩니다. 

 

전염병에 대한 우리의 대응과 관련하여 신약의 나머지 부분에서, 특히 성령의 역할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방금 이야기 나눈 로마서 8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주교직에 있을 때 교구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면접을 했는데, 그때마다 이런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무인도에 간다면, 어떤 성경 말씀을 가져가실 겁니까?” 그리고 더 어렵게 하려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요한복음 20장과 로마서 8장은 이미 가지고 있을 거니까, 이 둘은 빼시고. 이 둘은 틀림없이 가져갈 거니까요.”

로마서 8장은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가져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전에 먼저 로마서 7장의 난관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바울의 확언을 향하여 날듯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로마서 8:38–39).

그러나 로마서 8:18-30, 특히 26절과 27절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약함을 대신하여 간구하신다고 이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늘 그렇지만 특히 지금과 같이 세상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교회가 뒤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 말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혼란에 빠지다니 정말 안타깝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닙니다. 바울은 세상이 고통하며 신음하고 있을 때, 우리도—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자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은 우리도—탄식하며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해 주실 것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로마서 8:23).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좋다. 교회도 혼란에 빠진 세상에 속해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아시는 게 틀림없어.”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성삼위 하나님의 신비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니까요.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는]

바로 그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신다[로마서 8:26]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위대한 애가 시편 중 하나인

시편 44편을 암시하면서,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신다고 말합니다(로마서 8:27).

다시 말하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령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마음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끔찍한 상황을 보시면서 말문이 막혀 버린 그런 마음입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들로 오셔서 우리가 지고 있는 죄의 짐을 대신 지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교회 안에서, 고통에 빠져 있는 세상에서 함께 탄식하신다. 바로 이것이 현재의 공포와 수치에서 비롯된 산고와도 같은 극심한 고통을 구원으로―우리가 약속으로 받은 완전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바꾸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성령이 슬퍼하고 탄식하신다고 생각하니, 앞에서 잠깐 말씀하셨던 ‘애통’이 다시 생각납니다. 이 책에서 줄곧 우리는 “애통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현대 교회에서 잊어버린 것이 이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재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우리가 이것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시편을 항상 묵상하는 전통에 속한 성도라면, 시편으로 애통하는 법을 익힐 수 있습니다.

나는 매일 시편 기도를 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주 애가 시편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애가 시편이 내게 꼭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내 삶에도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내가 매우 기뻐하고 있을 때도 애가 시편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영적인 훈련을 합니다.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전 세계의 사람들에 내 생각을 모으려고 노력합니다.

내 친구일 수도 있고, 텔레비전이나 뉴스에서 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끔찍한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들이기도 하고, 아니면 다른 어떤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들을 끌어안으려고 노력하면서 애가 시편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애통이 사순절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절에도 애통이 있습니다. 이 절기에도 우리는 애통의 예배를 개발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고통을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 가져가는 예배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시편 22편이나 42편, 88편 같은 애가 시편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셨던 것을 보여주는 시편들 말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태복음 27:46)

시편에서 애통의 기도가 때로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 빛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시편 88편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애가 시편은 어둠 속에 계속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편에서 우리는 어둠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이 책을 끝맺으면서, 이런 저런 폐쇄 조치에 대한 교회의 반응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대면 집회를 유보하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것을 받아들이다 보면 의도치 않게 신앙은 사적인 활동이라는 세속적 생각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십니다. 회중 예배에 대한 요청과 공중 보건의 중요성이라는 긴장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요?   

나는 이 책을 전염병을 퍼트려서는 안 된다는 루터의 논점과 함께 시작합니다. 그것은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갖고 장난치는 짓입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보다 우리 교회 건물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는 화를 당할 것입니다. 사실, 영국에 있는 많은 교회들은 매우 낡았습니다. 완벽하게 소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매우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온라인 예배가 우리를 이렇게 유혹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걱정됩니다. “사람들을 굳이 안 만나도 돼. 예배는 영적인 것이니까.” 

그러니 침실에서, 잠옷을 입은 채로, 아니면 다른 어디서든 예배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팀 스포츠입니다. 함께하는 어떤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갈라디아서 5:22–23)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가 함께해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떨어져서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빨리, 현명하게 함께 모일수록 더 좋습니다.

성찬을 받는 것도, 그렇습니다, 스크린을 통해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하나님 백성으로 이루어진 더 큰 가족―이 물리적으로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온라인 성찬식에서] 우리는 굶주림과 박탈감과 고립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악과 고통에 맞서는 가장 중요한 대응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행동하는 것이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모델이지요. 이런 생각으로 이 팬데믹이 가져온 고통을 조명해 본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도행전 11장에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안디옥의 제자들이 온 세계에 큰 기근이 들 것이라고는 예언을 듣습니다(사도행전 11:28).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가 나신 것입니까?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뜻입니까?” 제자들은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합니다.

“누가 가장 위험에 처하게 될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를 보내야 할까?” 그리고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 편에 자신들이 마련한 구제금을 유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냅니다(사도행전 11:29–30).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요한복음 9장도 비슷하게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실제적이시며, 그 남자가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잘못인지,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묻는 제자들을 제지하십니다(사도행전 11:3).

그것은 실제로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반응은 무엇인가?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이웃, 친구, 가족과 더불어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우리가 음식이나 생활용품, 의료품을 가져다주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교회가 푸드뱅크를 운영하는 일에 동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Dominion: How the Christian Revolution Remade the World(기독교 혁명은 세상을 어떻게 다시 만들었는가)에서 역사학자 톰 홀랜드는 교회가, 오직 교회만이 했던 많은 일들을 이제는 세속 사회가 맡아서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간급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고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고대 세계에서는, 그리스도인들만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기독교적 이상의 일부가 세상 속으로 퍼져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첫날부터 의료와 가난한 이웃 돌보기, 교육 같은 일을 해 왔습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의 유전자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그 전통을 되살려 꾸준하게 실행해야 합니다. 지금 이 비상시국에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이 팬데믹이 끝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CTK 20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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