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전도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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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스토트, 팀 스태포드
  • 승인 201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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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 복음주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말하다
     

복음주의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복음주의가 중요합니까?

복음주의자란 평범한 보통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역사적이며, 정통적이며, 성경적인 기독교 주류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틀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하지 않으면서도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을 암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믿습니다.

다음으로, 우리 복음주의자들에게는 특별히 강조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권위에 대한 관심이며 다른 하나는 구원입니다.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우리의 권위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점은 구속 혹은 구원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셨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증거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 하신 일, 둘 다, 헬라어를 사용하자면, ‘하팍스’
(hapax)―유일회적이라는 의미―라는 점을 반드시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말씀에는 최종적 성격(finality)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도 최종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한 마디를 덧붙일 수 있다거나 혹은 그분의 사역에 일 하나라도 덧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영광에 대한 지극한 모독입니다.
 


목사님은 성경을 언급하지 않으셨는데요. 놀라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언급했는데 그 점을 알아채지 못했군요. 제가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성경의 증거에 대해 말씀드렸었지요. 그렇지만 더욱 분명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확신의 대상이 책에서 사람으로 옮겨지기를 원합니다. 성경이 나에 대해 증거한다고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듯이, 성경의 주된 역할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뜻은 복음주의자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우리의 진짜 초점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겠군요.

저는 그 점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권위를 승인하셨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믿습니다. 그리스도는 두 언약 사이에 서 계십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볼 때, 그리스도께서 구약 성경을 승인하셨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내다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때문에 신약을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신중하게 사도들을 선발하고 임명하고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들이 자기에 대해 독특한 사도적 증거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제가 볼 때 그리스도는 구약을 승인하시면서 신약을 준비하고 있는 그 중간에 계셨습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봅니다. 비록 신약 정경의 문제가 복잡하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정경성은 곧 사도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사역 기간 동안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제가 안수를 받은 지 60년이 더 지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영국 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았을 때, 영국 국교회 안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은 경멸당하고 배척당하는 소수파였지요. 감독들은 틈만 나면 우리를 조롱하려 들었지요.

그 60여 년 동안 나는 영국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규모와 성숙도와 학문성에 있어서 성장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므로 영향력과 파급력에 있어서도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게토에서 나와 우월한 자리로 올라갔습니다. 그 자리는 매우 위험한 자리지요. 
 


그 위험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교만은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항존하는 위험입니다. 많은 면에서 우리는 경멸당하고 배척당하는 편이 낫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를 칭찬하면 네게 화가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하팍스’로 돌아가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겸비하게 하는 개념입니다. 복음주의의 본질은 겸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윌리엄 템플
(William Temple)이 이렇게 말했지요. “내가 구속에 유일하게 기여하고 있는 나의 것은 내가 구속받아야 하는  죄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또한 전 세계적으로 교회가 엄청나게 성장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주로 복음주의 노선을 따라서 말입니다. 그 의의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 엄청난 성장은 창세기 12장 1-4절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 혹은 그의 후손을 축복하실 뿐 아니라, 그의 후손을 통해서 땅 위의 모든 가족들을 축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다인종 교회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약속의 성취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4000년 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오늘날 바로 우리 눈앞에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서구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 성장하는 교회에 대해 알고 계실 것입니다. 목사님의 평가가 궁금하군요.

제 대답은 “깊이 없는 성장”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교회의 비상한 성장에 대해 논박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장은 주로 수적, 통계상의 성장입니다. 그 수적 성장에 비교할 만한 제자됨에 있어서의 충분한 성장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자체의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 서구 교회가 비서구 교회와 결실 있는 상호작용을 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 많은 교회들이 전 세계에 선교 팀들을 파송하고 있습니다만.

분명히 저는 단기 선교 여행에 긍정적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그 여행들은 좋은 것입니다. 그 여행은 서구인들에게 남반구의 기독교를 맛보고 그에 의해서 도전을 받을, 특히 그 원기 왕성한 생명력에 의해서 도전을 받을 아주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선교 여행을 하는 리더들이 선교 대원들에게 이 여행은 단지 타문화권 선교에 대한 매우 제한적인 경험일 뿐이라는 점을 주지시키는 것이 현명하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모범에 기초를 두고 있는 진정한 선교는 다른 세계, 다른 문화를 가진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포함합니다. 성육신적인 타문화권 선교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하며 치를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타문화권 선교사로 부르신다면, 당신이 그 나라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그 언어를 배우고 그 문화를 배우는 데 십 년은 걸릴 것이라는 점을 제발 주지하라고 말하고 싶군요. 
 


그렇다면, 사실상 단기 선교 팀이 장기 선교사를 대신할 수는 없겠군요.

현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속화되고 있거나 이미 세속화된 서구 문화권을 두고 가장 큰 선교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서구 사회에 대해서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점점 더 이교 사회가 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다가가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 사회가 보기보다는 그다지 세속적이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 서로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불리는 이들 역시 적어도 세 가지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초월성입니다. 이른바 세속 문화 가운데서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세상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나는 그것이 우리 기독교 예배의 질에 대한 큰 도전이라고 봅니다. 기독교 예배가 그들이 본능적으로 찾고 있는 것 즉 초월성, 하나님의 실재를 제공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유의미성(significance)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정체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게 다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기독교의 가르침의 질에 대한 도전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누구인지를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 형상이 일그러져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세 번째는 공동체에 대한 추구입니다. 도처에서 사람들은 공동체를, 사랑의 관계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귐(친교)에 대한 도전입니다.

나는 요한일서 4장 12절을 매우 좋아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사람들에게 큰 장애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이 보이지 않는 점을 해결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장 18절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사람들은 그 사실이 아주 놀랍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2000년 전 일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2절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정확히 똑같은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요한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과거에 예수 안에서 단 한 번 자신을 볼 수 있게 하셨던 바로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제 그리스도인 공동체 가운데서 자신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만일 복음 선포가 사랑의 공동체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말로 하는 모든 선포는 거의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이 세 가지 특징은 우리가 전도를 할 때에 우리 편이 되어 줍니다.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그들에게 제공해야 할 것들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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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목사님은 서구 사회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으시는군요.

실망하지 않습니다. 나는 전도가 특히 개인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지역 교회를 통해서,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그 교회는 대안 사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적입니다. 그리고 비극은 우리 지역 교회들이 종종 공동체를 확연하게 드러내 주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대해서 말씀하고 싶으신지요?

설교에 대해서 말할 때는 결코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저는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실례가 될 정도로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적인 설교를 말입니다. 
 


성경적 설교는 많은 곳에서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교인들의 시선을 붙잡아 놓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도 실제로는 성경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자신이 없는 목회자에게 무슨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세계적으로 똑같은 문제입니다.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고, 자라나며, 번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힘을 잃어버리며 망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랭엄 파트너십 인터내셔널
(Langham Partnership International─서구권 복음주의 지도자 육성을 목적으로 존 스토트 목사가 설립한 국제적 사역 단체─편집자 주)은 세 가지 기본적인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신념은 하나님은 자기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확신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구절들 중 하나는 골로새서 1장 28-29절입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게 만들기 위해 온갖 지혜 가운데서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 가르치면서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성숙에 있어서, 어린 아기 상태에서 나와 성장하라는 명백한 요청이 있습니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라납니다. 교회가 자라나는 다른 길들도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지만, 만일 신약 성경을 전체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을 성숙하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점은 세 번째 확신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독점적으로는 아니지만 주로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백성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종종 주일 아침에 전 세계에서 각자의 예배 장소에 모여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놀라운 광경을 마음속에 그려 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중세 성당으로도 가고, 가정 교회들로도 가고, 야외로도 가서 모입니다. 그들은 예배 중간에 설교가 있을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그 설교는 성경적인 설교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손에, 그리고 제 마음에 성경을 들고 설교단에 올라갈 때, 강해할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다는 영광만으로도 내 피가 요동치기 시작하고 내 눈은 번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나누는 영광, 그 특권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어디를 향해 가야 할까요? 벌써 50년이라는 여정을 지나왔는데요.

먼저 드리고 싶은 대답은 전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복음주의자들의 전공 분야라고 전제되어 왔습니다. 현재 저는 세계 복음화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도를 뛰어넘어 개인들과 사회 가운데서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개인들과 관련하여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여러 형태의 복음주의 신앙의 표현들 가운데 우리의 선배들, 예를 들자면, 케직 사경회 운동을 세웠던 사람들의 특징을 이루었던 거룩에 대한 추구, 때때로 그들이 성경적인 거룩 또는 실천적 거룩이라고 불렀던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해서인지, 거룩에 독실한 척한다는 느낌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사람들이 거룩하다는 말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거룩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저는 전체 복음주의 운동이 의식적으로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묘사되어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닮는 데 자라나기를 원하는 욕구를 앞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회 변혁과 관련해서는, 소금과 빛의 은유에 대해서 많이 묵상해 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선택했던 모델들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제가 보기엔 그 모델들은 최소한 세 가지 측면에서 분명하게 다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는 철저하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공동체를 서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한 편에는 세상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여러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두운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빛이 어둠과 다르듯, 소금이 부패와 다르듯 우리가 다르다는 점을 의미하셨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 사회에 스며들어가야 합니다. 소금이 만일 소금통에 들어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빛이 만일 침대 밑이나 통 속에 감추어져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빛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두 은유 모두 우리에게 단지 다르기만 할 뿐 아니라 사회 속으로 스며들어갈 것을 촉구합니다.

셋째, 좀 더 논쟁적인 뜻이 들어 있는데요. 소금과 빛의 은유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비기독교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 모델들은 소금과 빛이 효과적인 품목들이기 때문에 그 점을 의미해야 합니다.

소금과 빛은 자리하고 있는 환경들을 바꿉니다. 소금은 박테리아에 의한 부패를 막아 주며,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이 말은 사회 복음[social gospe,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그리스도인의 윤리성과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강조하며 월터 라우셴부시(Walter Rauschenbush)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신학 운동으로 신학적,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띄었다─편집자 주]을 부활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를 완전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개선시킬 수는 있습니다.

내 바람은 장차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사회적인 의제들 가운데 기후 변화를 중단시키고, 빈곤을 퇴치하며, 대규모 파괴를 가져오는 무기를 폐기시키고 만연한 에이즈에 적절하게 대처하며, 모든 문화권 가운데서 여성들과 아동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일과 같은 아주 중요하며 논쟁적인 주제들을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제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나치게 좁은 채로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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