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이라는 숫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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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이라는 숫돌
  • 고든 맥도날드 | Gordon MacDonald
  • 승인 2019.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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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을 벴으면 낫을 갈라
   

위스 알프스 높은 초원을 아내와 함께 하이킹하고 있었을 때였다. 농부 두 사람이 커다란 낫으로 높이 자란 풀을 자르고 있었다. 같은 동작으로 낫을 크게 휘둘러 풀을 베는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두 농부는 주기적으로 쉬면서 호주머니에서 납작한 숫돌을 꺼내 낫에 대고 앞뒤로 문질렀다. 무엇 때문에? 무딘 날을 날카롭게 하려는 것이었다. 

낫을 다 갈았는지 두 농부는 다시 풀을 베기 시작했다. 그들은 베고 갈고 베고 갈기를 반복했다. 약 10분 정도 풀을 베면 5분 정도는 낫을 갈았다.

여기서 바보 같은 질문 하나. 왜 낫을 가는 데 5분이나 허비할까? 한 시간마다 20분을 낭비하는 셈인데, 계속 풀을 베면 일찍 집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낫을 휘두를 때마다 날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날이 무뎌지면 힘은 힘대로 들고 작업량은 늘지 않는다. 결국 귀가 시간은 훨씬 더 늦어진다.

교훈 풀을 베고 낫을 가는 것은 모두 농부의 몫이다.

적용 나는 목회 생활 초기에 이 베기와 갈기의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내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닥쳤을 때나 곤경에 빠졌을 때만 겨우 (영혼을 의식하고) 숫돌을 꺼내 날을 세웠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심각한 결과가 나타났다. 영혼이 무디어진 것이다.

하나님에 관해서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분의 음성에는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목표 지향적인 사람으로 변해갔다. 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제쳐놓고 덜 중요한 일에 매달렸다.
나는 자주 피로를 호소했다. 몸은 물론이고 영혼과 감정도 공허했다.
때로는 시기, 성마름, 야망, 불만, 헛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지나치게 예민했고 내 편이 아닌 듯한 사람들의 무시와 비판, 반대에 쉽게 흔들렸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하나님과 교인들을 적당히 섬기고 있는 듯했다.
내가 하는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다운 깊이가 없었다.
교인들은 대부분 나를 보고 좋은 설교자, 좋은 목사라고 칭찬했지만 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더 깊이 헌신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고 ‘벽’에 부딪히는 일이 잦아지자 나는 내 삶의 중심에서 부족한 것이 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찾지 못하면 목회를 계속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후에 나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을 발견했다. 영혼을 날카롭게 연마하는 거룩한 시간, 즉 안식일이었다.

그 전에는 안식일이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나에게 안식일이란 교인들을 사로잡는 설교, 양적 성장, 성공적인 프로그램으로 바쁜 일요일 하루였다. 왕을 예배하고, 침묵으로 기뻐하고, 내적인 ‘대화’를 나누고, 삶을 재정리하는 날이 안식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삶이 혼란스러워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안식일이 그런 것인 줄은 전혀 몰랐다.

내 삶이 어수선해진 이유는 세상의 일은 반드시 멈출 때가 있고(정말로 정말로 멈춰야 한다!) 그 대신 영혼의 일을 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제대로 한번 상상해보자. 우리는 분주함에서 벗어나 24시간 동안 비교적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어제를 반성하고 받은 복을 헤아리고 잘못을 뉘우칠 수 있다. 내일을 기대하고 우선순위를 정돈하고 방향을 점검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순종을 재확인할 수 있다. 하루를 온전히 쉬고 웃으며 공부하고 놀 수 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는 왜 이런 안식일을 보내지 못할까?

나는 삼십대 초반이 돼서야 안식일은 무뎌진 날을 가는 날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은 개신교나 가톨릭이 아니라 유대교 사상가들에게 배웠다.
작가이자 극작가이며 독실한 유대인인 허먼 오크는 「나의 하나님」(This Is My God)에서 신앙생활의 중심이 안식일이었음을 강조했다.

 

능력, 회복, 활력

“안식일은 유대인의 삶을 지탱하는 받침점이자 능력과 회복, 활력의 근원임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개신교의 안식일과 그보다 훨씬 더 엄격한 유대교의 안식일은 정신적인 면에서 미묘하지만 압도적인 차이가 있다. 유대교의 안식일은 빛과 와인의 축복으로 시작된다. 빛과 와인은 안식일의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안식일을 엄숙하게 지키지만 자유, 평화, 유쾌함, 활력을 느낀다.”
오크의 마지막 말을 다시 읽어보라. 우리가 개신교의 안식일(일요일)을 지킨 후 그런 것을 느꼈던 적이 언제였을까?

오크는 유대인 가정이 지키는 전형적인 안식일을 계속 묘사했다. 그는 매주 금요일 밤 해가 지면 뉴욕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어두운 극장(오크가 일하는 곳), 바닥에 뒹구는 커피 잔들, 어지럽게 휘갈긴 대본, 초췌한 몰골의 배우들, 고함을 지르는 무대 담당 직원들, 사람을 못살게 구는 감독, 걱정이 태산인 프로듀서, 자판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 자욱한 담배 연기와 무대 뒤의 먼지를 뒤로 하고 나는 집으로 간다. 이것은 전쟁 중에 잠깐 외박이라도 나온 듯한 놀라운 변화였다.”
그가 묘사한 극장의 모습은 그(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매우 닮았다. 그의 가정에 깃든 조화로운 세상과 비교해보라.

부인과 아이들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 식구는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안식일을 상징하는 것들과 꽃으로 장식된 식탁”에 둘러앉는다. 그러고 나서 오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아들들을 하나씩 쓰다듬으면서 축복한다. 그 후에 먹고,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서로 궁금한 것을 나눈다. 오크는 말한다. “나에게 안식일은 마법 같은 회복이다.”
마법 같은 회복. 정말 멋진 말이다.

토요일도 거의 그렇게 보낸다. 회당에서 함께 예배하고 공원에서 놀이를 즐긴다. 안식일에는 단란함이 있다. “안식일에는 우리가 늘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 아이들은 안다. 아빠는 일하러 가지 않고 엄마도 편히 쉰다는 것을 안다. 안식일은 아이들의 날이다.”
“안식일은 나를 위한 날이기도 하다. 전화벨은 잠잠하다. 나는 생각하고 독서하고 공부하고 산책을 하든지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안식일은 삶의 고요한 오아시스다.”
토요일 밤 안식일이 끝나고 극장으로 돌아가면 누군가는 오크에게 말한다. “자네의 유대교는 부럽지 않은데 안식일은 정말 부러우이.”

유대교 랍비 조나단 삭스도 「미래를 위한 신앙」(Faith in the Future)에서 안식일을 비슷하게 묘사한다. “금요일 오후에 집으로 오는 것을 상상해보라. 한 주가 바쁘게 지나갔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쳤다. 그런데 간소한 듯 화려한 안식일 식탁이 나를 반긴다. 가정의 평화를 상징하는 양초가 환히 빛나고, 축복과 기쁨을 상징하는 와인, 칠일째 아침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배로 내렸던 만나를 기념하는 빵 두 덩이가 놓여 있다.”
그 다음 말을 들어보라.

“식탁을 보고 있으면 내일 저녁까지는 일의 압박, 경쟁, 혼란, 방해가 없고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각해보니 나의 안식일을 부러워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스스로를 숫돌로 연마하는 일을 게을리 한 탓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면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교회의 한 장로는 일요일 오전을 무척 바쁘게 보낸 후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일주일에 한 번만 지키라고 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두 번 지키라고 하셨더라면 신경쇠약에 걸렸을 겁니다.”

반대로 상원의원이자 독실한 유대인인 조지프 리버먼은 「안식이라는 선물」(The Gift of Rest)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내 삶에서 가장 깊고 순수한 기쁨이므로 안식일은 선물이다. 이 날은 평화와 안식의 날, 오감이 즐거운 날이다”라고 말한다.
리버먼은 마지막 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감이 즐겁다는 뜻은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이 총동원되어 아름다운 상차림, 울려 퍼지는 멜로디, 맛있는 음식과 와인, 넘치는 사랑을 만끽하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안식일에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다. 안식일은 내 삶을 고정시키고 매만지고 내 삶에 영감을 불어넣는 선물이다.”

요즘 우리 개신교와 가톨릭의 ‘교회 생활’에는 오크와 삭스, 리버먼이 말했던 것과 같은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까?

이것이 내면이 혼란했던 젊은 시절에 나를 괴롭히던 물음이었다. 자유, 평화, 유쾌함, 활력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떻게 해야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을까?
내가 하루를 온전히 쉬는 안식일을 꾸준히 지켰다는 말로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는 24시간보다는 짧지만 진정한 안식일의 ‘숫돌’을 사용하는 법을 터득했다.

 

개인의 안식일
안식일에는 두 가지 면이 있는데, 즉 개인의 안식일과 친구들과 회중과 어울리는 공동체의 안식일이다. 여기서는 개인의 안식일에 관해서만 생각해보자.

오랫동안 우리 가정은 하루를 침묵의 안식으로 시작했다. 우리는 소음도 방해꾼도 산만함도 없는 조용한 장소에 머무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들을 키울 때는 아이들이 깨기 전에 일어나 침묵의 안식을 지켰다(그러려면 일찍 자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런 방법이 효과가 있었다.

나는 차츰 이 시간을 소중한 보물처럼 아끼고 지켰다. 날마다 똑같은 시간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목적은 늘 같다. 오크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자유, 평화, 유쾌함, 활력을 얻기 위해서다.” 그것이 전부일까? 예수님에게 순종하고 사람들을 섬기고 세상과 분리되지 않고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하루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런 말을 했다. “그대가 홀로 있는 시간을 성실히 지킨다면 그 시간은 그대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그대를 크게 위로할 것이다. 독실한 사람은 침묵과 정적 속에서 영혼이 자라고 성경의 숨은 보화를 배운다. 눈물은 그대를 맑힌다. 그대가 잠시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은 그대를 가까이 하신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돌보는 것이 자기 영혼을 돌보지 않고 공개석상에서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낫다.”

나는 개인의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루하루를 연마하는 데 필수적인 몇 가지 활동을 발견했다. 이것들은 내 영혼을 날카롭게 하는 숫돌이 됐다.

 



• 철저한 회개 회개는 생명을 구원하고 천국을 열기 때문에 안식일의 출발점이다. 나는 나쁜 짓을 하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다음 잊고 사는 것이 회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경을 다시 연구한 후에 회개는 맨 먼저 사람의 마음 깊숙이 존재하며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악의 뿌리를 인정하는 것임을 알았다.

철저한 회개란 그런 잠재적인 악이 내 안에 없는지 마음을 살피고, 나와 남을 비교하지 않고, 잘못을 변명하지 않으며,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더라도 푸념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사야의 고백처럼 “화로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말하는 것이 회개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정직한 겸손과 꾸준한 재점검이 필요하다. 스스로의 불결함(드러난 것과 잠재적인 것)을 인정하지도 않고 반성하지도 않는 반역의 자아는 여전히 활개를 친다. 숫돌로 날을 세우는 안식은 이런 반역을 용납하지 않는다.

 

• 말씀 묵상 나는 설교를 준비하는 설교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정하고 예리한 말씀에 굶주린 자로서(때로는 필사적으로) 날마다 성경을 읽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야기를 비롯한 성경의 이야기들은 한없는 사랑을 전한다.

시편 23편같이 평생 자주 읽는 말씀도 있다. 나는 조용히 앉아서 시편 23편을 읽고 읽고 또 읽는다.
나는 단어를 하나씩 곱씹으면서 시편을 읽는다. 쉴 만한 물가…죽음의 그늘 골짜기…막대기, 지팡이…잔칫상…선하심과 인자하심(나 같은 죄인에게는 어마어마한 말씀이다). 나는 큰 목자 예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푸른 풀밭에서 나를 안심시키시고, 위험 속에서 그분의 임재를 확인해주시고, 상처에 기름을 바르시고, ‘원수들’이 무기력하게 쳐다보고 있는 동안 맛있는 저녁상을 차려주시는 것을 상상한다.

• 고전 읽기 젊었을 적에는 이처럼 별난 사람들의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거스틴, 로렌스, 페넬롱, 폭스, 토마스 아 켐피스를 열심히 읽는다. 그들의 말은 내 영혼을 어루만진다. 퀘이커교도, 가톨릭교도, 개신교도, 수사, 신비주의자 등 종파와 신분은 다양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한 가지 종파나 신학적 관점으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균형감각을 가르쳐준다.

성찰하기 나는 정말로 시끌벅적한 삶을 살았다. 완성되지 못한 채 버려진 생각들이 얼마나 많은지. 반성하지 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지혜를 배울 수 있는데도 내팽개친 사건과 대화들이 얼마나 많은지. 고맙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잊어버리는지. 성찰이란 이런 것들을 모아서 그 속에서 의미와 메시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일기 쓰기 공책에 나를 기록하기 시작한 날(1968년 12월 17일)은 내가 날마다 했던 일 중에 가장 중요한 활동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거나 지나쳤던 일, 기뻤거나 후회했던 일들을 날마다 일기에 차곡차곡 담았다. 기도문, 발췌문, 성경구절, 그날 하루 ‘천사’들이 나에게 해준 말들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역사와 계시를 잊지 않으려고 기념비를 세웠던 것처럼 내 일기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는 기념비였다.

예배하기 우리는 안식일에 기도하는 자세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환호성을 올리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거라. 너희는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라. 그가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이다”라는 말씀에 다시금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역사,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을 찬양하는 예배를 통해 우리는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이기심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의해 나는 내 자아가 본래대로 한없이 쪼그라드는 고통스런 순간을 경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반대로 내가 비참한 상태에 있을 때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주시고 새 노래로 채워주신 적도 많았다.

안식일의 상상 사람들은 종종 하찮게 여기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에게 상상력(말하자면 내면의 극장 무대)을 주셨다. 우리는 그 극장에서 우리를 위한 미래의 각본을 그려볼 수 있다. ‘10년 후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같은 먼 미래와, ‘오늘 뭘 해야 하지’ 같은 가까운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안식일이 되면 나는 앞으로 나눌 대화를 조용히 상상해본다. 해야 할 일들에 관해서도 생각해본다. 나는 상상하면서 질문한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 사람이 이렇게 나오면 나는 뭐라고 말할까? 어떻게 하면 말하기보다는 듣는 데 집중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상상의 순간에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마음에 가능성을 새겨주신다.

나의 안식일이 그렇다. 내면의 날이 날카로워지면 나는 영적인 활력과 집중력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간다.

나는 루퍼스 존스가 퀘이커 운동의 창시자 조지 폭스의 전기에서 했던 말을 무척 좋아한다. “그는 모든 계획과 준비에서 침묵과 적막의 장소를 강조했고 추종자들에게 예배 모임에서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고 가르쳤다. 그는 그가 떠난 후에도 사람들이 스스로 내면을 깊이 일구고 외부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부부처럼 조지 폭스도 스위스의 농부들을 보면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다. CTK 2011:12

 



고든 맥도날드 <리더십 저널>의 편집인이며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한국 IVP 역간) 등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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