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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우셨다이 두 단어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슬픔과 분노
마크 뷰캐넌  |  Mark Bucha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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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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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전, 겟세마네 동산에 계신 예수님의 초상화를 보았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곳에서 깊이 번민하며 기도하시느라 땀이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졌다고 기록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틀림없이 다음 구절을 쓰면서 이 깊은 고뇌의 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5:7). 실제로 히 브리서는 예수님이 기도만큼이나 눈물이 몸에 배인 분이셨으며, ‘육체에 계실 때에’ 자주 눈물을 흘리셨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내가 본 그림에서는 그와 같은 흔적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수님의 뒤쪽 배경으로는 (호수와 함께) 전원풍의 예루살렘이 보였고, 45도 각도의 예수님 옆얼굴은 평온하다 못해 초연하기까지 했다. 두 눈은 꿈꾸듯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 자세로 바위 위에 앉은 몸은 꼿꼿하게 서 있었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은 마치 뻣뻣한 새 책을 펼쳐서 엎어 놓은 것 같았다.

희한하게도 화가가 그린 예수님의 손은 힘이 없으면서도 경직되어 보였다. 그래서 마치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말랑하면서도 도자기처럼 금방 깨질 듯했다. 과연 이 손이 톱과 대패와 망치를 자유자재로 놀려 거친 목재를 자르고 붙이고, 한센병 환자의 문드러진 환부와 소경의 눈을 어루만지고, 채찍을 꼬아 휘두르며, 못 박히신 바로 그 손이란 말인가? 그럴 리 없다. 아무래도 그 손은 아닌 것 같다. 촘촘하고 세밀한 수를 놓거나 검지를 좌우로 살짝 흔드는 정도라면 모를까 그 밖의 일에는 별로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잘 빗어 넘긴 매끈한 예수님의 머리 뒤쪽으로는 투명한 빛이 원을 그리고 있다.

예수님은 아마도 묵상 중이신가 보다. 아니면 초상화 화가를 위해 약간은 과장된 자세를 잡고 계신 모양이다. 그것도 아니면 백일몽을 꾸고 계신 것일까? 하지만 예수님은 절대로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림 속의 예수님은 도무지 우실 분으로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셨다. 이 사실에 놀라는 사람도 있고,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당황스러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설교 전에 서재에 홀로 앉아 마음속에 일어나는 깊은 감정들을 충분히 느껴 보려고 애쓴다. 눈물 흘릴 일이 있으면 거기서 운다. 그런 과정을 통해 방황하기 쉬운 감정들을 처리하고, 그런 감정들에 방해를 받거나 속지 않은 채 권위 있고 절제된 설득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있게 된다. 이 초상화에 드러난 신학과 예술성은 형편없지만, 어쨌거나 나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도 마음속에 품고 간다. 위험과 위기와 상실에 직면해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평온하고 통달한 듯한 분 말이다. 내 감정의 범위와 표현이 내가 따르는 예수님을 암시한다면,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신다. 그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기엔 너무 쿨하고 터프하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셨다. 요한복음 11장 35절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다[개역성경의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와는 달리 영어 성경은 ‘Jesus Wept’(예수께서 우셨다) 단 두 단어뿐이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 사실, 성경에서 이 부분만큼 많은 신학이 확실하게 녹아 있는 구절도 없다. 이토록 풍부한 의미를 경제적으로 표현해 낸 곳도 드물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 그 온전한 성육신이 주어 하나와 동사 하나로 집약되어 있다.

이 간결한 성육신의 표현에 광대한 장관이 서려 있다. 이 빈약해 보이는 표현에 신학의 은하계가 들어 있다. “예수께서 우셨다”는 이 짧은 문장에 인간의 조건, 인간의 연약함, 인간의 한계에 대한 사랑과 자비, 열정과 긍휼, 슬픔과 분노가 깊이 새겨져 있다.
 

   

 

왜곡된 우선순위 
경제적인 우선순위가 완전히 뒤틀려진 세상에서 예수님은 우셨다.

요한복음 11장은 나사로를 묘사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는 병을 앓고 있었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였다. 요한은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2절)고 말한다. 이 사건은 다음 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살아난 나사로와 그 누이들이 예수님을 위해 베푼 잔치 자리에서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 하더라”(12:3)고 기록되어 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2:4, 7-8).

요한은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고 쌀쌀맞게 말한다. 제자들의 자금을 관리한답시고 돈 가방에서 조금씩 공금을 슬쩍했던 유다는 도둑이나 마찬가지다. 나중에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세상을 보시고 예수님은 우셨다. 이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가장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 소외된 자들을 더 많이 돕지 않는다며 따끔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곳이다. 그런 사람들 중 다수는 부자인데, 부를 얻기 위해 남의 돈을 슬쩍하고 손쉬운 길을 택한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먼저 나서서 남의 호화로운 생활이나 낭비를 손가락질하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다. 정부나 교회가, 그리고 정부나 교회에 소속된 부자들이 조금만 나선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분노는 끓어 넘치지만 긍휼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셨다.

또 예수님은 자신이 유다에게 하신 말씀의 반쪽만 인용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셨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면서 그냥 열심히 살기나 하자. 가난한 사람일랑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재벌과 부자의 수입이 증가하면 중소기업과 서민의 소득도 따라서 증가한다는 주장]와 ‘보이지 않는 손’이 알아서 도와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의무감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권하신 낭비는 낭비 그 자체나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방종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 그분을 위해 쏟아 부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장례 일을 위하여 향유를 간직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마리아는 몰랐지만 예수님은 그 죽음의 의미를 아셨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죽음이었다. 유일한 참 소망, 유일한 영원의 소망이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똑같이) 보장되고 주어지는 그런 죽음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떡만 던져 주고 생명의 떡은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물질의 가난만 해결해 주고 영혼의 가난은 해결해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들에게 이 세상 소망만 안겨 주고 다음 세상의 소망은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못 본 체하고 자신의 사리사욕만 채우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또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기억하고 높여 드리는 일에 우리 몸과 제물을 쏟아 붓지 않는 것도 온당치 않다. 높이 들린 그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 이끄실 것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핑계로 예수님에 대한 아낌없는 헌신을 소홀히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고통 받는 어린아이들을 방치하는 신은 섬길 수 없다고. 브라질 상파울로 빈민가 사람들은 전기도 수도도 없이 살아가는데, 음향 시설에 3만 달러나 쏟아 붓는 교회에는 나갈 수 없다고. 그러면서 우리는 고급 승용차를 몰며 일일이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이 즐비한 뷔페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가족 수보다 많은 방이 딸린 집으로 향한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은 항상 존재한다며, 가난의 문제는 너무 방대하고 복잡하고 뿌리가 깊어 해결하기 어렵다며, 우리의 무관심과 무행동과 방종을 합리화한다. 나는 이 SUV를 사면서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 설사 이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 하더라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자연 재해라도 나면 이 차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니 차라리 더 낫지 않은가.

 

 

 

   

내 뱃속 채우기
건강과 자기 보호, 곧 자기 몸뚱이를 고치고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중요한 이 세상에서 예수님은 우셨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이 빨리 베다니로 오셨으면 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 나사로가 병들었기 때문이다(요11:3). 반대로 제자들은 그곳에 가기를 꺼렸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절). 예수님이 결국 베다니로 가서 나사로를 보셨을 때는 이미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기에 마르다는 그분을 심하게 비난한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평소에는 온순한 마리아조차 똑같은 말을 했을 정도다(32절).

어서 와주세요, 예수님. 가지 마십시오, 예수님. 조금 더 빨리 오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예수님. 이 간절한 부탁과 경고, 비난의 목소리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한결같이 자기 잇속을 차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마치 의사나 변호사, 또는 건물 관리인이나 은행원 같은 존재다. 그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급한 용무가 생겼을 때 내 곁에 계셔야 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훌륭한 홍보 담당자처럼 생각한다. 이런저런 골치 아픈 일들을 처리해 주시기 위해 곁에 계신 분으로 말이다.

그런데 아무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예수님의 행동은 나사로나 그의 누이들, 또는 제자들의 건강이나 관심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게 아닐까? 예수님은 나사로를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절)고 말씀하신다. 또 마르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고 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가장 하찮고 가장 하잘것 없는 관심사인 세상에서 예수님은 우셨다. 사람들은 질병이나 고통, 박해와 죽음 가운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도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고 불쾌하다고 여기며, 그분이 우리의 유익과 필요에 맞추어 일정을 조정하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늦으시거나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시면 심하게 그분을 비난한다.

나사로를 조문하러 왔던 어떤 사람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요즘 세상에 잘 팔리는 신학을 대변해 준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37절) 이런 신학에 따르면, 내게 제일 좋은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행동을 판단하는 최고 법정이다. 나에게 제일 좋은 것이면 하나님께도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존재한다. 나를 섬기고 내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하는 신이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니겠는가?

 

 

 

 

   

야박한 세상
정치적인 위험, 곧 테러리즘과 독재 정치, 무작위적인 폭력과 조직적인 만행 때문에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머뭇거리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우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 때문에 예수님의 베다니 행을 만류한다. (유일하게 도마만 예외다. 그는 예수님을 단념시키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는 16절에서 나머지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이야기한다. 의심 많은 도마가 대단하기도 하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신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은 예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되풀이하신 것이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4-5).

예수님은 낮과 밤, 빛과 어둠을 재정의 하신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때와 장소는 밤이요 어둠이다. 반면 예수님이 계신 때와 장소는 낮이요 빛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어둠 속에 보내져 거기서 빛을 비춘다. 우리의 정의에 따르면, 밤과 어둠이 지배하는 장소와 상황, 곧 밤과 어둠이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명백한 그리스도의 의를 거부하는 곳이야말로 ‘아직 낮일 때’ 우리가 가야 할 장소인 것이다.

주님, 거기 사람들은 주님을 미워합니다. 주님, 그 나라 사람들은 교회를 불태운답니다. 주님, 그쪽 사람들은 목사를 죽인답니다. 주님, 그 도시 사람들은 너무 많이 타락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곳을 기피하는 우리의 변명을 잠잠히 들으시고는, 그 모든 핑계거리를 전면적으로 뒤바꿔 놓으셨다. 그래서 거기에 더 가야 하는 거란다 하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가거라. 아직 빛이 조금 남아 있을 때 가라. 밤이 오기 전에 가라. 어서.

이 세상은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 위험하고 야박한 곳이다. 세상은 항상 그랬다. 세상은 우리에게 집안에 물건을 사재기하고, 커튼을 닫고, 창문을 걸어 잠그고, 문에 빗장을 채우고, 이불을 끌어당겨 덮으라고 유혹한다. 자기 목숨을 챙기고 세상은 지옥에 가게 내버려 두라 한다.

 

 

 

 

   

죽음에 맞서
죽음이 원수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예수님은 우셨다.

요한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비통히 여기셨다”(33, 38절)고 두 번이나 언급한다. 또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33절) 우셨다. 원문에는, 예수님이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묘사한 부분에서 아주 힘 있고 신랄한 단어를 사용한다. 말하자면, 분노와 좌절과 혼란이 뒤섞인 슬픔이었다.

마음이 찢어지고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그런 감정을 묘사한 것이다. 둘째 딸이 두 살, 아들은 네 살일 때 다 같이 공원에서 놀다가 큰 아이들 셋이 동생들 장난감을 뺏어간 적이 있었다. 아들놈은 울면서 쫓아갔지만 강단 있는 딸내미는 좀 색다른 방식으로 울었다. 결국 오빠들이 60cm 키에, 9kg 남짓한 이 아이를 당해 내지 못했다. 딸아이의 울음은 불의에 대한 강력한 분노를 표출하는 완강한 저항의 표시였다.

처음에 큰 아이들 셋은 동생이 울건 말건 비웃었지만 조금씩 겁이 났다. 아이들은 슬며시 장난감을 넘겨주고 급히 물러났다. 요한이 여기서 묘사한 예수님의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죽음을 물리치실 것이다. 이제 곧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켜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우셨다. 조문객들의 표정과 소리에 그분의 피가 들끓고 내장은 뒤틀리는 것 같다. 죽음은 어마어마한 불의다. 죽음은 비열한 원수요, 동네 골목대장이다.

죽음이 이런 권력을 휘둘러 우리를 강탈하고 조롱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죽음으로 인해, 이 창조 세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증명되는 것은 옳지 않다. 죽음이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믿는 자들을 장악하여 그들의 소망을 질식시키고, 신자들로 하여금 그분의 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철저하게 잘못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로빈 한 마리가 죽었다. 내가 앉아 있던 책상 옆쪽 유리창에 쾅 하고 세게 부딪쳤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고개를 들어보니 지저분한 깃털이 유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밖으로 나가서 살펴보니 새는 심하게 일그러져 창문 밑에 쌓인 나무 널빤지에 떨어져 있었다. 깃털 천지였다. 선명한 붉은 핏방울이 마치 입 안의 나무 열매처럼 부리 끝에 매달려 있었다. 새를 집어 들었다. 따뜻한 몸체가 퍼덕거리며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축 늘어졌다. 머리가 몸에서 분리된 것처럼 헐겁게 까딱였다. 목이 완전히 부러졌다.

나는 시체를 들고 잔디밭을 건너 정원 창고 뒤쪽에 있던 삽을 꺼내왔다. 우울하고 쌀쌀한 데다 빗방울까지 흩날리는 날이었다. 젖은 땅을 파서 작은 구멍을 내고 바닥에 새를 내려놓았다. 삽 끝으로 한 번 건드려 죽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흙으로 덮었다.

돌아오는 나에게 거대한 슬픔이 몰려왔다. 이 세상은 로빈이 죽고 참새가 죽는 곳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죽는 곳이다. 모든 사람이 죽는 곳이다. 죽은 사람은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이 다시 오셔서 그들을 살리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 ‘세상에 오신’ 이분은 어디 계실까? 무슨 생각을 하실까? 이런 세상을 보고 어떻게 느끼실까?

예수님께서 우셨다. CTK 2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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