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변화 큰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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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변화 큰 교훈
  • 고든 맥도날드
  • 승인 2019.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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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바꾸려하자 드러난 진실

 

 

 

사람이 처음 달에 발을 디딘 지 거의 35년이 됐다. 인간의 달 착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우리 교회에 소동을 일으킨 사건이기도 하다.
나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침례교도와 상의도 하지 않고 달 착륙 일정을 중부표준시로 일요일 저녁 7시 30분에서 8시 30분 사이로 정해버렸다. 그건 우리가 예배하고 있는 도중에 달에 착륙하겠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감리교도와 장로교도들은 당시에(어쩌면 오늘의 대다수 교회도) 달 착륙같이 역사를 바꿀 사건을 앞두고 일요일 예배 시간을 조정하는 것이 왜 어려운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위기였고 혁신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때였다.

당시의 화두는 ‘타당성’과 ‘우정 전도’였다. 방안을 찾던 나는 모험 삼아 그 두 가지를 적용해보기로 했다. 이웃과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TV로 그 역사적 사건을 함께 시청하며 전도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들떴다.

나는 집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두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내가 원했던 대안은 저녁 예배를 ‘취소’하는 것이었는데, 집사들이 반대하는 경우 예배 시간을 6시로 ‘조정’해서 교인들이 7시 30분까지 집에 가도록 할 생각이었다. 나는 우리가 인류 역사의 분기점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특히 아이들이 그것을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회의는 두 시간이나 이어졌다. 찬성부터 반대까지 반응은 전형적인 정규 분포 곡선을 그렸다. 좌우 극단에는 강한 찬성과 반대가 있었고 대부분 거북한 듯 가운데 몰려있었다.

돌이켜보니 그 회의는 이후 거의 모든 교회에서 벌어질 법한, 혁신을 놓고 벌이는 전쟁의 축소판이었다. 음악, 예배 형식, 신기술, 전도 방법, 소속교인의 의미, 공공정책에 대한 교회의 역할, 세상의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섬겼던 19세기 교회의 유산을 계승할지 말지를 두고 벌인 열띤 회의의 전조였다.

인류가 처음 달에 착륙하는 순간 저녁 예배를 취소할지 말지 논하는 역동적인 공방도 그런 열띤 토론의 하나였다.
 

                                                                                                                                              ▲ [게티이미지뱅크]


에버렛 로저스의 「개혁의 확산」(커뮤니케이션북스 역간)에 따라 회의 참석자를 나누자면, ‘혁신가’들은 예배 취소를 반겼다. ‘얼리어답터’들은 ‘혁신가’처럼 내 의견에 공감했지만 시간을 조정한 덜 급진적인 6시 예배를 택했다.

정규 분포 곡선의 반대 극단에 있던 ‘전통주의자’들은 위기를 감지했다. 그들은 두 대안을 모두 반대했고 그것은 자유주의로 떨어지는 첫걸음이라고 여겼다. 어떤 이는 내가 곧 여름철 저녁 예배 모임을 없앨 것이라고 예측했고, 또 어떤 이는 내가 앞으로 일요일 저녁 예배 자체를 없애리라고 여겼다.

마침내 전통주의자들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일요일 예배를 두 번으로 정한 ‘교회 정관’과 모든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 만약이라는 물음. 만약 갈급한 영혼이 그날 밤 교회를 찾았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다면?
그들이 말했다. “사람이 달에 가든 말든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묻어가길 바라는 중간의 ‘후기 다수자’는 내 의견에 공감했지만 문제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결정하기 전에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고 여긴 듯했다.

“목사님, 생각할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들은 배우자와 상의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누군가가 물었다. “나사가 달 착륙 시간을 정확히 교회 예배 시간에 맞춘 건 사탄의 계략이 아닐까요?” 이건 오랜 음모론의 하나였는데 나는 똑똑치 못했던 탓에 시간대가 다른 서부와 동부의 침례교도들은 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서부의 ‘해안가’ 침례교도들은 사탄이 타락시킬 가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농담이다). 다행히 나는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기억에 남을 그 회의를 솔로몬의 지혜로 마무리했다. 저녁 예배는 변함없이 시작하되 토끼 귀 모양의 안테나가 달린 TV 몇 대를 친교실에 가져다 놓기로 했다. 안내위원 한 사람만 중계방송을 지켜보다가 착륙 5분 전에 알려주면 예배를 잠시 중단하고 친교실에 가서 TV를 시청한 뒤에 다시 ‘본당으로 돌아가 예배를 마치기’로 했다. 놀랍지 않은가!

그래서 그날 밤 우리는 커다란 콘솔형 TV 몇 대를 교회로 가져와 친교실의 적소에 배치하고 NBC를 켜두고는 예배하러 갔다.

달 착륙은 연기됐다. 저녁 예배는 중단 없이 끝났고, TV들은 트럭에 실려 집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모두 집에서 가족과 친구들과 한자리에 모여 달 착륙을 지켜봤다.

집사들은 이를 우리의 신실함을 증명한 모두의 승리로 여겼다. 우리는 달 착륙도 보고 85년 역사의 저녁 예배도 지켰다.

우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분노와 상처, 혼란, 관계 단절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무 의미 없이 사람의 마음을 계속 쥐고 있던 관습을 버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모든 세대의 리더들은 스스로 혁신의 부담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전통에 질식해 죽어가는 예수님의 교회를 살리려는 메시아적 열정도 있었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단순한 동기도 있었다.

                                                                                                                                        ▲ [게티이미지뱅크]

모든 세대의 부담

변화경영을 젊었을 때 배웠더라면 큰 도움이 됐을 듯하다. 나는 비실용성과 비효율성의 문제를 파악하고, 관점과 행동의 변화를 위해 팀을 조직하고, 교인들에게 혁신적인 생각을 심어줄 수 있어야 했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젊은 목사들이 교회 개척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역사가 오랜 교회에는 암초가 많다고 여기는 듯하다.

내가 목회한 교회들은 모두 역사가 오랜 교회였다. 지금 일하는 교회도 역사가 185년이나 된다. 교인들이 오랜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서 변화는 쉽지 않다. 사랑하는 교인들을 바꾸려면 신뢰가 필요했다. 그들을 설득하려면 논리가 아니라 사랑이 있어야 한다. 멋진 생각, 열정, 타당성으로는 그들을 움직일 수 없다. 신뢰만이 그들을 움직인다.

돌이켜보니 나는 목회 초년생이었을 때 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추진했던 목사였다. 모든 회의의 주된 안건에는 변화와 관련된 문제가 있었다.

우리는(때로는 ‘혼자서’) 교회 정관에서 없어도 좋을 내용은 없애려고 했다. 여름성경학교는 일주일로 단축하고, 예배 모임 끝에 예수님을 영접할 사람을 앞으로 부르는 일은 목사의 재량에 맡기고, 친교실에서 커피를 대접하자는 멋진 생각도 했다.

새로운 제안마다 찬성과 반대가 뒤따랐다. ‘전통이 살아있는’ 교회를 찾아 떠난 사람들도 있고 떠나지는 않아도 교회가 남의 손에 넘어갔다고 뒤에서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대다수는 새로운 현실에 곧 적응했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

모든 변화에는 득실이 있었다. 나는 세월이 지나서야 이를 배웠다.

우리는 약 40년 동안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냈다. 지난 100년에 걸친 변화보다 더 빠르고 철저하고 반목이 잦았던 혁신적인 세월이었다. 누구 말대로 패러다임의 대전환이었다.

이 시기에 교회들은 찬송가를 파워포인트로 대체하고 오르간 대신 기타를 사용하고 성가대를 예배팀으로 바꾸었다. 이제 ‘동시대와 비전, 핵심역량’ 같은 말들이 목사들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도 바뀌었다. 우리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나는 지난날의 주일학교를 떠올린다. 평신도가 주도하여 학생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고 말씀을 암송하게 하고 성경 퀴즈 대회를 열고 개근상을 주던 시절.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1년 중 45주를 아이들 곁에 있고자 하는 어른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믿음이 자라려면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다. 45주 동안 빠짐없이 기도하고 준비하며 성실히 아이들을 사랑할 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공부해야 아이들이 성경 66권의 제목과 내용을 알게 된다. 이렇게 공부해야 수백 구절씩 말씀도 암송할 수 있다.

또 세대의 교류도 있었다. ‘예배 앞부분’에 유아부터 아흔 살 노인까지 모든 사람이 헌금봉투를 손에 들고 한자리에 앉아 찬양하고 공부하고 서로 생일을 챙기며 축하했다. 지금은 없다고 불평하는 공동체의 유대가 그때는 있었다.

나이와 취향에 따라 모임을 구분하는 오늘, 노인과 아이들이 어울릴 곳이 있을까? 혁신의 여정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교인들이 합심해서 기도하던 주중 기도 모임이 그립다. 우리는 어릴 때 거기서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근무시간 연장, 학교 행사, 지역사회 스포츠 프로그램에 밀려 기도 모임은 명맥이 끊긴 듯하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모임은 다양해졌다. 하지만 ‘기도하는 교회’라는 정신은 사라졌다. 단체 기도는 옛말이 된 것일까? 이것 역시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활기찬 찬양과 복음적 설교와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재능을 뽐내던 일요일 저녁의 예배 모임이 더 이상 없는 것이 아쉽다(어디 가서 내가 이런 소리를 했다고 말하지 않기를).

아, 가족들이 저녁에 집에서 쉬어야 한다는 것도, 저녁에 여러 모임이 있다는 것도 안다. 또 오후의 미식축구 경기가 저녁까지 이어진다는 것도. 하지만 선택의 결과가 무엇일지 염려된다.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혁신의 의욕으로 연례 선교대회도, 전도 프로그램도, 전교인 야유회도, 부활절 새벽예배도 사라졌다. 더 멋진 행사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나는 우리 혁신가들이 바꿔놓은 이 모든 것을 아쉬워하는 것일까? 늘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옛 방식을 폐기하기 전에 좋은 점도 있었다는 건 인정하자. 옛일을 돌아보는 노인을 용서하길 바란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혁신적 변화는 처음에는 서서히 시작됐지만 곧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새로운 세대의 혁신가들이 교계를 휩쓸고 있다.

이 모든 변화에 대한 우스갯소리를 아는가? 우리가 다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어디로? 옛 찬송가, 양초, 성찬기구(부디 십자가와 테이블, 강대상을 버리지 않았길), 강해설교로. 우리의 내일이 고작 ‘어제’라면 우습지 않을까?

                                                                                                                                        ▲ [게티이미지뱅크]

 

내일을 위한 물음들

다음은 부단히 혁신해온 40년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이다.

교인들은 늘었는데 정작 ‘예배’하는 사람은 줄었다. 우리가 찬양 예배라고 불렀던, 몹시 시끄러운 예배를 이제 사람들은 예배라고 부른다. 그런 예배는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아드레날린을 뿜게 하고 기분 좋게 만든다, 약 24시간 정도. 나도 그런 예배가 좋았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그게 예배일까?

오늘의 설교도 훨씬 더 나아졌다. 하지만 굳건하고 생각이 깊은 제자를 길러내고 있는지는 아직 대답할 수 없다. 영화 장면과 드라마를 곁들인 주제별 설교가 의미 있는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을까? 그러길 바란다.

출판과 영화를 비롯해 여러 분야에서 기독교 시장이 놀랍게 성장했다. 좋은 소식이다. 하지만 이 모든 말과 음악과 영상이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세계관 형성에 도움을 주고 있는지, 아니면 몇 사람의 돈벌이에 불과한지는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젊은 세대로 하여금 예수님과 동행하게 하는 일을 이전 세대의 사역자에 비해 록 뮤지션들이 더 잘했는지도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앞뒤 재지 않고 더 크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면서 새로운 프로그램과 흡입력 있는 방법으로 사람의 모든 필요를 채울 사역을 개발하고 적용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람과 결혼과 가족을 이끌었는지는 두고볼 일이다. 이 모든 혁신으로 우리의 공동체와 관계가 그리스도를 닮으며 성장하고 있는지 서둘러 알아봐야 한다.

오늘 기독교 운동의 놀라운 혁신은 눈이 부실 정도다. 새로운 교회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가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는 못난 사람만 목사가 됐는데, 이제 새로운 세대의 남녀들이 뛰어난 지성과 감성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믿음을 선포하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의문은 멈추지 않는다. 지난날 우리가 “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것 같아”라고 말했던 그런 거룩한 사람들이 지금도 있을까?

요즈음 기민하고 혁신적인 목사들이 영혼이 메마르고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기고 최신의 혁신을 좇는 데 지쳤다는 말을 자주 해서 걱정이다. 사역을 그만두는 목사도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과연 우리가 추구했던 혁신은 지속 가능한 것일까?

가장 염려가 되는 건 따로 있다. 우리가 혁신적인 교회를 세웠다고 자부할 때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 우리에게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다니 정말 아무것도 몰라”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그러면 더 나은 혁신의 경주가 다시 시작되는 셈이다. 어차피 혁신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든 화성에도 사람을 보낼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나를 닮은 젊은 목사는 리더십 회의를 열어 무슨 제안을 할까? CTK 2011:8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는 <리더십 저널>의 편집인이며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한국 IVP 역간) 등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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