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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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 안점식
  • 승인 2019.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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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종교의 수행 방법과 요가 그리고 섹스
   

복음주의 교회는 ‘영혼’ 구원을 강조해왔다. 그렇다면 몸은 어떤가? 몸은 영혼을 담기 위한 그릇에 불과한가? 몸은 구원의 대상이 아닌가? 몸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은 인간의 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모든 종교와 사상들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려고 애써왔다. 인간의 몸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논의도 포함된다. 인간의 몸을 무엇이라 이해할 것인가? 인간의 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는 이 물음을 던지는 종교와 사상들의 세계관이 녹아있다. 또한 많은 종교와 사상들은 인간의 몸을 실천과 수행의 주체이자 도구로 중요하게 활용해왔다.

인간 존재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이 물음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 중 근본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기氣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을 일원론적으로 본다. 만물은 기로 되어 있으며 인간도 역시 기로 이루어져있다고 파악한다. 인간의 정신적인 면이든 육체적인 면이든 모두 기다. 마음도 기로 되어있으며, 심지어 소위 영적 현상도 기의 운동과 변화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정精, 기氣, 신神은 모두 기의 다른 형태, 다른 차원을 이르는 것일 뿐이다.

불교도 인간을 일원론적 틀 안에서 본다. 영원불변한 속성과 본질을 가진 독립적 개별적 실체는 우주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으로 되어 있는데 색은 육체적 요소이며 수상행식은 정신을 구성하는 요소다. 그러나 인간 존재도 원인과 결과의 법칙[緣起法]에 따라 복잡하게 얽혀서, 부단히 변화하는 우주적 흐름 가운데 잠시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임시적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은 윤회하고 있는 중생衆生 중 한 카테고리일 뿐이다.

유물론자들, 세속주의적 인본주의자들에게 인간은 곧 인간의 생물학적 몸 그 자체일 뿐이다. 정신적 면이나 영적인 현상도 결국 인간의 몸이 만들어낸 생화학적 결과에 불과하다.
 

나눌 수 없는 인간

그렇다면 기독교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는가?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도 하나님 형상을 반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의 외연이 인간처럼 생겼다는 뜻은 아니다.

기독교에서 던지는 ‘인간 존재의 구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인간의 몸을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을 구성하는 전체에 대한 논의와 연관된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라는 두 가지 실체로 구성되어있는 전인적 존재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영적 기능과 혼적 기능이 있다.

영과 혼은 인격적 실체를 강조하기 위해 종종 구분하지 않기도 하지만, 기능 면을 언급할 때에는 구분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pneuma과 혼psyche의 개념이 따로 있는 것은 그 쓰임에 다른 면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두 개념을 전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가진 동의어로 보기는 어렵다. 한편 용어가 다르다는 것만으로 영과 혼이 실체적으로 다른 구성 요소임을 보장할 수는 없다.

인간을 전인으로,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 보는 시각은 영靈-육肉, 성聖-속俗을 나누는 이원론의 함정을 벗어나는 데 중요하다.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실체는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 요소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원리를 따라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전인적 존재로 봐야 한다.

 

여러 종교의 수행 방법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선先이해를 바탕으로 몸의 사용에 대해 살펴보자. 몸의 사용에도 세계관적 전제가 있다. 대다수 종교들의 수행법은 종종 적극적인 몸의 사용을 포함하고 있다. 수행법은 그 종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관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종교들의 수행법은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조심법調心法, 조식법調息法, 조신법調身法으로 구분했는데, 이는 유용한 분류법으로 보인다. 곧 모든 수행법은 마음 통제술mind control, 호흡 통제술breath control, 신체 통제술body control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조심법은 마음, 즉 혼적 기능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라쟈raja 요가나 참선이 이에 해당한다. 조식법은 단전호흡 등과 같은 호흡법인데, 호흡은 심신상관적psycho-somatic 존재인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연결하는 고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다수 종교들이 수행법으로 호흡법을 발전시켜왔다. 조신법은 신체를 다루는 것으로서 하타hatha 요가나 기공 체조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체로 조심법이나 조신법이나 호흡법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타종교들의 수행법들은 영의 기능에서 출발하지 못한다. 영의 기능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다. 오로지 기독교만이 영에서 출발하는 수행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관계할 때만 인간은 진정으로 영적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역설적이지만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 맺도록 되어있는 존재다. 모든 생물들 중에 인간만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관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만이 영적 기능을 부여받은 영적 피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고 영이 죽었다. 그것은 실체적 죽음이 아니라 기능적, 관계적 죽음이다. 타종교가 영의 차원에서 수행할 수 없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영이 죽었기 때문이다.

 

올바른 의식 상태 vs 올바른 관계 맺음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올바른 인간 존재 상태를 추구한다. 범신론적 종교들은 올바른 존재 상태를 올바른 의식 상태로 간주한다. 올바른 의식 상태는 종종 깨달음, 각覺, 해탈moksa, 열반nirvana 등으로 표현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 화목하지 못한 타종교의 수행법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마음과 호흡과 몸을 통제해서, 평상시와는 다른 어떤 의식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종종 황홀경, 무아경, 삼매경, 몰아경 등 변성의식trance을 수반한다.

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올바른 존재 상태는 올바른 관계를 맺은 상태다. 하나님 형상을 가진 인간은 모든 관계 중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타락 사건, 곧 원죄의 본질은 반역이다. 그것은 우주의 주권자이며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반란 사건이다. 본질적으로 관계를 깨뜨린 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화목이 중요하다. 따라서 기독교의 수행법은 모두 관계적이다. 순종, 회개, 기도, 말씀 읽기, 성령 충만 등 모든 것이 관계적이다. 종교들은 평안, 자유, 기쁨, 해방 등을 나름대로 추구한다. 이것들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에덴동산에서 누렸을 것들이며, 또한 우리가 새 예루살렘 성에서 누릴 것들이다. 그러나 타종교들은 이것들을 의식, 호흡, 몸의 통제를 통해서 이루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배제한 상태로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가는 괜찮은가

이런 인식의 틀을 가지고 몸의 사용과 관련한 쟁점을 두 가지만 다루어보자.

우리는 오늘날 성행하는 요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단순히 건강해지기 위해 요가를 해도 되는 것인가? 요가는 일반은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요가가 힌두교의 수행법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기원이 힌두교이기 때문에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타종교의 수행법 안에도 부분적으로 일반은총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한국에서 성행하고 있는 요가의 70~80퍼센트는 하타 요가다. 하타 요가는 생리적 요가이며, 일종의 조신법이라고 할 수 있다. 라쟈 요가(명상 요가)의 경우, 우주와의 합일, 신과의 합일, 자기실현을 추구한다. 쿤달리니 요가는 몸 안에 우주적 힘인 샥티shakti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를 활성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요가들은 범신론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하타 요가는 어떤가? 물론 하타 요가도 스트레칭이 궁극적 목적은 아니다. 본래 하타 요가는 라쟈 요가를 수행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서 신체의 이완, 균형, 강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 하타 요가는 호흡법을 동반한다. 여기서 호흡은 단순히 산소 호흡이 아니라 프라나prana(기와 비슷한 개념) 호흡이다. 기나 프라나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생명력, 힘과 같은 개념으로서 역시 범신론적 세계관을 지탱하기 위해 활용되어 왔다.

오늘날 요가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으나 정통 요가에서 벗어난 변형된 형태가 많이 있다. 이런 것들은 정통 요가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지탄받는다. 그러나 오히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정통 요가에서 벗어날수록 안전하다. 정통 하타 요가에서는 고급 수행자가 될수록 라쟈 요가로 인도 받는다.

요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기 때문에 싸잡아서 ‘된다’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몇 가지 원칙을 세울 수 있다. 우선 우주와의 합일,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명상이 포함된 요가는 안 된다. 산소 호흡을 넘어서 프라나 호흡을 강조하는 요가는 안 된다. 요가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단순히 신체의 스트레칭이라면 오히려 허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요가 동작들에 범신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의미가 부여된 것은 안 된다. 비록 ‘크리스천 요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고 해도 이런 내용이 포함된다면 그것은 혼합주의일 뿐이다.

그러면 이런 것을 포함하지 않은 요가는 괜찮은가?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고전10:23)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여전히 덕의 문제가 남는다. 비록 내 양심에는 문제가 없지만 요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기독교가 범신론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요가를 허용하는 것으로 오해를 살 가능성이 높다. 요가 외에도 건강에 유익한 좋은 운동은 얼마든지 있다.


 

성생활은 영적 생활과 무관한가

다음은 성性의 문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인간은 성적 존재로 지음받았으며, 인간의 몸은 남성의 몸과 여성의 몸으로 구분된다.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하는 영적 존재로 지음받았다면, 성적 인간도 영적 존재인 것이다. 성은 영적인 것과 무관하게 단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쾌락의 선물만은 아니다. 성을 영적 삶과 무관하게 이원론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부 생활은 영적 생활, 일상생활, 성생활이라는 전인적 삶의 연속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서 영적 하나 됨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성은 신자의 영적 연합에 기초해야 한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아야 한다(고후6:14). 참으로 영적 교제를 통해 하나로 연합되었을 때 진정한 친밀감이 발생한다. 그 다음은 일상생활, 곧 삶의 연합이다. 그러므로 일상적 삶의 공식적 연합인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육체적 연합은 간음이다. 성생활은 관계성, 친밀감의 종결자다. 성생활은 하나 됨의 궁극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성적 연합은 결혼할 때까지 미뤄두어야 한다.

연합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창2:24). 한 몸은 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 곧 생명의 연합이다. 생명은 영, 혼, 육의 기능을 모두 포함한 전인적 현상이다. 그러므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영적 연합에서 출발해서 일상적 삶의 연합을 통해서 육체적 연합으로 완성된다. “생육과 번성”(창1:28)은 생명의 전인적 연합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성의 핵심은 관계성이다. 성에서 관계성을 제거하고 성으로 영적 차원을 대체하려고 하면, 성을 통한 수행법들, 예컨대 도교의 방중술房中術이나 힌두교의 탄트리즘tantrism으로 나타날 것이다. 성에서 관계성을 제거하고 성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면, 온갖 형태의 변태적 성욕으로 나타난다. 또 성에서 관계성을 제거하고 생식 차원만 강조하면, ‘씨받이’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는 “생육과 번성”이 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것이다.

성적 즐거움의 본질은 친밀성의 구현에 있는데 이전 단계들을 무시하고 쾌락을 추구하므로 만족이 안 되고 결국은 여러 가지 변태적 성행위를 야기한다. 상대방을 인격적 교제의 주체가 아니라 쾌락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관계성이 결여되고, 따라서 진정한 친밀감도 결여된다. 친밀감 없는 성은 보잘 것 없고 진부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쾌락을 원하게 되고, 폭력적이고 병적으로 변한다.

 

몸을 회복하기

그리스도인에게 몸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먼저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기 때문에 생령이 되었다(창2:7). 몸은 나와 타인을 구분 짓는 첫 번째 외적 표시다. 몸은 나의 정체성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의 전이며(고전6:19) 부활 때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될(고전15:44) 그 몸이다. 인간 삶의 실천과 실행은 결국 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적 예배도(롬12:1) 우리의 몸이 살아내는 삶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몸은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롬6:13) 할 몸이다. CTK 2011:10



안점식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했으며, 그 후 합동신학교와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TEDS)에서 공부했다. 현재는 합동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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