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를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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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를 기뻐하라
  • 트레빈 왁스 | Trevin Wax
  • 승인 201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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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가

글로벌 가스펠 프로젝트

Global Gospel Project
존 레논은 1971년에 발표한  <이매진>Imagine에서 세상에 없는 천국과 지옥을 상상하지 말고 “오늘을 살라”고 노래한다. 그 노래가 발표된 지 4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존 레논의 충고대로 살아간다.

이제 복음이 죽음 이후와는 별로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흔해졌다. 복음은 개인의 영원한 삶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질문에 답하고 있으며, 내일이 아닌 바로 오늘의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분명 사도신경의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심판의 약속은 뒷전으로 슬슬 밀려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의에 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심판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한다. 정의는 오늘날 매우 인기 있는 주제지만 심판은 그렇지 않다. 그저 먼 미래의 일로 여겨질 뿐이다.

하지만 정의와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심판 없는 정의는 완전하지 않다. 하나님은 무엇이 잘못인지 먼저 밝히시지 않고는 그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신다. 세상을 완전히 정의로운 곳으로 이끄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다. 심판과 정의 중 하나라도 놓친다면 복음의 의미도 놓치게 된다.

 


심판을 가벼이 여기니 좋더라?

왜 우리는 심판이라는 개념을 가벼이 여겨야 한다고 압박을 느낄까? 사도신경에 나오는 심판에 관한 내용 중 어떤 면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영원한 지옥이라는 개념을 거북하게 여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원한 심판이라는 불편한 장애물을 없앤다면 기독교가 좀 더 세상의 입맛에 맞는 종교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심판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 한 가지도 없어진다. 심판이라는 장애물을 없애려는 욕망이 복음 전도의 긴급함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심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는 복음 전도에 게으른 우리의 양심을 달래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지옥에 관한 기독교의 전통적 견해를 외면하면, 구원 받지 못한 채 죽은 친구와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감정적으로 잘 대처할 수 있다. 할아버지가 지옥에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심판을 무시하면 이런 곤란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또한 심판을 외면하면 자신의 악과 직접 대면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서구 사회는 대체로 인간의 잔학한 행위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 서구 사회가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나 아우슈비츠, 르완다 학살을 직접 겪었더라면 정의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정의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의 죄와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심판을 무시하려는 이유는, 어쩌면 불의를 고착시킨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기보다는 그저 숨기고픈 마음이 크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도신경의 그 불편한 구절을 무시할 때 우리가 잃는 것은 무엇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 구절을 해석하면서 “심판에 관한 지식은 왜 우리를 위로하는가?”라고 질문한다. 얼핏 보면 이상한 질문 같다. “예수님이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왜 위로가 된다는 것일까?

‘심판의 날’이라는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가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겐 두렵게 들린다. 종말에 관한 무시무시한 영화 장면들이 머리를 스친다.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성경을 바탕으로 심판을 이해한다 해도 두려운 건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정의로운 심판이 우리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 위에 임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럼에도 하나님의 심판에는 우리를 위로하는 무언가가 있다. 요리문답을 만든 이들이 복음의 줄거리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 무엇,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바로 그 무엇 말이다.  
 

심판이 오고 정의가 온다

인간은 정의를 향한 갈망에 단단히 묶여있다. 우리는 인생이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생은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인생이 ‘지금은’ 공정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잘못이 바로잡히고 정의가 실현될 그 날이 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날에 모든 것을 완전히 곧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신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언젠가 모든 잘못이 바로잡힐 것이라는 약속은 불의에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된다. 이 어지럽고 무분별한 세상은 현 상태로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정의를 실현하실 것이다. 그분의 의로움을 모든 사람이 보아 알게 될 것이며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해질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정의로운 세상이란 개념에는 무서운 면도 있다.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의 악을 모두 제거하신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그 완전한 세상에 거할 수 있을까?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우리가 한편으로는 문제의 일부임을 깨닫는다면 어떻게 될까?

구속이라는 우주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의 자리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단순히 악의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니다. 우리는 선하고 인자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항한 악한 반역자들이다. 소련 공산주의 치하에서 고통을 겪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수용소 군도」에는 매우 공감 가는 구절이 등장한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선이 국가나 계급이나 정당 사이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을 가르며 지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우리는 정의를 갈망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정하심을 기억하자. 그분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예수의 다시 오심은 기쁜 소식일 수 없다.

 

진짜 기뻐해야할 이유

우리 문화가 하나님의 정의를 거부하며 그 필요조차 인정하지 않는 다원론의 형태로 흘러가고 있지만, 심판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 관점을 유지해야 할 확고한 성경적 이유가 있다.

심판은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세상의 모든 잘못된 일(전쟁, 기근, 질병 등)의 종식으로 이해한다면, 왜 사도 바울이 심판을 복음의 일부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롬2:15-16).

구약도 하나님의 심판이 기쁜 소식이라고 말한다. 시편 96:13은 “모든 피조물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라고 노래한다. 분명 성경 기자들은 심판을 기쁜 소식으로 여기고 이를 찬양했다. 예수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소식은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를 즐겁게 한다.

심판의 개념을 없앤다는 것은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기독교의 희망을 꺾어버리는 것과 같다. 정의롭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으신 정의를 향한 갈망이 사라지는 것이다. 심판이 없다면 복음은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악하게 대하는 문제도 해결 할 수 없다. 심판을 부정하는 것은 죄의 중대함과 그 심각성을 없애는 것이다. 죄로 물든 우리의 모습을 잊어버린다면 은혜와 함께 찾아오는 놀라운 감사를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한 편으로는 진노에 차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한없이 자비로운 두 가지 상반되는 성품을 지닌 분이 아니다. 사랑은 그분의 본질적인 성품이지만 그 사랑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감상적인 사랑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질투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사랑에 기초한다. 성경적인 심판은 언젠가 정의가 실현될 것을 보증한다.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없애는 것은 1차원적인 하나님만을 남겨두는 일이다. 우리가 쉽게 대할 수 있는 감상적인 하나님으로 가공하는 것이다. 그분은 머리를 끄덕이시며 우리의 행동을 눈감아 주신다. 우리의 삶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관대한 노인처럼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뭐든지 이해해주는 아빠로만 보기에는 이 세상의 악이 너무나 심각하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훨씬 납득할 만하다.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까닭은 그분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인신매매하는 모습과 약물을 파괴적으로 사용하는 모습, 아프리카의 집단 학살과 사람들을 끊임없는 공포로 몰아넣는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지켜보고 계신다. 그리고 창조주인 그분을 반영한 피조세계를 사랑하시기에 정의로운 진노를 발하신다.

정말 두려운 신은 성경이 말하는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을 보며 눈을 감고 어깨를 으쓱하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무시하는 신이다. 이런 것이 사랑일까? 죄에 대해 전혀 분노하지 않고 아무런 형벌 없이 악을 내버려 두는 신은 경배할 가치가 없다. 심판하지 않는 신은 사랑이 넘치는 신이 아니다. 사랑이 부족한 신이다.

우리는 자비로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상에 살고 있음을 이해할 때에만 영원한 심판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알면 죄악 때문에 망가진 세상과 그 고통을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멸망하는 불이 아닌 정결하게 하는 불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정결하게 하시고 그분의 임재가 다시 채워질 공간을 마련하실 것이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 직접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는 이유는 죄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가 그분의 선한 창조세계를 망가뜨렸기 때문에 죄를 미워한다. 하나님이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은 그분의 자녀를 향한 크신 사랑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시고 창조세계를 회복하신다는 말로는 뭔가 부족하다. 이 말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죄와 심판의 결정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죄에 대해 노하시는 이유는 죄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죄는 그분의 이름을 더럽힌다.

하나님의 형벌을 일반적인 잘못에 대한 감정 없는 반응으로 바라보며 심판을 비인격화 할 때 우리는 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죄는 단순히 우리에게만 해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저지르는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저지르는 것이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을 때(창39:6-12), 요셉은 그녀와 동침하기를 거절했다. 그 행동이 보디발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중죄였기 때문이다. 요셉은 그의 주인에게 죄를 짓는 것(사실상 그의 등 뒤에서 칼을 꽂는 것)이 하나님의 심장에도 비수를 꽂는 일임을 깨달았다. 요셉은 다른 사람에게 짓는 죄라도 하나님을 겨냥하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왜 하나님은 심판에서 우리를 한 사람씩 직접 다루셔야 하는가? 우리의 죄가 그분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을 겨냥하고 있기에, 우리는 그러한 기준에서 죄를 다뤄야 한다.

심판의 개념은 사회에 유익하다. 실용적 이유에서만 심판을 복음의 일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무엇보다 우선해 심판을 믿는 까닭은 성경이 심판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심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기쁜 소식이다. 사회 비평가 디네시 수자는 「죽음 이후의 삶, 그 증거」In Life After Death: The Evidence에서 심판이 있는 사후 세계에 대해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사후 심판에 대한 기대가 있을 때 사회가 더 잘 기능한다고 말했다.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와 같은 공산당 정권을 생각해 보자. 내 아내는 그런 배경에서 성장했고 그곳에서 일어난 온갖 불의한 일들을 직접 목격했다. 차우세스쿠는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에 그는 국민들을 계속 굶주리게 하면서 자신은 호화롭게 살 수 있었다. 창조주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차우세스쿠는 자신의 모든 이기적인 욕망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며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심판의 개념을 우습게 여기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직접 대면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을 보지 못하고 세상의 악만을 능숙하게 가려낸다.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도 영원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을 마주할 때 그분의 완전한 공의 앞에 두려워 떨게 된다. 하지만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게 된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닌 그분의 은혜다.
 

반역자에게도 희망이

래리 킹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기독교 설교자들에게 예수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냐고 묻곤 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살인자에 대해 묻기도 한다. 그런 사람은 형벌을 피할 수 있는가? 살인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사실 범죄자가 형벌을 면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는 동시에 정의를 지지하신다.

정의를 갈망하지만 고난은 피하고 싶은 반역자들에게도 희망이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정의와 자비를 가장 분명하게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며 의롭게 하시는 분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죄 없음을 입증한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세상 법정의 판결을 뒤엎으셨고 아들의 무죄를 선언하셨다. 우리의 대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의로우신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이다.

심판의 하나님은 세상의 악을 완전히 제거할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은혜 안에서 그분은 의로운 심판자이며 자비로운 구원자다. 악에 대한 심판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독생자에게 임했다. 정의와 은혜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이 둘은 십자가에서 만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빛 가운데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은혜의 빛 가운데서 용서를 받을 때 심판과 자비는 모두 기쁜 소식이 된다. CT

 


트레빈 왁스 최근 「일그러진 복음」(생명의말씀사 역간)을 출간했으며, 위 글은 이 책의 일부를 각색한 것이다.
Trevin Wax, ""Rejoicing in the Wrath" CT 2012:7/8; CTK 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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