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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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 강영안
  • 승인 2020.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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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편

상식의 오류를 드러내어 삶을 이야기하다 : 강영안 교수의 철학과 신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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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제 리유의 윤리를 보십시오. 페스트 2부 끝을 보면 랑베르와 타루, 리유가 토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간은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위대한 감정을 품을 수 없다면 그런 인간에 대해서는 나는 관심이 없다”는 말로 랑베르의 주장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때 랑베르가 말하는 감정은 남녀 사이의 사랑입니다. 사랑할 수 없다면, 사랑이 아니라면, 어떤 이념에서 나온 영웅적인 행동도 행동할 가치가 없다고 랑베르는 생각합니다.

저변에는 영웅적인 행동은 어떤 이념에 따라 유발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랑베르는 하나의 이념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는 있지만 그는 그런 영웅주의를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죽는 것에만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의 행동을 부추긴 것은 이념이 아니라 감정에서 우러나온 사랑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랑베르는 ‘사랑’과 ‘이념’을 적대적인 관계로 설정합니다. 

그런데 리유는 “인간은 하나의 이념이 아닙니다”라고 자신의 의사를 표시합니다. 공산주의이든 자본주의이든, 허무주의이든 실존주의든, 히틀러의 나치주의이든, 어떤 이념도 인간존재로 제대로 그려 낼 수 없다는 생각을 리유는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념을 따른 행동의 윤리’도 랑베르가 내세우는 ‘감정에 의한 윤리’도 수용하지 않습니다. 리유는 이념이나 감정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윤리의 출발점은 이편도 저편도 들지 않는, 무관심의 윤리, 일종의 중립의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적주의靜寂主義에 빠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랑베르의 말에 리유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민음사 김화영 번역을 인용합니다.)  

“옳은 말씀이에요. 랑베르. 절대로 옳은 말씀이에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금 하시려는 일에서 마음을 돌려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일[오랑을 탈출하려는 랑베르의 계획]이 내 생각에도 정당하고 좋은 일이라 여겨지니까요. 그러나 역시 이것만은 말해 두어야겠습니다.

즉 이 모든 일[페스트와 싸우는 일]은 영웅주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인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랑베르는 심각한 표정으로 묻습니다.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랑베르는 화를 내면서 이렇게 되받아 말합니다. “아, 나는 어떤 것이 내 직분인지 모르겠어요. 아마 내가 사랑을 택한 것은 정말 잘못일지도 모르겠군요.”

이 대화가 끝나고 리유가 나가고 없는 자리에서 타루는 랑베르에게 묻습니다. “리유의 부인이 여기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요양소에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물론 랑베르는 뜻밖이라는 시늉을 했습니다. 뒷날 꼭두새벽에 랑베르는 리유에게 전화를 걸어 묻습니다. “내가 이 도시를 떠날 방도를 찾을 때까지 함께 일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어요?” 랑베르는 리유와 타루와 함께 페스트와 싸우는 대열에 함께합니다.          

이 대화에서 페스트에 직면한 베르나르 리유의 윤리를 보게 됩니다. 그에게는 이념도 사상도, 종교도 정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리유는 사형선고를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가 이제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내세우는 타루보다 그랑에게 가까웠습니다.

시청 서기 조세프 그랑은 페스트 관련 통계를 만들고 서류를 처리하는 일을 맡아 했습니다.

그는 떠나 버린 아내를 생각하며 책 한 권을 완성하느라 매일 같이 “5월 어느 아름다운 아침나절, 한 날씬한 여인이 굉장한 밤색 털의 암말을 타고 꽃으로 가득 찬 블로뉴 숲의 오솔길을 누비고 있었다”는 문장을 썼다가는 지우고 또 썼다가는 지우고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만일 영웅이 한 사람 꼭 있어야 한다면 그랑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리유는 말합니다.

그랑은 ‘자기가 선의로, 주저함이 없이 맡겠다고 말했던 일’을 어김없이 해내는 사람, 전혀 두드러진 면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리유의 윤리에 가장 부합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반복하자면 랑베르와 대화에서 리유는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실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리유는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이것을 저는 페스트에 직면한 리유의 윤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때 말하는 ‘성실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출판사 열린책에서 나온 번역(최윤주 역)에는 “페스트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정직입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정직이란 도대체 뭐죠?”라는 질문에 리유는 “객관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저도 잘 모르지만, 제 경우로 본다면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라고 역자는 번역했습니다.

민음사의 김화영 번역에는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로, 성실성에 대해서는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성실성’인가 ‘정직’인가?

어느 번역이 리유가 쓰고 있는 ‘로네뜨떼’l’honnêteté의 뜻을, 그리고 나아가 〈페스트〉에서 카뮈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는 번역어인가? 

‘정직’은 말과 행동에 다 같이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말에서 정직하지 못한 경우는 거짓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정직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행동이 정직한 경우는 그 가운데 속임이 없을 경우입니다. 행동에서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속임수를 쓰는 경우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를 경우에도 우리는 정직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말을 하고는 말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거나 달리 행동하는 경우, 어떤 행동을 하고서는 한 행동과는 다르게 서술하는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을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성실하다’는 말은 말보다는 행동과 관련되고, 행동 가운데도 이런 저런 개별적인 행동보다는 여러 행동이 모여 일정한 삶의 방식, 삶의 형식을 만들어 낼 경우에 붙이는 술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실하다’고 할 때, 그 사람이 한 하나의 행동만을 두고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맡은 일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신실하게 수행할 때 그 사람을 일컬어 사람들은 ‘성실하다’고 말합니다.

말과 행동에서의 정직과 말과 행동의 일치를 뜻하는 의미의 정직도 이 성실성 속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역도 반드시 성립한다고는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리유가 하고 싶은 말뜻은 ‘정직’보다는 ‘성실성’이나 ‘신실성’이 훨씬 더 잘 드러내 준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번역도 가능합니다. [전문 보기: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강영안 미국 칼빈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 철학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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