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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 "돈을 모독하라"'맘몬에 굴복하지 않은 법'
데이비드 네프  |  David Ne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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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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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마르크스를 처음 알았을 때 자끄 엘륄은 열일곱 살의 가난한 법대생이었다. 마르크스를 만나고 나서 그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귀족 가문의 후손인 아버지가 왜 계속 실직 상태에 있는지, 찾아간 회사와 공장마다 왜 아버지를 돌려보냈는지, 그의 가족이 왜 궁핍한지, 보르도의 부두 노동자들이 왜 열악한 조건에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왜 불의가 판을 치는지.

그러나 마르크스를 추종하는 다른 사람들(사회주의자 그룹과 공산주의 조직원들)과 접촉하면서 청년 엘륄은 크게 실망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마르크스의 이념이나 그가 말한 사회 발전에 헌신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만을 원했고,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사상보다는 당의 강령을 우위에 두었다. 후에 제2차 세계대전 중 엘륄은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공산주의자들이 다른 레지스탕스 그룹을 단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서슴지 않고 죽이는 모습을 보았다. 엘륄은 “이제 누구도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거나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거나 믿으라고 할 권리는 없다”고 썼다(「우리 세대를 보는 관점: 자끄 엘륄, 자신의 삶과 작품을 말하다Perspectives On Our Age: Jacques Ellul Speaks on His Life and Work).

그 후로 엘륄은 정당이나 이념, 조직 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서른 권이 넘는 저작

이른 시기에 공산주의와 조우한 뒤로 엘륄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박사 학위를 받았고, 작은 규모의 개신교 회중을 돌보았으며, 프랑스개혁교회협의회 위원으로 일했다. 또한 정치에 참여했고,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생태학적 개혁을 위한 운동을 벌였고, 영향력 있는 사상가가 되었다.

엘륄은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열세 개의 언어로 서른 권이 넘는 책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의 글은 대중에게 난감할 정도로 뻔한 재미를 선사한 루이 라무르(다수의 서부소설을 쓴 20세기 미국의 대중작가)나 우드하우스(다방면에 걸쳐 여러 작품을 남긴 영국의 유머작가)와는 달랐다. 사실, 엘륄의 글은 재미와는 거리가 멀다. 그뿐 아니라 그의 사상은 예측하기 어렵다.

30년 전 엘륄이 그리스도인과 돈의 문제에 관해 쓴 오래된 에세이가 최근하나님이냐 돈이냐(대장간)라는 제목으로 번역 소개되었다[이 책은 1954년과 1979년에 불어로 출간되었고, 1984년에 영어 번역본이 나왔다]. 주목할 점은, 30년 전 글이라는 사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가 1979년판 후기에 적은 바와 같이, “겉보기에는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으나, 실제로는 바뀐 것이 거의 없다.”

이 책이 언제나 큰 환영을 받지 못한 데는 두 가지 주요 요인이 있다. 첫 번째 요인은 우리의 생활방식에서 돈이 차지하고 있는 중심적인 역할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데 긴요한 것들을 시간을 내서 직접 만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우리는 돈을 번다. 아마도 그 버는 돈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노동의 목표는 월급이며, 그 월급이 가능하게 해주는 은행과 쇼핑몰로의―날씨에 구애받지 않는 맘몬 신전으로의―여행이다. 당신이 재벌이나 영화계의 실력자들, 기업가들이 버는 돈과 그들의 도덕성에 대해 무슨 말을 해도 나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매일 버는 돈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면, 조심해야 한다. 내가 언제 화를 터뜨릴지 모르니 말이다.
 
빠져나갈 길은 없다


이 책에 대한 반응이 제한적이었던 데는 두 번째 요인이 있는데, 엘륄의 가차 없는 논증 방식이다. 뉴칼리지 버클리의 데이비드 질 교수는 엘륄의 논증 방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엘륄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제거해버린다.’ 그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과 안전망을 거둬내고, 우리가 의지하는 우상과 목발과 버팀대를 부숴버리며, 우리의 핑계를 가차 없이 벗겨내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순응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부족을 공격한다. 사회학적 비판과 성경 주해를 통해, 엘륄은 우리에게 빠져나갈 길을 남겨두지 않는다. 탈출구는 모두 잠겼고, 빠져나갈 희망은 없다”(CT 1976년 9월 10일, 24쪽).

엘륄은 우리에게서 사랑하는 친구뿐 아니라 마음에 숨겨둔 적까지도 제거하여 우리로 하여금 성경과 사회과학의 거울 앞에 벌거벗은 채로 서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접근법은 사람들의 동의나 환호를 얻기 위해 미리 계산된 것이 아니다. “나는 엘륄의 열렬한 팬은 아닙니다.” 시애틀퍼시픽 대학교의 인류학자 미리엄 애드니 교수는 최근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다른 인류학자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를 비평하며 한 말을 엘륄에게 적용하며 엘륄이 “지나치게 지적인 경향”을 보인다고 논평했다.

“그러나 잠깐만요!” 질 교수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엘륄은 그 모든 것을 소망과 자유라는 영감 어린 비전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다시 돌려줍니다.…이런 접근법은 현 시대의 기독윤리학 담론에서 볼 때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곧 ‘모든 것을 미워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급진적 제자도의 길로 들어서는 예를 보여주는 것인데, 이는 복음서에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돈과 맘몬

그렇다면  「하나님이냐 돈이냐에서 엘륄은 어떻게 “모든 것을 제거하는가?” 아마도 엘륄이 가하는 가장 충격적 일격은, 예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돈을 맘몬으로 의인화하는 것이다. 맘몬은 신격화된 존재요 악마요 우상이며 우리가 벗어나야 할 권세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돈을 그저 사람의 영을 무감각하게 만들거나 손을 무디게 만드는 일에 복무하는 힘없는 녹색 종이로 생각한다. 돈은 사람의 힘을 앗아갈 수는 있으나 반드시 필요하며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절대로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이 갖고 싶어 하며, 돈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한 것, 다른 누군가가 너무 많이 갖고 있는 것을 문제로 여길 뿐이다.

그러나 엘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돈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예수는 돈을 의인화하고 그것을 일종의 신격으로 다루신다. 이것은 당시 그분이 처한 문화적 환경에서 가져온 생각은 아니다.…이처럼 예수가 돈을 인격화한 사실이나 돈에 신성을 부여했다는 사실은…돈에 대해 뭔가 특별한 점을 계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격화나 인격화는 예수의 평소 언어 습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륄은 마태복음 6:24누가복음 16:13을 설명하면서 돈이 곧 권세이며, 그 자체로 영적 의미와 방향을 가지고 물질세계에서 작용하는 법칙임을 예수께서 보여준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권세는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권세는 어느 정도 인격을 지닌다. 성경이 종종 죽음을 인격화된 힘으로 묘사하듯, 성경은 돈 역시 그렇게 그리고 있다.

수사학이 아닌 실체

상황은 만만치 않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 설정한 병립관계를 절대로 축소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수사학적 어법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지목하시는 것이다. 인격으로서의 하나님과 인격으로서의 맘몬, 이 둘은 서로 충돌하게 마련이다. 예수는 우리가 어느 것이든 둘 중 하나와 관계 맺는 방식이 똑같다고 묘사하는데, 곧 주인과 종의 관계다.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맘몬도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즉 맘몬이 인격을 가진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돈을 사용하는 것이라 주장할 수 있다고 엘륄은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돈이 우리를 사용한다. “돈이 사람을 얽매어 돈의 법칙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되도록 우리를 종으로 예속한다.” 요컨대 우리는 결코 자유롭게 돈을 사용할 수 없다.

맘몬이 영적인 권세라는 명백한 표지 중 하나는 사람들이 돈에게 신성한 특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중산층의 거실에서 사업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대화 도중에 누가 돈 문제를 제기하면 무례한 사람으로 몰린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돈에 대해 신성한 감정이 모든 사람 안에 자리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해주는 표지다. 노동자 계급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돈에 대한 숭배를 보여준다. “돈 문제가 해결되면 노동 계급과 인류의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이 그들 가운데 널리 퍼져있다. 이는 돈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모든 말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이기도 하다.”

엘륄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전후의 프랑스 상황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 은행과 신전 사이에는 너무도 분명한 유사점이 보인다. 한동안 크게 유행한 그리스 양식의 건물 외관이나, 계층을 드러내려는 정장 차림이나, 대리석 단에 성찬의 상징(음료와 과자)을 차려내는 방식 등이 그러하다. 참으로 우리 사회는 태아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기보다는 주요 은행 하나를 파산에서 건지는 데 보다 열심인 것으로 보인다.

돈의 신성을 모독하기

엘륄이 “지나치게 지적인 경향”을 보인다고 애드니가 말했던가? 그 말은 맞다. 엘륄은 그리스도인들이 고용주-종업원 관계를 거부하고, 이윤 추구와 절연하고, 장래의 일을 대비해 계좌에 돈 쌓기를 포기함으로써(물론 특별 목적을 위한 저축은 허용하고 있지만) 돈의 권세에서 벗어나 자유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엘륄의 지나친 면이 무엇이든, 맘몬의 통치를 거역하는 비신성화 작업을 작게나마 실천해야 한다는 그의 제안은 옳다. 그리스도인이 마지막까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는 맘몬의 제단 앞에 무릎 꿇는 일이다. 엘륄은 말한다. “돈의 법칙에 위배되게 행함으로써 돈을 모독하는 아주 탁월한 행위가 하나 있다. 그것은 돈이 태생적으로 목적하지 않는 행위인데, 바로 베풂이다.”

엘륄은 베풂을 아주 열정적으로 옹호한다. “베풂은…경쟁과 매매의 세상 속으로 은혜가 뚫고 들어오게 하는 행위다.” 엘륄은 하나님께 드리고 사람에게 베풀 것을 권한다. 순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 선물(실제적 가치가 전혀 없는 데 돈을 사용하는 것)은 돈의 신성을 가장 모독하는 행위다. 사람에게 베풀 때 우리는 값없이 주어야 한다. 베풂은 그것을 받는 사람을 구속하거나, 그에게 감사를 요구하거나, 베푸는 자가 받는 자보다 우월함을 드러내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선은 맘몬에 의해 왜곡된 베풂이다.”

   
 

모호함과 역설

그러나 여기서 잠시 생각해보자. 돈이 그토록 악한 것이라면, 우리는 기독교적 청빈의 이상을 따라 살기 위해 사막 교부들처럼 이 사회를 떠나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적어도 세상 한가운데서 소금과 빛으로 섬기면서 가능한 한 검소하게 사는 일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엘륄은, 그것은 돈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엘륄은 우리에게 그 답을 주지 않는다. 이 점이 엘륄의 독특한 지점이다. 형제단 소속 신학자 버나드 엘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엘륄은 신앙을 개념화하거나 사람들을 가르쳐 만족할 만한 합리적 생각으로 정리하도록 하는 데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가 보기에, 복음은 이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의 능력과 역동성, 생명력, 활력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기독교는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문제이며 살아있는 관계의 문제이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호한 것을 견디지 못해 분명한 것을 요구하는 독자에게 이 같은 접근법은 불편함, 의심,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엘륄은 한편으로 돈이나 경제 구조와 관련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비판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벌어야 하며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경제 구조 속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한 말이다. 앞에서 질이 언급했듯이, 엘륄은 “모든 것을 제거해버린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그 모든 것을…소망과 자유라는 영감 어린 비전과 함께 다시 돌려준다.” 따라서 엘륄의 지적 모험에서는 정답을 만날 수 없다. 오직 무수한 은혜만을 만날 뿐이다. CT  데이비드 네프 편집인 

CT CLASSIC David Neff, "Jacques  Ellul"  CTK 2012:1 데이비드 네프, "하나님이냐 돈이냐" 

[수정:2015.04.17]  [게시:2011.12.26]  [게시:201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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