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과 신학 > 신학 이슈
천국 체험은 성경을 넘을 수 없다성경과 충돌하는 신비한 체험은 제 아무리 신앙에 유익을 끼친다 해도 결국 무익하다
김성봉  |  CTK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1.19  
트위터 페이스북네이버밴드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천국 간증 베스트셀러 「천국에서 돌아온 소년」의 주인공이 이 책의 내용은 거짓이라고 밝혀 파문이 일고 있다. '천국 체험'에 대한 균형 잡힌 사고와 바르고 건전한 신학적 이해를 위해, 2013년 1월호에 실은 김성봉 목사의 글을 다시 소개한다. CTK    

‘천국에 다녀왔다’는 증언에 사람들은 매우 흥미를 갖는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종교다원주의자들도 비슷한 증언을 한다니 호기심도 발동한다. 이런 증언을 실은 책들이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국내에도 다수 소개된다는 점은 새삼 놀랍다. 천국(과 지옥) 체험은 현재 한국 교회에도 새롭게 떠오르는 이슈다. 천국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여러 사람들이 전국의 교회를 돌아다니며 간증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판타지 영화 한 편처럼 재밌기까지 하다. 하지만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천국 체험’이 사실인지를 차치하고도 그 증언들을 신학적 혹은 신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천국 체험’인가
이런 현상의 원인은 사회적, 종교적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먼저 사회적 이유로는 경제위기를 꼽을 수 있다. 유럽, 미국, 한국 등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경제위기는 이 땅에 대한 기대보다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을 높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자살도 생을 끝낸다기보다는 다음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성을 비판함으로써 영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 역시 계기가 되었다. 그 예로 서양에서는 요가, 기, 단 등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요가학원이 매우 성행하기도 한다.

종교적(기독교적) 이유로는 오늘날 강하게 일어나는 신비주의적 경향이 이러한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한동안 유행했던 열린예배 류의 종교행위가 시들해지고, 지금은 이머징예배 현상을 보이는데, 이는 신비주의와 연결된다. 직통계시나 미국의 아이합(IHOP, International House of Prayer), 신사도 운동 등도 같은 흐름에 있다. 종교다원주의 영향 하에 이단 개념이 희미해지고, 세대주의를 공공연하게 옹호하고, 심지어 H목사, O목사가 지옥에 있다는 내용의 설교가 떠돌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오늘날 경험을 추구하는 세대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이머징 교회와 연결되면서, 그들 사이에서 요즘 소위 잘 나가는 교회의 예배는 ‘내가 뭔가를 하는 예배’다. 가만히 말씀을 듣기보다는 어떤 행위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이런 유의 유행이 거세진 측면이 있다. 오늘날 이런 기독교적 흐름은 성경에 대한 관심보다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학의 자리
물론 이런 기독교의 영적 체험을 두고 혼란이 있다고 해도 물질주의적 사고를 기초로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신경과학의 입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임사체험이란 뇌가 임박한 죽음을 처리하는 동안 발생하는 전기적·화학적 반응에 불과하다”는 신경과학 신학자들의 견해는 천국 체험의 사실여부를 떠나서 분명히 경계해야 한다. 영적 체험을 뇌의 단순한 물질적 반응으로만 보는 것은 기독교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초월성이 없는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라 이성 활동의 사회학적 산물이다. 영적 체험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초월적 종교현상에 속한다는 사실은 거부할 수 없다. 정확하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영적 교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영혼의 기능과 관련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미 5세기에 어거스틴은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 ‘영혼의 바라봄인 이성’(ratio)을 강조한 바 있다. 즉, 이성은 보이는 세계의 감각으로부터 자극을 받아서 지식을 생산하고, 성령의 조명을 통해 깨달음과 지혜를 얻어 마침내는 참된 진리를 알게 되는 인식의 주체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사람이 영혼의 기능인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어거스틴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영적 체험은 뇌의 단순한 물질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인간이 영혼의 기능인 이성을 통해서 경험하는 사실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과학이 영적 실재를 증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과학이 하나님의신비하고 오묘한 일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과학은 자신의 본래 의무인 창조세계에 깊이 숨겨진 원리를 찾고 발견하는 것에서 안식을 누리고 만족해야 한다. 기독교가 과학을 부정하거나 천시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창조세계에 담긴 하나님의 지식인 일반계시를 탐구하는 자리가 과학의 본래 자리임을 확인시킬 뿐이다. 특별계시의 안내를 받지 않은 과학은 인간이 보기에 위대한 것을 발견 혹은 발명할지라도 오직 땅에 관련한 발견과 발명일 뿐 하늘의 것과는 상관이 없다. 과학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과학의 정직함이다.

체험과 신앙
천국 체험의 사실 여부를 증언자의 진실성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 증언자가 신뢰할 만하면 그의 천국 체엄을 방언 같은 영적 체험으로 이해할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그 영적 체험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을까? 아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이 창조주시오, 구원자시며, 온 우주가 그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그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에서 구속하시고 우리 삶을 이끌어 가심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안식한다는 약속을 소망하며, 우리가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성경에 기록된 영적 체험, 즉 다양한 이적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실제 사례들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이적들은 예수가 신적 권능을 통해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한 것이자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말해준다. 인간은 악하기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마구간에서 태어난 초라한 인물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인정했던가? 인생들의 마음이 겸손하여 흠모할 것 없는 예수를 보고 메시아로 인정했다면,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이적을 행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의 이적도 신적 권능을 통해 한 마디 명령으로 실제 발생했다. 이적은 일관되게 이어졌고 확실한 증거로 성취되었으며, 자신의 선지자와 사도됨을 나타내고 확증하는 표징이었다.

하지만 이적은 하나님만 행하시지 않고, 사단도 행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악한 것조차 선으로 사용하시는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은 구속과 심판에 관한 비밀한 뜻을 이루기 위해 사단에게 미혹의 수단으로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허락하셨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함께 있을 것이라(살후 2:9).” 우리는 성경의 이런 증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합당한 분별력이 요구된다. 이적을 일으키는 주체와 그 목적이 참으로 옳은지 성경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교회사를 보면 건전한 신앙의 선진들은 다음과 같은 이해를 기준으로 이적을 분별했다. ‘하나님이 이적을 통해 진리를 왜곡하거나 악을 촉진하지 않으시듯이, 사단도 이적을 통해 진리를 확증하거나 선을 촉진하지 못한다.’ 이런 전제 하에 ‘표적이나 기사가 아무리 위대하거나 무수하다 할지라도 객관적으로 정리된 공적 교리에 반하는 이적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천명했다. 이것은 먼저, 영적 체험이 아무리 신비하고 놀라운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기록과 상반될 때 결코 인정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그 어떤 이적이라 해도,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을 신앙주제에 따라 객관적으로 체계화하고, 다양한 이단들과 논쟁하면서 사도적 전통에 근거해 정리한 교리나 신앙고백서들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과 공적 진리에서 벗어난 어떠한 영적 체험도 존중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참된 이적을 체험한 인생은 교회의 질서를 존중하고, 성경과 공적 고백으로서의 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보면 신비한 체험 자체를 성경적이고 교리적인 판단 위에서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체험한 순간부터 직접 경험한 이나 간접적으로 보거나 들은 이들 모두가 오해할 수 있다.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은 이를 경험케 한 하나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오용할 수 있고, 이를 보거나 들은 사람들 역시 본래 허락된 의도와 상관없이 오직 영적 체험자에만 집중함으로 잘못된 기대를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바른 조명 없이는 연약한 인간이 영적 체험을 순수하게 감당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교회사를 보면 중생, 회심, 삶의 갱신을 이끄시는 성령의 역사보다는 이상한 영적 체험이나 계시, 기적 등을 더 가치 있게 생각했던 개인이나 집단이 늘 있었다. 비정상적인 것에 관심을 두면서 신의 현현이나 황홀경, 환상, 극적인 망동에는 열심인 반면, 성령의 정상적 사역인 하나님의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신앙 성숙에는 귀를 닫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바울도 성령의 다양한 은사와 능력보다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교회를 세우며, 사랑의 실천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교회사 속에서도 신비주의가 교회를 유익하게 한 때는 결코 없었다. 오히려,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성경의 기록을 잘못 해석하고, 객관적 교리들을 훼손하고, 신앙을 개인적이고 사적으로 만든 경우가 허다했다. 온갖 이단의 온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상대적이고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방임적 사고를 부추겼다.

성경은 거듭난 신자만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한 실례로, 히브리서 6:4-6의 해석과 관련해 16세기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인물 중 하나인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는 거짓된 신앙을 가진 사람도 어떤 목적을 위해 일시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맛볼 수는 있지만, 성령이 그들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기까지 평생을 두고 머물지는 않는다고 이해했다. 외식하는 자들과 유기자들은 성령의 일시적 은사를 맛볼지라도, 구속의 참된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를 전제로 하면 기독교 안에서 목격되는 모든 영적 체험들은 절대적으로 분별해야 한다. 이 때문에 교회는 초대교회 이래로 모든 은사를 주시는 성령에 관한 사역에서 신비한 체험보다는 중생의 역사에 절대적 관심을 두었다. 성령을 모든 구원받은 자들의 중보자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구원의 은택을 교회에 효과적으로 적용하시는 중생과 신앙의 주역이요,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는 진리의 영으로 이해했다. 중생과 구속의 역사가 없으면, 아무리 놀라운 체험일지라도 참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체험과 성경
천국을 체험했다는 증언들이 신학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 수 있기 때문에 신중히 접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체험들이 신앙뿐 아니라 성경을 이해하는 데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 체험을 은사 중 하나로 볼 수도 있다는 의견을 따르면, 그 경험 자체가 주는 신앙적 유익이 있을 수 있다. 한 사람을 교회로 새롭게 부를 때, 의심 많은 신자에게 말씀을 확신시키거나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는 신자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혹은 사람들이 다 헤아릴 수 없는 어떤 목적과 관련해 다른 은사들처럼 허락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체험이 성경과 충돌할 때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비한 체험이 신앙에 어떤 유익을 준다 해서, 그 체험이 성경의 내용을 벗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신학적 분별없이 인정한다면, 결과적으로 성경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어떤 신앙적 체험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이 서술한 이상을 말한다면 성경의 신적 권위는 사라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내용이 어떤 신앙적 체험들에 의해 추가되거나 보충될 수 있다고 믿어지면, 이미 성경은 더 이상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볼 수 없다. 우리가 소유한 성경은 구원을 보증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인간의 책으로 전락할 수 있다. 더욱이, 그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단들의 오류를 방어하기 위해 공적으로 정리한 신앙고백(교리)을 넘어서 신앙적 체험을 주장한다면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진리의 객관성도 더 이상 언급할 수 없게 된다. 체험은 분명 어떤 면에서 사람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체험 때문에 성경을 단순히 호기심으로만 읽고, 언제든지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을 첨가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객관적 신앙고백보다는 신앙적 체험에 신앙의 모든 기준을 두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신앙적 체험을 우선하면 성경도, 교리도, 역사 속에서 논의해온 바른 신학도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신앙의 객관성을 증명함에 있어서 언제나 접할 수 있는 계시된(기록되었든 아직 기록되지 않았든)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결코 다른 어떤 것에 주목하지 않았다. 교회의 전통, 영적 체험, 인간의 숙고에 근거해 신앙의 객관성을 확보하지 않았고, 오직 계시된 기록인 성경에서만 그 근거를 찾았음을 알아야 한다. 이 기준을 잃게 되면 성경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와 기록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성경과 성경에 근거한 신앙고백의 기준을 넘어서는 소위 은사체험은 교회를 향한 강력한 도전이요, 미혹이며, 교회를 무너뜨리는 재앙일 수 있다.

의문
바울은 왜 자신이 “셋째 하늘(천국)”에 들려 올라갔다가 온 후에 “사람이 가히 말할 수 없는 형용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을 금했을까? 그 절대적인 이유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바울이 자신이 기록한 서신서에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표명할 때, 자신의 천국 체험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특별한 예정에 근거해 구원의 원리를 설명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체험으로 확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에 근거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가 사실이라면, 우리가 ‘천국 체험’을 신학적 혼돈을 감수하면서까지 특별한 것으로 여길 필요가 있겠는가? CTK

김성봉 신반포중앙교회 담임목사이며, 안양대학교신학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나눔과섬김)의 저자.

[관련기사]

김성봉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밴드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68길 98 5층  |  대표전화 : 080-586-7726  |  팩스 : 02-6919-1095
발행인 : 오정현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은홍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은홍  |  사업자등록번호 : 214-88-27116  |  통신판매업신고 : 제01-2602호
Copyright © 2017 Christianity Today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