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의 평화를 흔드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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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의 평화를 흔드실 때
  • 플레밍 러틀리지 | Fleming Rutledge
  • 승인 202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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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는 기독교 복음을 이해하고 제시하는 두 가지 필적할 만한 방법이 있다. 이 두 방법은 똑같이 효과적이어서 상호 보완토록 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둘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다.

예컨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순수하게 개인 구원의 문제로 강조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공동체와 사회 정의 실현의 맥락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의 문제는 부분적으로는 문화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좀더 중요한 원인은 성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 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우파와 좌파, 양측의 미국 그리스도인 모두 성경을 개인이 아닌 공동체적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예를 들어, 주류 교회의 가르침에는 "성경 또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근본적인 확신이 빠져 있을 때가 더러 있다.

주류 교회의 예배도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배합시다"라는 말로 시작하겠지만, 실상 그 예배는 인간 본성에 내재된 가능성을 경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류 교회에서는, 초월적 능력은 무의미한 것이며, 여기서는 "통합"(inclusion)이라는 말이 더 의미 있는 단어다.

반면, 미국 복음주의 및 오순절파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특정하고 제한적인 범주에 집중한다.

누가 무슨 중독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는 이야기(한때 유행한 바 있다)처럼, 개인이 특정 죄에서 구원을 얻은 사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특정 신체 질병에서 치유된 사례나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에 열광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복음주의-오순절파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으로 선포할 때가 많은데, 바로 이 점이 자유주의와 복음주의가 공유할 수 있는 시각이다.

학계는 언젠가부터 성경을 이성적 관점에서만 해석하던 자세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 사탄의 존재를 전제한 신약의 세계관을 새롭게 인정하는 자세도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신-윤리적(theo-ethical) 사고를 만든다.

첫째, 이 시각은 그리스도인들이 대적을 그들 안에 있는 악이 아니라 어떤 외부의 세력에 사로잡힌 이들로 간주하도록 한다. 이러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과 백인 모두 구원이 필요하다는 일관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둘째, 세계의 사건들 속에서는 실제로 악의 세력이 활동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세계관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의 구원의 이야기들에서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위대한 사회 운동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찾게 된다.

그렇지만 이 공통의 관점이 지닌 잠재력은 어떤 신학적 이유들 때문에 아직도 미국 교회의 예배와 실천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수정주의적 프로젝트와 사도적, 성경적 신앙의 우선적인 차이는 개인적이냐 사회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주의와 정통주의의 차이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관해 이야기할 때다. 성경적 선언은 하나님은 당신의 선한 창조 세계가 반역할 때 당신의 아들을 파견하시어 대적으로부터 창조 세계를 탈환하신다는 삼위일체 창조주 하나님을 말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이것이 핵심 신념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를 '경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더욱 이해하기 쉽고 설득력 있다는 자유주의의 신념과는 달리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무기력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사회 운동에서도 개인적 중생에서도 초월적 차원에 기대지 못했다.

자유주의적 관점과 성경적 관점의 차이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늘의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느냐에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초자연적 대적을 묘사하는 신약 성경과의 연결점을 발견하게 된다.

인류에게는 이 대적을 이길 자원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갖고 계실 뿐이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사탄의 군대를 제압하신 하나님의 승리를 본다. 이 승리는 개인적 맥락과 사회적 맥락 둘 다로 해석할 수 있고, 또 해석해야 한다.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그리스도인들이 동시에 둘 다를 볼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시야를 넓히라

성경적 신앙 안에서 이 두 간극이 연결된 일화가 있다. 체코 신학자 얀 로흐만(Jan Lochman)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가 가르쳤던 스위스 바젤의 어느 모임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내게 들려준 적이 있다. 한번은 예배 모임에서 아모스서의 유명한 구절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을 읽게 되었다.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이 구절은 너무나 익숙하고 널리 알려진 구절이라서 마치 격언처럼,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리라는 기대 없이 이런 저런 문맥에서 인용되었다. 그러나 이 구절이 그날 바젤에서 읽혔을 때,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매일의 사건 바로 한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로흐만은 미국인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 "동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움직임은 마치 미시시피 강의 물살이 엄청난 힘으로 흘러 내려가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이 이 물살을 일으키시자, 사람들이 자유와 존엄성을 외치게 된 것이다. 

우리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행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 우리에게는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이 1950년대와 60년대 민권 운동의 한가운데서 역사한 단적인 사례가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역사가 지금은 개인 구원에만 관련된 복음 이해와, 공동체 구원에만 관련된 복음 이해로 나뉜 슬픈 사례가 되어 버렸다.

이 시대에(또는 그 어떤 시대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낸 가장 중요한 증거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민권 운동에 대한 백인 복음주의 교회들의 관심과 지식은 놀랄 만큼 부족하다. 자유주의 교회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긴 하지만, 문제는 이 교회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그 운동을 신학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저항하는 자리에-농성의 현장에, 대중 집회에, 그리고 행진에-하나님이 움직이고 계신다는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열렸던 어느 대중 집회를 녹음한 테이프 하나가 리버사이드 교회에 보관돼 있다. 남부에서 온 어느 유명 인사가 시위 참가자들에게 이렇게 격려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서 위대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자 이런 외침이 되돌아왔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런 저런 위대한 해방 운동들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운동들을 "통합"이라는 단 하나의 초라한 단어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운동들을 하나님이 은밀히 행하신 능력으로 해석했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동유럽 개신교회의 소규모 성경공부 모임들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 공동체들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많은 교회들이 행한 저항 운동들에서,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에서 세상을 뒤엎는 능력이 되었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폴란드 공산 정부가 계엄령을 내린 1981년 12월 11일 밤, 레흐 바웬사는 탱크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바로 지금, 당신들이 진 것이오. 당신들 스스로 당신들 관에 마지막 못질을 하고 있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주교만큼 우리 시대에 하나님과 성경의 힘에 의지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암흑기에, 이 조그만 몸집의 흑인은 보이지 않는 군대가 그를 호위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살았다. 비자는 늘 거부됐고, 유혈 혁명 없이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비폭력 투쟁을 벌이던 어느 날, 투투 주교는 수많은 시위자들과 함께 정부 관료들을 만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성당 담 앞에 정렬한 경찰들이 경계의 눈초리로 회중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투투 주교는 설교를 시작했다. 설교 도중에 투투 주교는 갑자기 경찰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당신들은 이미 졌습니다!"  "당신들은 이미 졌습니다! 이쪽으로 와서 승리의 편에 서시오!" 그날 누가 자유인이었고 누가 매인 자였는지 굳이 묻지 않겠다. 하나님은 사슬을 끊어버리시고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다.

이 사건들 가운데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셨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유럽을 해방시킨 영웅담들과는 달리-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이 이야기들을 알고 있는 이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심지어 알려졌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들은 종종 신학적 토대로 해석되어 왔다.  "당신이 잘못 생각한 겁니다. 당신은 성경이나 하나님의 능력에 관해 아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동정을 넘어 행동으로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 대다수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에 매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개인 구원을 강조하는 경향이 우리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것은 공동체적 이해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치부되어 두 관점은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주류 교회에서는 사회적 행동(social action)이 복음과 영적 활력을 주변으로 밀어내었고, 반면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사회적 행동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무지와 혼동이 존재한다.

심지어 어느 목사는 자기네 교회가 노숙자들에게 샌드위치를 나누어 주는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행동'을 하고 있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할 정도다. 물론 이런 활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사회적 행동이라고 볼 수는 없다.

얼마 전에 나는 볶음 요리를 하려고 닭을 썰다가 손을 베었다. 관절염으로 엄지 손가락에 부목을 대고 있던 탓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시장에서 닭뼈를 발라내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반복적인 업무의 특성상, 칼에 베이거나 손목 관절 통증 같은 것에 자주 시달린다. 이러한 사람들은 더 많은 지원, 더 많은 휴식 기간, 더 나은 건강 보험, 그리고 수술 이후에도 작업장으로 복귀할 수 있는 더 좋은 근로 복지가 필요하다.

이들의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무엇일까? 작업장을 찾아가 샌드위치를 나누어 주는 것도 물론 마음의 위로가 되는 일이겠다. 그러나 사회적 행동-곧, 고용주들과 입법 기관을 겨냥한 행동-이 없다면, 그들에게 효과적인 도움은 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소외된 노동자들과 노숙자들을 돌보신다는 사실에 분명히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의 복음은 우리가 동정을 넘어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곧 공장의 근로 조건이나 노숙자를 양산하는 근본 원인을 논의할 만큼 크게 자라지는 않았다.

신학적으로 생각한다면, 회사 고용주들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죄인이고 노동자들은 결백한 피해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악한 세력이 권력을 쥔 사람들을 어떻게 유혹하여 아랫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외면케 하는지 알고 있다.

이 불의한 상황 속에 있는 고용주들은 그들 스스로가  악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노동자들을 조금은 생각한다 하더라도, 이윤에 대한 욕구에 매여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길 뿐이다. 누가 악한 세력과 권력자들의 결속을 끊을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착수된 사회적 행동은 사회 운동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뿐 아니라 고용주 역시 자유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4:5; 5:6)을 아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시각이다.

언론에서 자주 보도되다시피, 최근 고무적인 발전 양상은 복음주의가 행동 반경에 대해 좀더 넓은 시각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몇몇 복음주의자들이 2007년 "고문을 반대하는 복음주의 선언서"에 서명하였고, 릭 워렌 목사는 빈곤의 근본 원인에 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또 몇몇 교회 지도자들은 지구 온난화의 위험성을 인정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움직이고 계신다는 증거다.

이들이야말로 진실로 사회 일반이 기독교에 주목하게끔 하는 증인들이다. 물론 지금까지 복음주의가 이끌어 온 성적(性的) 경건 운동 역시 그리스도인의 제자됨을 보여 주는 중요한 지표다. 그러나 이것만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싸우라고 명하신 유일한 전쟁터는 아니다.

윌리엄 윌버포스처럼 진정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회적 행동을 한 영웅들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또한 다수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사용하고 결속시키셔서 더 많은 대적의 요새-인종 차별, 빈곤, 환경 오염, 열악한 교육 환경, 성 매매, 부적절한 의료 보험 시스템, 교도소 내 범죄, 정치 부패, 그리고 테러리즘까지-를 무너뜨리신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대적을 쓰러뜨릴 행동을 감행하지 않는다면, 독생자를 통해 단 한 번에 대적을 쓰러뜨리신 하나님의 십자가의 위력을 세상이 의심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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