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나다운 조건, 그리고 안배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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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나다운 조건, 그리고 안배의 신비
  • 이진경
  • 승인 2020.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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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생 투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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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 목요일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최상의 결정’ 

선배와 함께 온라인으로 책모임을 한 지 벌써 세 번째다. 강사로 활동하던 선배는 코로나로 강의가 줄줄이 취소되고 오프라인 만남이 제한되자 뭔가 보람찬 일을 기획하고 싶었고, 그 결과로 온라인 책모임을 탄생시켰다.

선배의 통찰과 진행 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나는 책모임이 기획되자 주저 없이 냉큼 신청부터 했다. 책을 한 권 한 권 완독하고는 모르는 사람들과 책 내용 및 속마음을 함께 나누는 모임은 집에서 쉬고 있던 내게 상당히 즐거운 자극이 되었다.

우리는 레이첼 헬드 에반스의 「다시 성경으로」와 머라이어 하우스덴의 「한나의 선물」, 그리고 박완서의 「빈방」을 함께 읽었다. 

모두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암 때문에 세 살 된 어린 딸을 잃어야 했던 작가 머라이어 하우스덴의 글에는 사무치게 와 닿는 문장이 유독 많았다.

역시나 말로 다할 수 없는 극한 고통과 깊은 성찰을 담은 책에는 독자 자신의 내면을 일깨우고, 느끼고 있었는데도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생각들을 끌어내어 언어화하도록 돕는 힘이 있다. 

저자와 그 남편은 세 살배기 딸 한나가 암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자 의사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

“두 분은 지금부터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할 겁니다. 그런 결정들이 한나가 사느냐 죽느냐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릅니다. 제가 두 분께 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이것입니다. 그때에 두 분이 갖고 있는 정보 범위 안에서 내릴 수 있는 최상의 결정을 내리십시오.” 

아빠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종종 후회하곤 했다. ‘그때 좀 더 적극적으로 자연 치유를 알아보아야 하지 않았을까?

어차피 항암 치료로는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빠가 남은 기간을 준비하시도록 일찍 알려드려야 하지 않았을까? 수술을 해도 큰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수술하지 않고 덜 고생하시도록 해야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암으로 인해 평균 수명보다 훨씬 일찍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 본 사람들은 누구나가 가질 법한 회한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내게 암이 발병했을 때는 일단 암을 모두 제거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나는 병원에서 요구하는 모든 치료를 마쳤다. 거기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고, 아무리 고생스럽더라도 낫는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치료 방법에 대한 망설임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의 투병 기간 동안,  5년 내 생존율이 7퍼센트 정도라는 위암 4기를 앓고 있는 한 작가가 에스엔에스(SNS)에 올린 글을 보면서 ‘내가 저 상황이라면…’이라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완치라는 개념은 없고 평생 몸에 암을 지니고 살면서 죽는 날까지 항암 치료를 거듭해야 하는 상태.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 작가는 항암치료와 수술을 거듭하면서 고통은 극심해지고 몸은 약해졌으며 약에 대한 내성은 강해져 급기야 음식을 먹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고 암은 점점 더 커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항암 치료를 더 일찍 포기하기엔, 항암 치료로 나아지는 케이스들도 많이 보아 왔고, 자신의 아이를 위해 반드시 생명을 연장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수많은 암환자들이 나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최악의 경우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오히려 치료 때문에 급격하게 악화되어 때 이른 죽음을 맞는 경우다.

거듭되는 수술과 항암 치료로 몸의 기관 하나하나가 망가져 갈 때 말기 암 환자들은 이 치료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지독한 회의와 의심에 놓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치료에서 손을 놓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거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자칫하면 죽음으로 직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때 치료를 더 받았어야 했나 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후회하게 마련이다.

인간은 앞을 내다볼 수 없고 완벽한 결정이란 없으니 이런 상황에서의 선택은 사활을 건 도박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때에 두 분이 갖고 있는 정보 범위 안에서 내릴 수 있는 최상의 결정을 내리십시오.” 저자는 의사에게서 들은 이 말이 딸의 치료뿐 아니라 자기 삶의 다른 모든 영역에도 적용된다고 느꼈다.

그러고선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는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선언을 한다. 설령 그 결과가 딸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태도는 언뜻 보면 무력한 체념이나 포기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인간이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최종 결과를 하늘에 맡기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태도, 믿음과 실행, 내려놓음이 단단한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태도가 내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드러날 때 나의 마음은 얼마나 가벼워질 것이고, 내 삶은 얼마나 단단해져 있을까.

암이라는 만성질환을 맞이한 이후로 재발과 전이의 위험을 제쳐 두고 살 수 없는 지금, 나는 머라이어 하우스덴처럼 두려움보다는 내려놓음과 최선의 실천을 선택하기로 매일매일 마음을 먹는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최상의 결정을 내려 몸을 관리하고, ‘메멘토 모리’의 정신을 통해 순간순간 오감으로 내 환경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의 기쁨을 누리려 하고 있다. 

우리의 뇌는 꼭 편집자와도 같아서 우리의 기억과 이미지, 감정은 늘 편집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인해 ‘기쁨’을 유지한다는 것은 매일 내게 허락된 좋은 경험들에 깨어 있어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그것들을 굳건히 간직하고 수시로 떠올리며 깊이 느끼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 

암을 비롯한 만성질환에 대처하는 최고의 방법은 ‘예방’이다. 최고의 암 예방법은 독성물질 노출을 최소화하고, 건강에 유익한 식생활을 실천하고, 규칙적으로 운동하여 땀을 흘리고, 스트레스를 줄이고, 건강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 한다. 당연한 말인데도 실천은 쉽지 않다.

이것은 정신의 건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정신이 독성 요소에 노출되는 것을 최소화하고, 정신 건강에 유익한 양식들을 흡수하고, 규칙적인 운동과 건강한 대인관계를 추구하고, 스트레스를 줄인다면 우리 삶의 암적인 요소는 점차 줄어들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우리 사회의 암적인 요소들도 줄어들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최상의 결정을 내려 실행하는 것에 결코 게으를 수 없는 이유 아닐까. [전문 보기: 지극히 나다운 조건, 그리고 안배의 신비]

 


이진경 CTK 창간에 힘을 보탰고, 에디터로 일했다. ‘싱글 이야기’를 연재했으며, 지금은 암 투병 중에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희망의 속도 15km/h」, 「좋은 죽음 나쁜 죽음」, 「감각의 제국-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감각의 모든 과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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