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소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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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든 맥도날드
  • 승인 2019.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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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메시지도 전해야 한다
▲ [게티이미지뱅크]

 

에베소 최초의 목사였을 디모데는 목회의 혹독한 면을 싫어했던 것이 분명하다. 스승인 바울이 그 점을 상당히 우려했다는 것은 그가 디모데에게 쓴 두 서신에 잘 나타난다.

에베소는 험악한 도시였고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거친 사람들이었다. 말할 수 없이 어두운 영적 상태에서 갓 개종한 사람이 많았다. 디모데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담을 느끼고 목회를 그만두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 서두부터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부탁했다.

디모데는 분명히 점잖고 다정다감한 청년이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나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마음으로 진심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염려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대단한 칭찬이다.

하지만 디모데는 사람들에게 쓴소리하는 데 서툴렀던 것 같다. 그릇된 믿음과 미성숙한 태도, 부도덕한 행동을 지적하는 설교와 양육 말이다. 사람들에게 희생의 삶을 독려하는 게 쓴소리다. 교인들은 쓴소리를 들으면 움찔하기도 하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죄를 뉘우치고 힘써 더 나은 길을 찾기도 한다.

디모데는 개인 목양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들의 기분과 고통과 고민을 살피는 데는 뛰어났지만(목사들은 대개 이런 일을 잘한다) 죄와 악행을 꾸짖어야 할 때는 주저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쓴소리는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신 말씀이다.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런 쓴소리를 더 자주 하길 바랐다.

강단에서 쓴소리를 해보라. 교인들은(디모데 시대나 지금이나) 교회를 떠나든지 목사를 내쫓을 것이다. 이런 만화를 본 적이 있다. 목사가 아내에게 하는 말이다. “사실을 말했더니 사임하래.” 쓴소리를 하면 친구를 잃고 헌금이 줄고 빈자리가 는다.

디모데는 강하게 말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한 것 같다. 서신에는 그가 겁이 많았고 장이 약했고 반대에 부딪힐 때 쉽게 양보했다는 암시가 있다. 이런 문제에 익숙한 바울은 솔직하게 말한다. 디모데, 그러지 마라! 어른답게 굴어라! 하나님의 ‘예언자답게’ 처신하라! 겁을 먹고 코너에 몰리지 마라.

▲ [게티이미지뱅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
‘유순한 사람’들이 밟기 쉬운 미묘한 덫이 있다. 그들은 상처를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싫어한다. 그들은 교회의 단결과 조화, 행복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 쓴소리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 그들은 덫에 걸린다.
장담컨대 디모데는 자기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밤잠을 설쳤던 날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무던히 애썼을 것이다. 추측건대 설교를 준비할 때도 주요 인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문장은 뺐을 것이다.

나는 목회 초기에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 어른에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다. 하루는 그가 말했다. “목사님, 그게 문젭니다! 너무 민감하게 반응해요. 목사님은 비판을 듣기도 싫어하고 비판을 하기도 싫어합니다. 목회를 오래 하려면 그것부터 고치세요.” 바울이 살아났다!

바울이 쓴 디모데전후서를 읽어보면 극도로 ‘사람에게 민감했던’ 디모데 때문에 바울은 미칠 지경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호통을 친다. “깨우치라, 꾸중하라, 권하라, 나무라라, 나이 든 사람들이 너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담대하라, 복음을 소중히 지키라(그리고 복음의 왜곡을 허용하지 마라)…”
물론 바울이 옳았다. 에베소 교회의 목사는 쓴소리를 해야 마땅했다. 사람들이 교만, 폭력, 탐욕, 인색함, 부도덕뿐 아니라 이교 풍습에 찌든 문화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는 버릇이 아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영적 고결함 없었기 때문에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험담과 비방이 난무하고, 리더와 선생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위신과 위세를 놓고 겨루고, 현대인의 눈에는 영적 전쟁으로 비칠 일들이 교회에서 벌어졌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바울은 몸소 실천하지 않은 일은 디모데에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가 고린도 교회에 쓴 서신에는 쓴소리가 가득하다. 그는 저급한 신학을 꾸짖고 불화와 무정함에 경악한다. 교회 내의 부도덕과 해로운 영웅 숭배를 따끔하게 꼬집는다. 영적 은사의 오용에 일침을 놓고 교인들을 구두쇠라고 일갈한다.
고린도전후서 어디에서도 이런 문제를 사탕발림으로 말하지 않는다. 교인들을 잃지 않으려고 타협하는 부분도 없다. 바울은 바울이다. 그는 말한다. “이게 사실이다. 고칠 건 고치고 버릴 건 버리라.”
 

▲ [게티이미지뱅크]


쓴소리의 오남용
바울은 쓴소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그는 가학적인 설교자가 아니었다. 그런 설교자는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는데, 나도 몇 사람 안다. 그들에게서 쓴소리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들은 교인들에게 분노와 죄책감을 심어주는 설교, 그들만이 ‘의로운’ 사람으로 돋보이는 설교만이 참된 설교라고 생각한다. 쓴소리만 하는 설교는 사람을 교묘하게 조종하는 기교일 뿐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쓴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목사들에게 호응한다. 그들은 분노와 비난의 날이 서 있지 않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목사와 청중은 희한하게 서로 만난다(사디스트와 메소키스트). 쓴소리만 남발하는 목사는 대개 노여운 사람이다. 그들은 수류탄을 던지는 것마냥 자기 생각을 무턱대고 내뱉는 것을 좋아한다.

지나치게 민감한 탓에 교회 어른에게 꾸중을 듣긴 했지만 나는 때때로 쓴소리하기를 연습했다. 반응이 있었다.

설교가 아직 뭔지 몰랐던 시절, 하루는 설교 중에 십대를 키우는 부모들의 양육 능력이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설교를 들은 한 가장이 사무실에 쳐들어 왔다. 그는 내가 자녀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는 내가 교인들을 후려친 몇 가지 ‘사실’을 반박했다. 끝에는 자녀를 직접 키워본 사람만이 아는 몇 가지 현실에 관해 말해주었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강단에만 계시지 말고 군대라도 갔다 오세요. 그럼 사람 사는 게 뭔지 알 겁니다.”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지적은 내가 강단에서 하는 쓴소리와 그 결과를 돌아보게 했다. 둔감해서도 (이때처럼) 무지해서도 안 된다. 쓴소리하기 전에는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미리 공부를 해야 한다.

오랫동안 교회에 발길을 끊었던 어느 가족의 딸이 갓 이혼한 뒤 깨어진 삶의 평화를 찾으려고 앞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모르고 내가 마치 교황이라도 된 듯 이혼에 관해 쓴소리를 늘어놓았던 때를 생각하면 정신이 어찔하다.

아, 여러 교인이 실직한 주간에 청지기의 희생적 삶에 대해 설교한 적도 있다.

나는 사람들의 잘못을 꼬집는 것만이 쓴소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모든 부모가 알아야 하는 중요한 것, 곧 비판을 일삼는 부모는 자녀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쓴소리를 해야 한다면 양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된 목자의 심정으로 해야 한다.

▲ [게티이미지뱅크]


분노와 애정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우들에게 쓴소리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말했다.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 자기(혹은 주님)에게 실망을 안긴 사람들에게 분통과 짜증을 터뜨리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바울의 말에서는 지극히 사랑하기에 애통하는 심정으로 글을 쓰는 인자한 아버지가 느껴진다.

바울의 쓴소리에는 솔선수범하는 자의 정직과 위엄이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직설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이것이 교우들의 유익을 위한 말이었음을 환기한다. “여러분 가운데는 교만해진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여러분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교만해져 있습니다…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하기 힘든 말인데도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이는 예리하고 깨끗한 칼을 들이대는 수술이다.

그는 이런 말도 한다. “내가 그 편지(쓴소리)로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말도 한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볼 때에, 여러분이 혹시 내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는 터놓고 말하면서도 그들을 품는 바울이 좋다.

바울의 말은 이것이다. “내가 화를 내는 것은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우들에게만 쓴소리를 한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하는 말을 들어보라.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그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노획물로 삼을까 조심하십시오.” 바울의 쓴소리를 다 살피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소설가인 엘리자베스 오코너는 학교 놀이를 하는 조카들의 말을 엿들은 적이 있다. 선생이 된 큰언니 리사가 말했다. “자, 얘들아, 부활절 토끼 따위는 없단다. 내 말 알겠니?” ‘학생’ 하나가 항의했다. “언니, 언니, 그런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가르치지 마.”
이것이 쓴소리에 관한 문제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대개 쓴소리를 듣기 싫어한다. 따라서 목사는 견고한 바탕에 서야 한다.

▲ [게티이미지뱅크]


견고한 바탕
우선 성경을 꼼꼼히 연구해야 한다. 자기 의견을 뒷받침하려고 성경을 뒤적거려선 안 된다. 성경을 연구할 때 물어야 할 물음이 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뭐라고 하는가? 성경에서는 누가 이런 문제를 겪었나? 까닭은 뭔가? 우리가 바뀌지 않으면, 또 바뀌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세대뿐 아니라 앞선 세대의 기독 사상가들의 깊은 성찰을 구할 때 설교자는 견고한 바탕에 설 수 있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했을까? 그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결론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어떤 이들은 쓴소리 때문에 화형을 당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실을 정확히 전하는 것이 견고한 바탕이란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설교자들은 라디오 방송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근거 없는 주장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남성의 62%는…, 교회의 84%는…, 미국인 40%는…”). 영혼을 수술하는 설교에는 정확한 사실이 필요하다.

견고한 바탕은 성찰하고 탐구하는 기도 생활에서도 나온다. 먼저 내가 사랑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살핀다. 지배나 처벌을 바라는 것은 아닌지 살핀다. 교인을 향한 하나님의 최선만을 구하는지 살핀다. 오늘날 교인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목사들이 드물다. 교인들을 일깨우는 건 기도밖에 없다.

견고한 바탕이란 내가 하는 말이 관심과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마음을 살피는 것을 뜻한다. 나는 교인들의 현실 생활과 압박을 충분히 알고 있는가?

어떤 사람이 두 목사의 지옥에 관한 설교를 듣고는 말했다. “한 목사님은 몇몇 교인들은 지옥에 갔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른 목사님은 가슴을 찢으며 아무도 지옥에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견고한 바탕은 언행일치를 요구한다. 교인들에게 쓴소리를 할 생각이라면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먼저 점검해야 한다. 나도 지키지 못하는 문제는 “나부터 시작해 우리가 모두 씨름하는” 문제임을 정직히 말해야 한다.

교인 대다수의 정치적 견해에 맞서는 것도 쓴소리다. 여러 도덕적·사회적 문제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집단을 차별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도 쓴소리다. 우리의 이익을 옹호하는 문화적 환경 때문에 기독교 운동이 건드리지 않는 수많은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것도 쓴소리다.

교회 안에서 외치는 쓴소리는 교인들에게 성경적 거울을 비추는 것이며 순결한 그리스도의 빛 앞에서 자기를 반성하고 거룩하게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지 말고 타인을 해치며 분열하는 짓을 그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 [게티이미지뱅크]


해야 할 말
나는 교인들이 어떤 문제로 분열하는 상황을 지적하는 설교를 해야 했던 적이 있다. 반목과 분열로 친목이 깨졌다. 거친 말들이 오가고 선량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날 태세였다.

나는 내가 겪었던 두 가지 사건을 꺼내며 설교를 시작했다. 우선 누구를 부당하게 미워한 일과 그를 용서하기까지 힘겹게 씨름한 일을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누구에게 미움을 받았던 일을 이야기했다. 미움을 받는 처지가 어떤 것인지도 설명했다.

교인들이 주목하기 시작하자 나는 조용히 말했다. “이런 일을 겪은 나로서는 오늘 여러분 각자가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나는 성경적 모범을 찾아 우리의 문제에 적용했다.

나는 설교를 마치며 똑똑히 말했다. “나는 오늘 내가 보고 들은 것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이제 (엄숙한 음성으로) 그만…두십시오…당장! 나는 나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여러분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서로 싸우지 마십시오.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런 일이 또다시 생긴다면 그땐 당사자에게 직접 책임을 물을 겁니다.”

디모데를 닮은 데가 많은 나로서는 쉽지 않은 설교였다. 하지만 문제는 며칠 만에 풀렸다.

어릴 적 버릇없는 행동을 하면 아버지는 벌을 주면서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네가 아픈 것보다 내가 더 아프단다.” 모순과도 같은 말이었다.

오늘 나는 그 말을 이해한다. 이것이 설교자의 심정이다. “쓴소리라면 강단에서 부드럽게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야 하는 자가 더 고통스럽다.”

이것이 디모데의 씨름이었다. 또 나의 씨름이었다. 당신의 씨름이기도 할 것이다. CTK 2011:5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는 〈리더십〉의 편집인이며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한국 IVP 역간) 등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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