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체제전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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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체제전복자
  • 유진 피터슨 | Eugene Peterson
  • 승인 202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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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비밀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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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체제전복자

예수는 체제전복의 거장이셨다. 끝까지, 제자들을 포함해서 모두들 그를 랍비라 불렀다. 랍비들은 중요한 사람들이긴 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에게 랍비 이상의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낌새가 있을 때마다, 예수는 그것을 잠재우려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예수께서 가장 좋아하신 연설 형식인 비유도 체제전복적이었다. 비유는 지극히 평범하게 들린다. 땅과 씨앗, 끼니와 동전과 양, 강도와 희생자, 농사꾼과 장사꾼에 관한 일상의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비유는 온통 세속의 이야기이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40여 가지 비유들 가운데 단 하나만 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단 두 개만 하나님을 언급한다.

예수께서 들려주시는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이 이야기들이 하나님에 관한 것이 아니며, 그래서 이 이야기들에는 자기네 영역을 위협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경계를 늦추었다. 그들은 그 이야기들이 상상력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면서 자리를 떴다. 그러다가 마치 시한폭탄처럼, 그 이야기들은 무방비로 있던 그들의 마음속에서 폭발한다.

그들의 발밑이 쩍 갈라지고 심연이 열린다. 예수는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침노당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평범한 삶들 옆에 특별한 이야기들을 똑 던지시고는(parable, 비유; pare, “옆에”; bole, “던지다”) 아무 설명도, 영접 요청도 없이 자리를 뜨셨다. 그러면 청중은 연관성―하나님 연관성, 삶 연관성, 영원 연관성―을 보기 시작했다.

분명함의 결여 즉 비유사성이 유사성―하나님 유사성, 삶 유사성, 영원 유사성―을 인지하도록 자극했다. 비유가 그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비유는 다만 청중의 상상력을 작동시켰을 뿐이다.

비유는 이해를 쉽게 만드는 예화가 아니다. 오히려 비유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상상력의 발휘를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비유는 우리의 방어벽을 불온하게 뚫고 들어온다. 일단 우리의 자아의 성채 안에 들어온 다음에는, 이제 방법을 바꾸어, 갑자기 총검을 휘두르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보존한다.

하나님께서는 외부에서 당신의 실체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꽃과 열매를 길러내신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국의 침략이 아니라 사랑의 교제이다. 이 사랑의 교제 안에서 우리 삶의 평범한 일상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잉태되고 성장하고 성숙하는 씨앗으로 존중 받는다.

비유는 우리의 상상력, 말하자면, 우리의 믿음을 신뢰한다. 비유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듯이 우리로 교실로 끌어 모아 설명하고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비유는 마치 군대에서 하듯이 우리를 도덕적으로 열을 맞춰 행진하게 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들려주신 복음의 이야기들은 거의 모두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라 간과되었고, 흔한 이야기라 무시되었으며, 불법적인 이야기라 거부되었다.

그러나 관습의 표면 아래에서 그리고 개연성의 무대 뒤에서, 이야기들―사생아(사람들은 그렇게 여겼다) 임신, 헛간 출산, 나사렛의 침묵, 갈릴리 사람들의 불경스러움, 안식일의 병 고침, 겟세마네의 기도, 범죄자로서의 죽음, 세례의 물,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은 저마다 사실상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것은 곧 불온한 체제전복의 이야기이다.

 

체제전복자가 품고 있는 생각

체제전복자에게는 세 가지 가정이 숨어 있다. 하나. 현 상태는 잘못되었으며, 너무나 잘못되었기 때문에 보수공사 정도로는 안 된다. 이 세상이 살만해지려면 뒤집어엎어야 한다. 이 세상은, 망가진 우리 자동차를 보고 보험사에서 그렇게 말하듯이, 수리하지 않고 폐차시키는 게 낫다.

둘. 살만한 다른 세상이 태어나고 있다. 이것은 근거 없는 망상이 아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 존재하는 세상이다. 그 특징도 알려져 있다. 그 전복자는 유토피아의 꿈을 좇아서가 아니라 진정한 세상의 본질에 대한 확신에 따라 행동한다.

셋. 한 나라를 전복시키고 그 자리에 다른 나라를 심는 일반적인 수단들―군사력이나 민주적 선거―은 쓸 수 없다. 우세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수의 표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변화를 가져올 다른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은밀하게 체제를 전복시키는 방법을 찾는다. 우리는 동지들을 찾고 받아들인다.

1986년 60세 생일 인터뷰에서 시인 아몬스A. R. Ammons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시는 전복적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예, 얼마나 전복적인지 모르실 겁니다. 심히 전복적입니다.

의식은 종종 변두리에서 매우 강렬한 수준에 도달합니다. 바로 그 변두리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행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들을 허물어버립니다. 시의 청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변화를 거부하지만, 결국 그 변화에 감사해 합니다.”

이와 같은 확신이 복음에도 깊이 들어 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교구 생활에 보통 깔려있는 그런 확신들이 아니다. 회중은 이미 하나님 나라 가까운 곳에 있으며 우리가 조금만 더 힘을 합쳐 노력하면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가정을 할 때가 매우 많다.

목사들은 특히 모든 회중을, 또는 적어도 회중의 다수를 설득하거나 강권하여 의로운 일을 행하게 할 수 있다고, 심지어는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 그 반대가 입증되었음에도 말이다.

목사들에게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다들 인정한다. 하지만 목사들에게는 기독교적 체제전복의 노련한 기술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예수님은 진리일 뿐만 아니라 또한 길the Way이시다.

복음이 전달되는 길[방법]도 제시되는 복음의 진리만큼이나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다. 왜 많은 목사들이 복음의 진리에는 전문가들이면서 그 방법에는 낙오자인 것일까?

목회적 전복을 익히고 그 기술을 연마하고자 한다면, 스파이 소설을 읽고 공산주의자들의 침투 전략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도 없을 것이다.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왕상19:11-12)

이것은 주님께서 스룹바벨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슥4: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5:13)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다].(마13:31-3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고전2:2-3)

불행히도, 목사들이 이와 같은 성경적 체제전복 방법론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핏하면 던져버리고서는 공격이나 홍보에 열을 올린다. 그럴만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허영심과 순진함이다.

허영심. 우리는 이 세상의 파티에서 투명인간마냥 지내고 싶지 않다. 목회자가 되려고 준비하는 백인 남자가 줄고 있다는 최근 연구에서 내린 결론은, 아무도 이것을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직업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 부진을 다른 사람들(흑인, 아시아인, 여성)이 채우고 있는데, 이들은 명성을 얻으려 하지 않고, 이들에게는 체제를 전복하려는 일을 해 온 역사가 있다. 명성이 없기는 떠돌아다니면서 천막을 만든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순진함. 교회는 이미 하나님 나라라고, 그리고 조직관리와 동기부여를 더 잘 하기만 하면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나 역사 어디에서도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동의어로 쓰이는 곳을 볼 수 없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세상적인 사례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다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면, “속았다”는 기분이 든다. 미국의 목사들이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분노와 냉소주의가 팽배해 있는 것도 별로 이상할 것 없다.

우리는 종교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과 죄, 특히 영적 죄에 대한 단테의 분석을 보충교육 받을 필요가 있다. [전문 보기: 목사, 체제전복자]

 


Eugene H. Peterson, “The Subversive P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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