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더십 > 유진 피터슨의 '영성의 길'
영적 건강을 위한 마가복음 처방
유진 피터슨  |  Eugene Pet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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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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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에 아내가 내게 「곰돌이 푸」(Winnie the Pooh) 이야기를 읽어 주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35년 전에 아내가 우리 자녀들에게 읽어 주었었고, 그러면서 내가 더러 엿들은 부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너무 늦기 전에 내가 그 이야기 전체를 직접 들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저녁 아내가 책을 읽어 주는 동안에 나는 우리 집 앞마당과도 같은 산에서 흐르는 물이 가을 햇볕을 반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매사가 칼로 자른 듯 명쾌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나는 기독교 영성 신학을 가르치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글을 쓴다. 그런데 그 세상이 마치 카메라 렌즈의 초점이 맞춰지듯 또렷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내 아내 잰은 이제 막 8장의 이야기를 마친 참이었다. 크리스토퍼 로빈이라는 남자아이가 천진난만한 동물들을 불러 모아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다 함께 북극을 찾아 나섰다.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모두가 매사를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벌어지는 두서없는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그 탐험에서 꼭 필요한 것을 하나씩은 기여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장소였고, 거기에서는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극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이가 하나라도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탐험을 제안한 크리스토퍼 로빈조차도 잘 알지 못했다.

탐험을 하는 도중에 꼬마 루가 시냇물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가 루를 구조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푸가 막대기[영어로 ‘pole’인데 North Pole(북극)의 ‘pole’과 철자는 같지만 뜻은 다르다―역주] 하나를 집어 들더니 그것으로 루를 건져 냈다.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나자 동물들은 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푸우는 손에 막대기를 든 채로 거기에 서 있었다. 그러자 크리스토퍼 로빈이 말했다.
 
“푸, 그 막대기(pole) 어디서 났어?”
푸가 자기 손에 들려 있는 막대기를 바라보았다.
“그냥 찾았어. 분명히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냥 주웠어.”
“푸”, 크리스토퍼 로빈이 엄숙하게 말했다. “이제 이 탐험은 끝났어. 네가 북극(North Pole)을 찾은 거야!”
“그래?” 푸가 말했다.

동물들이 한동안 두서없이 이런저런 말들을 하는데 크리스토퍼 로빈이 푸가 발견한 북극에 다시 주의를 기울이게 했다. 그들은 막대기를 땅에다 꽂고 거기에 크리스토퍼 로빈이 팻말을 달았다.

북극(North Pole).
푸가 발견함.
푸가 찾았음.
그리고서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잰이 그 이야기를 읽어 주는 동안에 내가 “보았던” 것은 모호하게 정의된 영성(북극)을 찾아다니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살고 있는, 내가 속한 문화였다. 이따금씩 그러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이 무언가를 집어 들면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바로 저거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정말로 “저것”처럼 보인다. 그러고는 누군가가(대개는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크리스토퍼 로빈 같은 인물이) 거기에다 팻말을 단다. “영성.” 그리고서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다음 번 탐험 제안을 받을 때까지.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영성”이라는 것에 끌리고 있다. “북극”을 찾아나서는 새로운 탐험이 이 나라의 거의 모든 곳에서 거의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 (동극과 서극도 가능한 선택 사항이다). 늦가을 저녁,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매우 사랑하고 흠모하지만 지금의 상태대로 내버려둘 수 없는 ‘등장인물’들을 여럿 발견했다. 사람을 끄는 그들의 매력을 하나하나 다 존중해 주고 싶지만 나는 또한 그들에게 북극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고 싶다. 나는 그들을 예수님께로 이끌고 싶다.

의미에 굶주리고 영에 목마르고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이 세상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근본적으로, 성경을 생명의 계시로서, 예수님이 규정하시고 창조하신 생명의 계시로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언제나 필요한 일이었지만, 오늘날 이 임무는 더욱 긴박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크리스토퍼 로빈과 그의 친구들, 특히 “뇌가 아주 작은 곰”인 푸와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모른 채 자신들의 온갖 잡다한 경험들로부터 만들어 낸 “영성들”이 범람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서 사람들을 모으시고 성경을 통해서 “북극”으로 가는 지도를 그려 주신다고 할 때, 마가복음은 그 어느 책보다도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기에 좋은 책이다. 성경 전체가 우리의 포괄적 텍스트이지만, 처음으로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기독교 영성의 기본 텍스트인 것이다.
 
복음으로 형성되다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기독교 복음서를 기록한 적이 없다. 그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가 기록한 복음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초가 되면서 이들 삶을 형성해 주는 글쓰기 형태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성경은 내러티브 형식으로 되어 있다. 성경의 거대하고 다소 산만하게 뻗어 있는 내러티브 구조 안에서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이야기는 우리 자신 밖의 어떤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만일 그 이야기가 진실하고 좋은 이야기라면,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성경의 이야기는 진실하고 좋은 이야기이며, 성경이 우리를 초대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과 축복의 세상이다.

이것은 고대 신화가 선호하는 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고대 신화는 우리를 초자연적 세계의 구경꾼으로 만들어 버린다. 성경의 이야기는 또한 도덕적 철학을 선호하는 현대의 방식과도 다르다. 현대의 도덕적 철학은 우리의 구원을 우리 자신에게 맡긴다. “복음의 이야기”는 (실재의 주체인 성육신처럼) 신성과 인간성을 동시에 지닌 실재를 언어로 설명해 준다. 그 이야기는 우리 자신이 관찰이나 실험이나 추측으로는 결코 고안해 낼 수 없는 무엇인가를 드러내 준다. 그리고 동시에 그 이야기는 우리를 참여시킨다. 결말을 잘 맺어야 할 책임을 우리에게 부과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그 이야기의 수용자이자 참여자로 끌어들인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의 영성에 대해 대단한 함의를 가지는데, 그와 같은 이야기의 형식 자체가 우리를 두 가지 주요한 일탈로부터 막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새롭고 색다른 천국의 오락거리를 보여 달라고 아우성치는 들뜬 관중이 되거나, 아니면 안달복달하는 도덕주의자가 되어 이 세상의 짐을 지고 힘겹게 바퀴를 밀고 나가는 사람들이 되기 쉽다. 복음서는 그 텍스트의 형식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단순한 구경꾼이 되거나 단순한 도덕주의자가 되기 어렵게 하는 반응들을 우리 안에 형성해 준다. 이 텍스트는 우리가 통달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통달당하는 텍스트다.

영성은 우리 자신의 영혼, 즉 우리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우리 삶의 보이지 않는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고유함과 영광을 포함한다. 영성은 참으로 놀라운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에 대한 우리의 첫 반응은 아마도 “모든 주님의 백성이 거기에 참여했으면!” 하는 감탄일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걸쳐서 이루어진 영성에 대한 인류의 경험은 이와 같은 우리의 열광을 상당히 누그러뜨리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영성이 그토록 놀라운 것이 아님이 판명된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들이 영성을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거나 아예 드러내 놓고 적대감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영성이 신경증으로 발전하고, 이기심으로 퇴화하며, 허세가 되어 버리고, 폭력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짧은 대답은, 우리가 복음서의 이야기로부터 벗어나서 우리 자신을 영성의 기본 텍스트이자 권위적인 텍스트로 삼을 때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스러운 텍스트로서 해석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복음서를 아예 내팽개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책꽂이에 꽂아 두고서 없어서는 안 될 참고서로 간혹 참고하면 그 책을 충분히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우리의 영성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놀랍고, 영광스런 존재이며, 소중한 영혼이다. 거룩함과 선함과 진리에 대한 당신의 열망은 대단하다. 그러나 당신이 영성의 내용은 아니다. 영성의 내용은 예수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이다. 당신에게는 읽고 연구하고 배울 텍스트가 필요하다. 그 텍스트가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당신의 기본 텍스트로서 우선 마가의 복음서부터 시작하라.”

그래서 우리는 그 텍스트를 펼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한다. 좀 이상한 이야기다. 우리가 이야기에서 흥미를 가질 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별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정말로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사실상 전혀 알 수가 없다. 예수님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없다. 예수님의 출신 배경, 친구, 교육, 가족에 대한 설명도 없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우리가 평가하거나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그의 감정과 내적 갈등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다.

어느 시점에 가게 되면 우리는 이 이야기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임을,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람이 예수님이기는 하지만, 마가의 복음서는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침묵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대면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이야기의 대부분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찾아내지 못하고, 우리 나름대로 예수님을 해석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우리 나름대로 해석하지도 못한다. 이야기로서 그것은 참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이야기다.

그러다가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우리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던 것에서 벗어나, 예수님께, 예수님 안에 계시된 하나님께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우리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던 것에서 벗어나 다른 대상, 즉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물론 그 이야기에는 다른 사람들도 등장한다. 많이 등장한다. 병든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 희생자들, 아웃사이더들, 친구들 그리고 적들. 그러나 언제나 예수님이 주체시다. 그 어떤 사건이나 사람도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과 별개로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모든 인생의 상황(context)과 내용(content)을 제공해 주신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본다는 의미의 영성은 사실은 (만약 성 마가의 의도대로 우리가 실천하기만 한다면) 예수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들여다보는 것이 된다. 이 텍스트는 그와 같은 인식과 실천을 하도록 우리를 훈련시켜 준다. 각 줄마다, 각 페이지마다, 오로지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영성에 내용을 제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내용은 우리에게 주어질 따름이다. 예수님이 그 내용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 텍스트는 그 어떠한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죽음
이 텍스트를 읽다 보면 우리는, 이야기 전체가 예수님 생애의 단 한 주간 동안 일어난 사건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곧 발견하게 된다. 그 한 주간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주간이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중에서 죽음이 가장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만약에 우리가 마가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가장 간략하게 말해 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대답은 그다지 믿음직스런 대답이 아니다. 특히나 자기 자신의 영혼을 양육하고 삶의 기준으로 삼을 텍스트를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열여섯 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처음 여덟 장에서 예수님은 살아서 여러 마을과 갈릴리의 뒷골목을 슬슬 다니시면서 사람들을 살려 내신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된 바로 그 시점에 예수님은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이 복음서의 마지막 여덟 장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지배하고 있다.

죽음의 선언은 또한 이야기의 속도도 바꾸어 놓는다. 첫 여덟 장에서는 이야기가 여유롭고 완만하게 진행된다. 그러나 죽음의 선언 이후에는 바로 예루살렘으로 직행한다. 긴박감과 무게감 그리고 목적의식이 이야기의 특징을 이룬다. 방향이 달라지고, 보폭이 달라지고, 분위기가 달라진다. 세 번이나 예수님은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자신이 고난당하고,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8:31; 9:31; 10:33).

그러고는 그 일이 일어난다. 죽음. 예수님의 죽음은 주의 깊게 그리고 정확하게 묘사된다. 예수님 생애의 그 어떤 일도 이렇게 자세하게 묘사된 바가 없다. 마가의 의도는 분명하다. 예수님 이야기의 플롯과 강조점과 의미는 바로 그의 죽음이다. 이 죽음은 신중하게 정의된 죽음이다. 그 죽음은 자발적인 죽음으로 정의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실 필요가 없었다. 그분이 자진해서 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동의하셨다. 그것은 우발적인 죽음이 아니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아니었다.

그 죽음은 희생적인 죽음으로 정의된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14:23-24 참고).

그리고 그 죽음은 부활이 동반되는 죽음으로 정의된다. 세 번에 걸쳐서 이루어진 명백한 죽음의 선언 모두가 부활의 진술로 끝을 맺는다. 복음 이야기의 전반적인 결말이 부활에 대한 증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죽음이 결코 제대로 된 죽음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익숙하게 대하는 죽음과는 상당히 다르게 정의된 죽음이다.

죽음에 대해 우리 문화가 가지는 태도의 특징은 비극(tragedy)과 지연(procrastination)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비극적 관점은 헬라 문화의 유산이다. 헬라인들은 비극적 죽음에 대해서 우아하게 기록했다. 거대하고 비인격적인 세력들의 작용에 사로잡혀서 종국을 맞이한 생명,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추구했지만 그와 같은 의도를 무산시키는 상황들, 인간의 영웅주의나 희망에 무심한 상황들에 말려서 종국을 맞이한 생명에 대해서 헬라인들은 기록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비극적이지 않다.

지연된 죽음은 현대 의학의 유산이다. 생명이 심장 박동과 뇌파로 축소된 문화 속에서 죽음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생명을 오로지 생물학적으로만 설명하고, 거기에 아무런 의미도, 영성도, 영원성도 부여하지 않는 문화에서 사람들은 죽음을 미루기 위해서, 지연시키기 위해서, 부인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지연되지 않았다.

우리는 마가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을 이해 함으로써 결국에는 우리 자신의 죽음도 예수님 이야기의 풍성한 차원과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문화에 대항하는 것이 중요하다.
 
금욕적인 것과 심미적인 것
마가의 텍스트 한가운데에는 내가 그 텍스트의 “영성”이라 칭하는 본문이 있다. 바로 8장 27절에서 9장 9절까지의 본문이다. 이 본문은 마가복음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어서, 그 복음서의 한 절반―갈릴리에서 여러 생명을 살린 사건들―이 한쪽에 대칭을 이루며 서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예루살렘과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가는 다른 절반의 이야기가 있다.

이 본문은 두 가지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나서면서 포기를 요구하시는데, 이 이야기는 영성의 금욕적인 측면을 제시해 준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다볼 산(Mount Tabor)에서 변모하시는데, 이 이야기는 영성의 심미적인 측면을 제시해 준다.
이 이야기들 양쪽 끝에는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라는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단언하는 말이 그 이야기들을 감싸고 있다. 한쪽 끝에서는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고 있고, 다른 한쪽 끝에서는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이 들려온다. 한쪽에서는 인간이 증언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성이 증언한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영성 신학을 하는 두 개의 대안적 방식이 아니라, 단 하나의 영성 신학 안에 있는 2박자의 리듬이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금욕적인 움직임과 심미적인 움직임이 서로 만나게 해준다. 영성 신학의 핵심에서 함께 작동하는 부정과 긍정인 것이다.
 
금욕적인 것.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정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간결하고 엄격하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 금욕적인 삶은 도상에서의 삶을 다룬다.

이 문장에서 튀어 올라 우리를 덮치는 동사는 “자기를 부인하고”와 “자기 십자가를 지고”다. 포기와 죽음. 그것은 마치 습격처럼, 공격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움츠러든다.

그때 우리는 이 두 개의 부정적 동사를 긍정적인 동사가 감싸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바로 “따르다”라는 동사인데, 이 동사는 처음에는 부정사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다. “누구든지 따라오려거든”이라는 말로 문장이 시작되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로 문장이 끝을 맺는다. 예수님은 지금 어딘가로 가고 계시다. 그리고 우리더러 같이 가자고 청하신다. 거기에는 아무런 적대감도 없다. 사실은 퍽 영광스럽게 들리기까지 한다. “따르다”라는 위대한 동사가 포기와 죽음을 요구하는 부정적인 동사에 영광의 빛을 드리운다.

진정한 영성 신학에는 언제나 강력한 금욕의 요소가 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충동과 욕구, 변덕과 꿈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죄로 인해 상당히 손상되어 있어서 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믿을 만한 인도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죽음을 지연시키고 죽음을 부인하는 문화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문화는 우상과 이데올로기의 힘을 입어 강박적으로 생명을 추구함으로써 오히려 생명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생명을 압축하고 축소한다.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부정법이라는 것, 즉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의 언어가 가지는 가장 인상적인 특징 중 하나다. 부정은 우리가 자유로 나갈 수 있는 길이다. 오직 인간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동물들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동물들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한다. 적절한 판단으로 제때에 표현된 부정은 우리가 눈먼 길을 가거나, 힘겹게 우회하지 않도록 막아 주고, 정신을 흐트러뜨림으로써 약해지게 하거나 유혹을 받아 신성 모독을 범하지 않게 해준다. 부정의 예술은 우리가 자유롭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게 해준다.

주의 깊게 마가의 텍스트를 따른다면 우리는 결코 금욕적인 것을 생명을 부인하는 일과 연관시키지 않을 것이다. 금욕적인 실천은 하나님인 체하는 자아의 소란스러움을 쓸어 버리고 성부, 성자, 성령이 거하실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만들어 준다. 이 세상 문화가 결코 알지 못하는 유의 죽음을 수용하고 그러한 죽음을 준비시켜 주고, 부활의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이것을 잘하는 사람 가까이에 있을 때면 우리는 그에게서 가벼운 발걸음, 민첩한 영혼, 즉각적인 즐거움을 알아보게 된다.

심미적인 것. 마가의 금욕 곁에는 마가의 심미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긍정이다.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자신들 앞에서 예수님이 산 위에서 모세 그리고 엘리야와 함께 구름의 밝은 빛 가운데서 변모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듣게 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9:7) 심미적인 삶은 산상에서의 삶을 다룬다. 이 이야기에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제자들이 경험한 것은 그리고 우리 자신이 경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름다움이다.

진정한 영성 신학에는 언제나 강력한 심미적 요소가 있다. 예수님과 함께 산을 오른다는 것은 우리의 숨을 멎게 만드는 아름다움과 맞닥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함께 머문다는 것은 그분의 영광을 찬찬히 바라보고, 예수님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율법과 선지자와 복음에 대한 세대 간의 방대한 대화를 엿듣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확언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때, 우리는 그 드러내신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변모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은 계시의 형상이시며, “이 형상 위로 빛이 비추이거나 이 형상 외부에서 빛이 비추이는 것이 아니라, 이 형상의 내부로부터 빛이 뚫고 나온다”(Hans Urs von Balthasar, The Glory of the Lord, vol. 1, p. 151). 빛에 대한 유일하게 적절한 반응은 눈을 떠서 빛을 발하는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흠모하는 것이다.

영성 신학에서 심미적인 충동을 느끼려면 우리의 인식을 훈련시켜야 한다. 예수님 안에 계시된 것을 좋아할 수 있는 취향을 습득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은 죄로 인해 둔해졌다. 이 세상은, 감각에 대한 과도한 찬사에도 불구하고, 가차 없이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며, 온갖 소음과 추함으로 감정을 말살시키고, 사람과 사물에게서 아름다움을 소진시켜 기능적으로 효율적이 되도록 만들며, 박물관이나 정원에 가둬 둘 수 있는 것을 제외한 심미적인 것들은 경멸한다. 우리의 감각이 하나님의 성령의 방문과 출현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반응할 수 있으려면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한다.

다섯 개의 감각 기관을 가진 우리의 육체는 믿음의 삶의 방해물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성은 영성의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가 영성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요한이 자신의 영적 체험이 가지는 진정성에 대해서 초대교회의 몇몇 그리스도인들을 확신시키고자 했을 때 그가 사용한 방법은 자신의 시각, 청각, 그리고 촉각을 동원하는 것이었다(요일  1:1). 편지의 서두에서 그는 자신의 감각이 증언한 바를 일곱 번이나 언급한다.
 
마가는 이 영광스런 긍정의 이야기를 자신의 엄격한 부정의 이야기 바로 곁에 배치했다. 그는, 그 이야기가 단순 명쾌하지만, 오해받기 쉽다는 것을 알았다. 금욕적인 도상의 이야기와 심미적인 산상의 이야기 모두에서 베드로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잘못된 것이었다.

도상에서 베드로는 십자가를 피하려 했고, 산상에서 그는 영광을 소유하려 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더 나은 계획, 그 누구도 불편함을 겪을 필요가 없는 구원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금욕의 길을 거부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복음서에 기록된 가장 엄중한 말로 그를 꾸짖으셨는데, 곧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이었다. 베드로는 산에다 기념비를 세우겠다고 제안함으로써 심미의 길을 거부했다. 그러한 제안은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의 일을 물려받아서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예배 방식을 마련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예수님이 보이신 반응은 그저 그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자주 잘못 가는 베드로의 성향을 보면서 우리는 방심하지 않게 된다. 세기에 세기를 거듭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꾸만 오해한다. 게다가 다양한 방식으로 오해한다. 성 마가의 텍스트 읽기를 게을리 하고 예수님의 무리를 떠날 때마다 우리는 오해하게 된다.

한 가지 더
마가는 하나님의 계시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 주기로 선택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전부 다 말해 준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에 온전한 동참자가 되도록 청함받았고 그와 같은 동참자가 될 수 있는 방법도 제시받았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속죄를 그저 받기만 하는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다. 우리는 참여자의 자유와 위엄을 가지고 예수님의 죽음을 죽고 예수님의 삶을 살도록 청함받았다. 우리 자신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성은 언제나 자기 몰두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다. 영혼의 문제에 너무도 골몰한 나머지 하나님은 그저 내 경험의 부속품 정도로 취급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영성 신학은, 무엇보다도 그와 같은 경계의 연습이다.

그러한 경계의 연습을 위해서 마가는 우리에게 기본적인 텍스트를 제공해 주고 있다. 마가복음의 중심에 있는 두 개의 이야기―도상의 이야기와 산상의 이야기―는 분명 예기(豫期, proleptic)의 이야기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기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금욕적인 부정과 심미적인 긍정에 우리를 담그고 훈련시키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결정적인 부정과 영광스런 긍정 안에서만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삶을 향해 우리가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내몬다. CT

Eugene Peterson, "What's Wrong with Spirituality?" CT 1998:7; CTK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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