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해지고 실망하고…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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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해지고 실망하고…아직은…
  • 존 쾨슬러
  • 승인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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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에 미리 실망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스스로 돈을 모아 처음으로 산 것은 바로 장난감 잠수함이다. 시리얼 상자 뒷면에서 그 잠수함을 보았을 때 ‘어찌나 생생하던지’ 진짜 잠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베이킹 소다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이 작은 잠수함은 욕조는 물론 바다도 자유자재로 항해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몇 주 동안 용돈을 모아 장난감 잠수함을 주문했다. 그리고 드디어 장난감이 든 우편물이 도착했다. 나는 잠수함 밑 별도의 공간에 베이킹 소다를 넣은 뒤 물에 띄웠다. 잠수함은 즉시 물에 가라앉았다. 우아하게 잠수한 것이 아니라 그냥 첨벙 빠졌다. 베이킹 소다가 물에 녹기 시작하자 물 표면으로 거품이 떠오르더니 잠수함이 불쑥 솟구쳐 올라 앞뒤로 까딱거렸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가라앉았다. 신기해 보였지만 기대에 비해 너무도 볼품이 없었다. 싸구려 플라스틱 장남감에 모은 돈을 낭비했음을 깨닫자 실망감이 엄습했다.

차차 나이가 들면서 장난감 따위로 마음 상하는 일은 없어졌다. 그러나 삶에서 느끼는 실망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장난감 대신 내가 하는 일이나 인간관계에서 여전히 같은 경험을 한다. 이를테면 보다 복잡해진 어른용 장난감 때문이라고나 할까?

내가 하는 일이 때로는 사역조차 고역 같을 때가 있다.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항상 사랑으로 반응하지는 않는다. 그러려니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나도 불친절하게 대할 때가 있다. 내 딴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마음으로 뭔가 대단한 일을 결심하기도 한다. ‘하나님께 큰 보답을 기대하고 큰일을 벌이지만’ 결과는 내 기대에 못 미친다.

 


지나친 기대

나는 이제 더 이상 실망하거나 놀라지 않는다. 우리는 기대가 지나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약속을 하고 쉽게 어기는 이 세상의 공통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과장’(lingua franca)이다. 광고는 샴푸만 바꿔도 이성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라고 속삭인다. 술을 마시면 인간관계가 부드러워진다고도 말한다. 광고 속 차를 사기만 하면 모험 가득한 인생이 열릴 것처럼 말한다. 광고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의 삶이 훨씬 더 나아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들은 궁극적 완성을 끊임없이 퍼뜨리고 다닌다.

미디어 비평가 진 킬본은 이렇게 꼬집었다. “광고의 문제점은 인위적으로 인간의 욕구를 만들어내는 데 있기보다는 실존하는 인간의 욕망을 악용한다는 데 있다. 사실 우리는 광고를 그대로 믿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 예컨대 특정 브랜드의 시리얼을 구매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다만 광고는 우리 안에 내재된 욕망을 자극해서 굴레를 씌워버린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약속하는 광고에 마음이 붙잡히는 것이다.” 광고는 또한 우리 삶을 따분하고 평범하게 그려냄으로써 나르시시즘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킬본은 지적한다. 그들은 우리의 본능적 욕구를 부당하게 이용하는 한편 우리의 불만을 극대화시키고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갖게 한다.

매디슨 애비뉴(유명 광고회사와 방송국이 집결한 뉴욕시의 ‘광고 거리’/역주)가 허황된 꿈을 품게 하는 원흉이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광고는 문화를 창출하지만 동시에 이 시대를 반영한다. 늘 그러하듯 미국인들은 대체로 낙관주의자다. 그러나 가끔씩 그 도가 지나쳐 병적일 때가 있다. 한 예로 노래를 잘하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수의 꿈을 품고 ‘아메리칸 아이돌’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시즌마다 지원한다. 본선 진출에 실패한 참가자들은 그제야 자신을 돌아보고 충격을 받는다. 의도는 선하지만 방향을 잃은 열정으로 부모와 교사들은 자기 확신이 없는 한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면서 아이들을 다그친다.

교회 역시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본주의 특유의 낙관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인간 본성의 선함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기독교 이단/역주)의 행동윤리를 결합한 신학이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그 결과 처음에는 자아도취적 영성이 독성을 내뿜다가도 어느 순간 실용주의로 바뀌고 이내 무덤덤해진다. 이런 현상은 상처도 없고 흉터도 없는 매끈한 기독교를 낳고,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예리하게 다듬어진 영적 감각들을 무디게 만든다. 노스탤지어와 값싼 감상주의가 조나단 에드워드의 ‘애정의 영성’을 대신하다보니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마저 왜곡한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던”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히 11:13). 그들의 사고 속에는 “예수 따라가며” 의 가사처럼 “해를 당하거나 우리 고생할 때 주가 곧 없이 하시겠네” 와 같은 세계만 존재할 뿐이다. 즉 하나님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그 앞길에 어둠을 두셨던, 욥과 같은 사람이 차지할 자리는 전혀 없다(욥 19:8). 주의 목적을 위해 주께서 나를 속이셨고 나를 이겼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예레미야의 심정을 대변하는 어휘는 아예 없다(렘 20:7).

기독교 수련회 브로슈어에 이런 문구가 있다. 누구든지 참석하기만 하면 “완전히 새사람이 될 것이다.” 또 어떤 교회 간판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문구를 뽐낸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마케팅의 과장된 백색소음(white noise)에 해당하는 문구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이런 과장된 문구를 계속 사용하면 하나님의 권위를 거짓된 이미지로 왜곡하게 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약속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과 소명을 이야기하실 때 그런 식으로 과장하지 않으셨다. 물론 예수님의 주장이 극단적일 때는 있지만 과장된 것은 아니다. 신앙생활과 사역을 설명할 때 상투적 문구나 영적 마케팅의 미사여구에 의지할 때 성경적 약속은 싸구려로 전락한다.

 

‘한시적 친밀감에 관한 언어’

얼마 전 내가 가르쳤던 학생 마이클이 청년부 리더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어휘에 불만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 어휘들이 ‘한시적 친밀감에 관한 언어’라고 말했다. “예수님과 ‘데이트’를 하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아빌라의 테레사와 같은 기독교 신비주의자도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표현할 때 친밀감이 넘치는 언어를 줄곧 사용했다. 즉 그리스도를 친구요 연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테레사 성녀는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과정에는 고독과 고통과 고난이 포함되어 있음을 경고했다.

성경도 하나님과 우리가 맺는 관계의 특징을 설명할 때 친밀함을 내포한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에 비유한다.(사 54:5, 계 21:2, 9, 17, 마 7:11) ‘한시적 친밀감을 가리키는 언어’로 인해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을 오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친밀함마저도 한시적 친밀감처럼 작동한다고 믿게 만든다. 같이 있고 만지고 대화하는 친밀함인 양 취급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같이 있는다’는 요소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에 등장한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다(마 28:20). 그러나 이는 성령을 통한 영적 임재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고 말했다(요일 1:1).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대신 우리가 받은 특별한 축복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누린다는 것이다(요 20:29).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요한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예수님과 일종의 대화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종종 일방적이라고 느낄 때도 있다. 그분은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지만 침묵하실 때도 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 대해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은 일도 없고, 그의 모습을 본 일도 없다”(요 5:37). 이렇듯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은 이 땅의 한시적 친밀감과는 분명히 다른 면이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잊어버리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친밀감을 이야기할 때 이 땅의 한시적 친밀감에 관한 언어를 사용하면 예수님의 신적 초월성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확실히 말한다(창 1:26).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다고도 한다(민 23:19, 사 55:8). C. 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홍성사 역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우리에게서 먼 존재인 동시에 그 누구보다 우리와 가까운 존재입니다.…그는 만드셨고 우리는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본체시며 우리는 파생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피조물이라도 그 어떤 피조물과도 맺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하나님과 맺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곧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라고 확실히 말한다(히 2:17). 그분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다(히 4:15). 이러한 공통점은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그리스도에게서 공감과 도움을 얻을 수 있음을 보증한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초월적 존재다. 부활 후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내 손을) 보고 만지라” 고 말씀하셨다(눅 24:39, 요 20:27).

그러나 또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부활 이후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으니 손을 대지 말라고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요 20:17).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계시록에서 “내가 그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라고 말했다(계 1:17). 부활 사건 이후 우리는 승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와 같으면서도 같지 않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될 날은 아직 이르지 않았으나 올 것이다(요일 1:2).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성령의 중재로만 가능한 이 친밀함은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경험하는 익숙한 관계와는 다르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만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고전 13:12). 기도를 통한 대화에서 우리가 찾는 위로는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위로다(요일 5:14-15). 예수님은 이제 (사람이 아니고) 초월적인 존재시지만 그분과 우리의 관계는 인격적이다. 그러나 장차 우리와 예수님이 누릴 궁극적 친밀감은 현재 우리가 누리는 친밀감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변하지 않은 상태라서 완전한 관계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따라서 오히려 사람끼리의 관계가 훨씬 생생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줄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아마도 성경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이 땅에서의 친밀함을 비유로 사용할 때 바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두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런 구체적 경험은 우리의 영적 관계를 “새롭게” 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격적 방법으로 관계를 맺도록 도와준다.

 

폐허 가운데서 드리는 예배

사실 우리가 느끼는 실망은 희망을 이야기했던 이 땅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그 뿌리가 아주 깊다. 실망의 씨앗이 뿌려진 곳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 그 자체다. 고대인들은 천체를 보면서 대칭와 질서, 또 전체와 부분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착각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드러나는 현실은 끔찍하다. 지구에는 생물체가 바글거리고,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한 나머지 우주는 황량하다. 별들은 정해진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순환되는 질서가 있다.(창 8:22) 그러나 혼돈과 파괴도 있다.

죄로 인한 부수적 피해는 피할 수 없다. 자연세계는 인간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죄의 고통으로 몸부림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피조물은 “허무에 굴복” 하고, “사멸의 종살이” 를 해왔다(롬 8:20-21). 땅은 한때 기꺼이 열매를 맺었지만, 지금 우리는 땀을 흘린 후에야 열매를 얻는다.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은 아담처럼 슬픔의 빵을 먹을 수밖에 없다. 가득한 잔을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마셔야 한다. 구원은 반드시 도래한다. 즉 이 땅이 신음을 멈추고 피조물이 사멸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때가 다가온다. 그러나 지금이 그 때는 아니다. 지금 우리는 타락으로 인해 붕괴된 자연 속에 살아야 하고, 그 잔해 위에 새로운 것을 세워야 한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보다 큰 사역” 이라고 쓰여 있는 교회 간판을 보았다. 요한복음 14:12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셨던 구절을 암시하는 간판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그런데 성경구절의 일부라는 사실보다는 그 간판이 너무 낡았다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 간판이 걸려있는 낡은 건물에 걸맞게 간판의 활자 역시 금이 가고 색이 변해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저 교회에게 있어서 ‘더 큰 일’이란 우선 간판부터 새 것으로 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판의 글귀와 낡은 건물의 모습은 묘한 대조를 보였다.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과장된 미사여구와 대다수 사람들이 현실에서 경험하는 신앙생활의 모순점을 정확히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의 주변에 널려있는 잔해를 어떻게 해석할까? 그것은 단지 파괴된 세상의 자화상인가 아니면 타락한 인간을 새롭게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인가? 아마 두 가지 모두일 것이다.

영적 생활을 구축하려면 새로운 삶을 세우기 전에 이전 것을 허물어야 한다. 우리 인간의 자기 파괴적 행동 때문에 허물어질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새롭게 하심으로 허물어지기도 한다. 즉 우리는 “입기” 전에 “벗어버려야” 한다(엡 4:22, 24). 교회를 지을 때 모든 사람이 신중하게 임하거나 가장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고전 3:11-13). 그러나 우리의 공로가 보잘것없더라도(때로는 최선을 다할 때도 있지만) 그리스도는 그분이 시작하신 일을 손수 끝내실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교회를 지으실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는 이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 16:18).

독일이 일으킨 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연합군은 슈투트가르트에 폭탄을 쏟아부었다. 나치 정권은 패배를 목전에 두고 휘청거렸다. 그때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인 헬무트 틸리케는 그 유명한 주기도문 설교를 연이어 하고 있었다. 폭격에서 살아남은 교인들은 폐허가 된 교회 건물 한가운데 모여 예배를 드렸다. 틸리케는 그리스도가 가르쳐준 기도문으로 그들이 처한 영적 현실을 잘 그려냈다. 그는 교인들의 전쟁 체험을 두 가지 국면에서 풀어나갔다. 그리고 그 교차점을 찾아냈다. “하나는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는 인류의 삶을 나타내는 하강선입니다. 또 다른 선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스리는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상승선입니다. 이 상승선과 하강선은 동시에 진행됩니다” 라고 틸리케는 말했다. 성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루터의 말을 인용해 틸리케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세상의 고통과 절망을 당하시며,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폭탄 투하와 대량 학살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나라를 세워가십니다.”

이는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목회자 특유의 장황설도 아니고 교회 마케팅도 아니다. 영적 현실을 그대로 대변하는 언어다.

 



존 쾨슬러(John Koessler)는 무디신학교 교수이며 「어리석음, 은혜 그리고 능력」(Folly, Grace, and Power: The Mysterious Act of Preaching)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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