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역사를 움직이는 수레바퀴,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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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역사를 움직이는 수레바퀴, 정의
  • 성유원
  • 승인 20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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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원의 사유의 정원_열네 번째 산책

 

존재를 받쳐 주는 기둥, 정직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다 얻을 것이다.
의를 위하여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은 행복하다.

― 마태복음

 

글    성유원
그림  고여정

정의에 이르는 길

앞에 문지기 한 사람이 서 있다. 시골 사람 하나가 와서 이 문지기에게 법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입장하는 걸 허락할 수 없노라고 말한다. 그 사람은 이리저리 생각해 보다가 그렇다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럴 수는 있지만.” 하고 문지기가 말한다. “지금은 안 된다오.” 

문은 언제나 그렇듯이 열려 있고, 문지기가 옆으로 물러섰기 때문에 시골 사람은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려고 몸을 굽힌다. 문지기가 그것을 보고는 웃으면서 말한다. 

“그렇게 마음이 끌리거든 내 금지를 어기고라도 들어가 보시오. 그렇지만 명심하시오. 내가 막강하다는 것을. 그런데 나로 말하자면 최하급 문지기에 불과하고, 방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서 있는데 갈수록 막강해지지. 세 번째 문지기만 되어도 나조차 쳐다보기도 어렵다고.”

시골 사람은 허락을 받을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사람들이 문지기를 매수하기 위해 값비싼 물건을 주지만 문지기는 물건만 받고 들여보내 주지는 않는다. “받아 두기는 하지만 그건 다 당신이 뭔가 해 볼 수 있는 일을 다 해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받아 주는 거요.”

법의 문 앞에서 오랜 세월을 기다리다가 나이가 들어 죽음 가까이에 이른 시골 사람은 마침내 궁금했던 한 가지를 문지기에게 묻는다. “내가 지켜봤는데 여러 해를 두고 나 말고는 아무도 들여보내 달라는 사람이 없으니 어쩐 일이요?” 문지기는 시골 사람의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며 답한다. “여기서는 다른 그 누구도 입장 허가를 받을 수 없었어. 이 입구는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문을 닫고 가겠소.”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에 담긴 내용이다. 법이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어야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한 시골 사람은 평생을 기다렸지만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 

이 짤막한 이야기를 통해 카프카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보통 사람이 법에 다가가기는 지극히 어렵다는 것일까? 법체계가 그만큼 엄격하고 법의 절차가 복잡하다는 뜻일까? 법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게 아니라는 의미일까?

핵심을 품고 있는 열쇠는 ‘아무도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없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정의의 실현에 있다고 본다면 결국 ‘법으로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닐까?

인류의 메시아로 고난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도, 서양 철학의 큰 스승인 소크라테스도 법에 의해 처형되지 않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법’하면 ‘정의’를 떠올린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 법과 정의는 짝을 이루는 말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의 개념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담론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려 “정의란 각자 자기가 맡은 일만을 행하고 그 밖의 일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각자의 일을 올바로 하는 것, 그래서 수혜자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정의라는 얘기다.

예컨대 학교는 학생에게, 병원은 환자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정의 실현의 구체적인 결과인 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의 교사, 병원의 의사가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해야만 하며,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최고로 잘하면서 그 밖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때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정의를 “국가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묶어 주는 유대紐帶”라고 했다. 정의에 대한 합의와 집행이 사회의 질서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에 대한 요구와 담론은 어느 시대나 있어 왔지만 최근 들어 주목을 받은 것은 하버드 대학교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교수의 강의 ‘정의’JUSTICE를 통해서였다.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한때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며 인기를 모았다. 이 책이 주목을 받고 화제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정의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현실 속에서는 실현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은 아닐까?

샌델은 법이 작동하는 국가 개념 안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세 가지―행복의 극대화, 자유, 미덕-를 제시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원칙에서 바라본 정의는 사회 구성원들이 풍요로움을 누리며 행복을 극대화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것은 시장 중심의 삶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항목이다.

정의를 ‘자유’와 관련짓는 이론에서는 개인의 권리 존중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곧 정의라는 것이다. 이런 정의론이 갈수록 힘을 얻는 한편 이를 이해하는 방식을 둘러싸고는 여러 가지 주장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정의란 구성원들의 합의에 따른 자발적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데 달렸다고 믿는 자유주의자들과, 규제 없는 시장은 공정하지도 자유롭지도 않음을 강조하며 정의를 구현하려면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바로잡고 모든 이에게 성공할 기회를 공평하게 주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평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대표적이다. 

한편 정의를 ‘미덕-좋은 삶’과 연관 짓는 목소리도 있다. 도덕을 법으로 규정함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보기에 자칫 배타적이고 강압적인 상황을 불러올 수 있지만, 정의로운 사회라면 좋은 삶에 대한 견해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이념에 공통으로 들어 있다. 

오늘날의 정치를 움직이는 정의에 관한 이러한 주장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매우 복잡한 사안들이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 풍요와 자유를 지지하면서도 구성원 전체를 위해 사회가 장려해야 할 좋은 삶은 무엇인지, 공유해야 할 미덕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과 더불어 불의에 대한 심판 또한 정의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처럼 중점을 두는 가치에 따라 달라지는 정의에 관한 이견들 속에서 어려운 도덕적 선택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무엇을 향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정의에 대한 고민은 곧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삶을 고민하는 것과 통한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자유 사회의 시민은 타인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정부는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자유시장은 공정한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잘못인 경우도 있는가 등등 우리가 시민으로 살면서 부딪히는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정의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풀어 나간다.

예리하게 질문하고, 반박하고, 재검토하며 다원화된 사회의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반영하면서. 나아가 공동선을 위한 새로운 정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면서. 그런데 과연 정의라는 것이 논리적 합의 절차를 거친 정책과 제도의 확립만으로 해결되는 문제일까?

샌델이 던지는 무수히 복잡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힘이나 권력을 가진 강자보다는 그 힘 때문에 부당하게 피해를 입는 ‘선량한 약자 편’에 서야 한다는 것과 ‘공동체의 삶’에 중심을 두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세계사에서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던 사람들의 삶은 이와 같은 정의의 공통적 속성을 보여준다.

인간은 여타의 조건에 관계없이 누구나 존중받아야 하고, 홀로 살아갈 수는 없으며 공동체 속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정의에 대한 감각을 잃지 말아야 할 이유다. 

정의감의 바탕을 이루는 이러한 점 때문에 의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대개 불의한 상황에서 고통당하는 약자의 편에 서서 핍박받는 이들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싸웠다.

그것이 역사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이라고 믿었고, 의로운 세상을 향한 그들의 그러한 희생과 헌신이 역사를 움직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의 문’으로 끝내 들어가지 못한 카프카의 시골 사람처럼 ‘정의’에 이르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한 사회가 정의를 이루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전문 보기: 역사를 움직이는 수레바퀴, 정의]

 


성유원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2017년까지 예원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어린 예술가들과 풍요로운 나눔의 날들을 보냈다. 퇴직한 후에는 대학생과 대학원생과 직장인으로 구성된 인문학 독서모임을 이끌며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사유의 정원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고여정 글쓴이 성유원의 예원학교 제자이자 함께 독서하며 생각을 나누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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