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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있는 자여, 들리지 않는가?연구에 머물지 말고 들어야 할 말씀
유진 피터슨 인터뷰  |  Eugene Pet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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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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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은 언제 처음 ‘렉치오 디비나’를 접하셨습니까?
솔직히 말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어보기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렉치오 디비나’를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나는 시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시는 절대 빨리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많은 무엇이 그 안에 담겨 있으니까요. 리듬이 있고 운율이 있습니다. 시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야 그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학창 시절 나는 시편을 그렇게 읽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시편이 시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시를 읽으면서 성경 읽는 법을 배웠다는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보통 시는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열 번 또는 그 이상 읽어야하지요. 시는 귀로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렉치오 디비나’의 네 단계와 똑같습니다. 그 네 단계는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선형 계단에 가깝습니다. 계속 돌고 돌면서 이 단계로 돌아왔다가 저 단계로 넘어갔다가 하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유동적입니다.

그렇게 성경과 맺는 유동적인 관계가 목사님의 교회 사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교회에서 작은 그룹을 몇 개 만들었습니다. “성경 공부 그룹”이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어떤 이름에 ‘공부’(study)라는 단어를 넣으면 사람들은 그 모임의 목적이 정보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그것은 참으로 넘기 힘든 장벽입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 유진피터슨 ⓒLeadership Journal

어떻게 노력하셨습니까?더 이상 “성경 공부 그룹”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화 그룹”이라고 불렀지요. 우리는 성경과 함께 대화를 했습니다. 어떤 본문을 택해서 그 말씀을 들었지요.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로 본문을 읽었고 그 언어의 시를 들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소리와 메시지를 말입니다. 사람들이 생각을 나눌 때 나는 메모를 했고, 한 시간 정도 그렇게 하고 나서야 내가 마지막으로 몇 가지 주석을 들고 나왔지요. 나는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주석이 말하고 있는 것을 사실상 모두 밝혀냈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학문이라는 것이 세워놓은 철옹성을 부수려고 했던 겁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직접 성경과 부딪혀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은 주석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십니까?
아닙니다. 사전, 용어 색인, 주석은 모두 유용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직접 듣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적어도 기술적인 면에서는 말이지요. 성경은 거리의 언어, 일상의 언어로 기록된 책입니다. 대부분의 내용이 구두로 전해진 것이고, 문맹인 사람들에게 옮겨진 것입니다. 처음 성경을 받은 사람들이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모두 학문적으로 만들어버리면, 무엇인가를 잃게 됩니다.

왜 사람들이 성경을 성찰적으로(reflectively) 보지 않는 것일까요?
학교 제도 안에서 12년, 14년, 또는 18년을 보내고 나면 우리의 습관이 반(反)성찰적으로 형성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성찰적으로 만드는 것이 학교가 할 일도 아니고요. 우리는 정보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시험도 통과해야 하고, 읽기도 하고, 읽은 내용을 습득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찰적으로 읽고 듣는 것을 배워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목회자들이 회중에게 바로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배우고 가르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습이 필요합니다. 목회자들이 먼저 연습해야 합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그렇게 바쁘게 사는 것을 그만두어야만 합니다. 목회자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약속을 잡고 서둘러 회의를 하러 가곤 합니다.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제 생각에 목회자들은 가장 들을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말하고, 가르치고, 답을 주는 일에 너무도 익숙해 있습니다. 가만히 있고,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멈추고, 돌아가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듣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을 듣는 것하고만 상관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음성과 언어에 깔려 있는 뉘앙스를 들을 시간을 가지고, 우리가 들은 것을 되짚어서 말할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참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이 갈수록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개발하고 기술적으로 더욱 진보하면서 목회자들이 속도를 늦추고 듣는 것이 더욱 힘들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목회자들이 하지 않으면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목회자들처럼 기회와 소명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들은 이 사회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숙고하고, 듣는 임무를 받은 자들로 규명되는 유일한 집단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말씀에 기초한 영적인 기독교 문화의 일부입니다. 목회자들은 말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정보나 교리, 규칙으로써만이 아니라 말입니다.

목회자들에게 속도를 늦추고, 듣고, 성찰하도록 도전하면 반응이 어떻습니까?
그들은 내게 그렇게 살면 일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지금의 교회에 청빙받아 왔을 때 막 새로 시작하는 교회였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이 목사라고는 저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들은 내가 일하는 방식과 사역에 대한 나의 관점에 익숙했습니다. 10년 정도 지난 후 나는 이 나라에서 나를 고용할 다른 교회가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살아가고 일하는 방식을 받아줄 다른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듣기 위해 속도를 늦춘 목회자들을 상당히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한 친구는 다른 사역지로 청빙도 받지 않은 채 800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사임했습니다. 다른 교회의 청빙을 수락하는 기준으로 그가 정한 것이 100명이 넘지 않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선택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요.

목회자가 듣는 삶을 일구는 데 작은 교회가 더 도움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어떤 규모의 회중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반드시 그렇게 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시간을 기꺼이 따로 내야만 합니다.

 

목회자가 성경을 성찰적으로 들을 때 설교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하십니까? 

더 대화하는 설교가 되겠지만, 아마도 세련미는 떨어질 것입니다. 리젠트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어느 젊은 여성이 나를 찾아와 몹시 짜증을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사님은 강의 도중 세 번이나 20초 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시간을 재보았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저는 홍콩에서 왔는데, 홍콩에서는 선생님들이 쉴 새 없이 말씀을 하세요. 제가 내는 수업료만큼 얻어가고 싶다고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주 세련되고 효율적인 가르침을 원하는 사람들을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설교 시간에 메모를 하는 교인을 보면 설교를 멈추고 말합니다. “연필은 치우세요. 나는 여러분이 듣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문제 풀이하듯 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더디게 이뤄지는 일인데, 목회자들은 인내심이 별로 없지요.

바른 교리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엄격하고 분석적인 연구 대신 대화를 통해 성경을 접하게 되면 잘못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요?
목사로서 저는 신학을 감시하는 경찰이 아닙니다. 물론 오해가 있을 것입니다. 언어에는 오해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결혼 생활에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 얼마나 오해를 많이 합니까? 그러한 오해는 그들이 부정확한 문법을 구사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존중하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는 공동체 가운데 일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어리석고 이상한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신조와 신앙고백과 전통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자명한 오류들을 깨달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자원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LJ

Eugene Peterson,
"Having Ears, Do You Not Hear?" Leadership Journal 2009 겨울; CTK 2009:2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란 무엇인가?


성경을 접하는 다른 방식들과는 달리 고대의 기독교 관습인 ‘렉치오 디비나’(영적 독서)는 변화를 위해 성경을 읽는 방법이다. 한 번에 성경의 어느 책 한 권을 다 읽는 것처럼 많은 분량의 성경을 읽어야 하는 때도 있지만, 영적 독서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영적 독서는 넓이보다는 깊이에 관심을 가진다. 우리가 해석의 도구를 가지고 성경을 석의하는 성경 공부를 해야 하는 때도 있지만, 영적 독서는 본질적으로 ‘공부’(study)가 아니다. ‘렉치오’는 우리의 생각이 마음으로 “내려가도록” 하는 방법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생각과 마음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으로 이끌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목표는 몰입이다. 우리는 자신이 살아가고 숨 쉬고 교류하는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 ‘렉치오’는 우리를 하나님의 깊고도 무한한 물에 잠기게 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의 유한한 삶으로 더 많이 흘러들게 한다.
비록 표현이나 강조점에서 차이가 나는 여러 가지 변이들이 있지만, ‘렉치오’의 고전적 형태에는 네 가지 요소가 있다. ‘렉치오’(듣는 영혼을 가지고 읽음), ‘메디타티오’(meditatio, “듣는 것”을 숙고함), ‘오라티오’(oratio, 그 들음에 대한 반응으로 기도함), 그리고 ‘콘템플라티오’(contemplatio, 우리의 삶으로 가져갈 것을 관상함)가 바로 그것이다. ‘렉치오’의 이 기본 요소들을 듣기, 숙고하기, 기도하기, 순종하기로 표현할 수도 있다. 이 요소들이 결합되면―직선의 방식보다는 원형의 방식으로 이 요소들이 서로 겹치고 섞이기 때문에 결합의 순서는 상관이 없다―인간의 영혼을 성령과의 역동적인 상호교류로 이끌게 된다.

(리처드포스터의 Life With God : Reding the Bible for Spiritual Transformation(HarperOne, 2008)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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