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이 가장 아름다운 숫자인 이유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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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 가장 아름다운 숫자인 이유 [구독자 전용]
  • 마이클 리브스 | Michael Reeves
  • 승인 2013.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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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이야기’는 철학적 골칫거리가 아닌 선과 아름다움에 관한 매혹적인 서술이다

[글로벌 가스펠 프로젝트 Global Gospel Project]

ⓒ KEITH NEGLEY

군가의 사적인 대화에서 내 이름이 들리면 엿듣고픈 유혹을 참기란 정말 어렵다. 물론 대체로는 듣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지만, 한번은 도무지 그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귀를 기울였다. “리브스는 삼위일체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써요”(눈을 굴리며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짧은 한마디는 여전히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 사람은 나를 매혹시킨 주제를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리브스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리브스는 삼위일체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라고. 그의 표현 방식에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 잘 담겨있다.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은 살아계시지만, 삼위일체 이야기는 인간의 정신 구석진 곳 어딘가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로 놓여있다고 말이다.

수학적인 수수께끼. 불가해한 기이함. 이상할 뿐 아니라 당황스럽기까지 한 개념. 그렇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삼위일체가 거추장스럽고 이상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있는 듯하다.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보기 흉한 사마귀처럼 돋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에 대해 나눌 때 하나님의 구원과 거저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사실은 말하기를 꺼린다. 우리는 복음의 아름다움은 열정적으로 이야기하지만, 복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별로 그러지 않는 것 같다.

이제는 그런 난센스를 벗어나야 할 때다. 아름다운 복음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며 아름다움의 정수도 아니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교회와 신앙의 건강을 위해 우리는 그분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꼭대기에 얹은 신학 장식이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바로 삼위일체시다. 그래서 우리는 단호하면서도 철저하게 모든 면에서 삼위일체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누릴 수 있다. 그래야만 참된 복음을 주시기에 합당한 선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목적인 영생의 본질이다. 예수님이 기도하셨듯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출발점은 어디인가

문제는 삼위일체가 그 위험천만하다는 관념의 철조망에 둘러싸여있다는 점이다.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신비’라는 말을 앞세워 모든 질문을 잠재운다. 삼위일체가 신비라면 대체 왜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애써야 하는가? (현대적 의미의 ‘신비’ 개념을 생각해선 안 된다.

신약 시대의 신비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니라 성도들에게 계시된 감춰지지 않은 진리였다.) 좀 더 과감한 이들은 이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은 잎의 세 부분과 같고, 물의 세 가지 상태와 같고, 정부의 세 부서와 같다는 등 다양한 예를 든다. 하지만 이러한 예들은 결국 하나님이 더 이상한 분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나뭇잎이나 물, 정치 구조와 닮았다고 생각해서 그분이 삼위일체라고 믿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를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드러낸다.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정체성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7:2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여…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셨다.

이 때문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고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셨을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생명과 사랑을 주었던 아들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니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과 사랑을 주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삼위일체가 왜 기쁜 소식인지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사랑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히 아들에게 사랑을 나눠주시며 그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기뻐하시는지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아들 위에 임하실 때 아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과 기쁨을 공표하셨다.

성령은 아버지의 사랑을 알리고 아들이 “아빠!”라고 외치게 하는 분이기 때문이다(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양자에게도 동일하게 행하시는지 보려면 로마서 8:15갈라디아서 4:6을 참고하라).

그래서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자’(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  ‘그리스도’)라 불렸다. 아버지가 그분을 사랑하고 축복하시며 성령으로 기름부어 권위를 주셨기 때문이다.

이 모든 점은 우리가 성경의 예수를 좇기 시작한다면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한은 이렇게 적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예수를 믿으라는 단순한 요청도 결국 삼위일체의 신앙으로 향하는 초청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가 되시며, 그가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이심을 믿는 신앙 말이다.

예수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드러낸다고 해도, 그가 나타낸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철학적인 골칫거리라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바로 그 무엇과도 다른 사랑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과 교통하시면서 아들을 사랑하시고 그 아들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 말이다.
 


진정 아름다운 복음

하나님의 삼위일체 속성이 왜 중요한지 알아보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이 그저 한 분이셨다면(한 위격만을 지니셨다면)? 만약 그랬다면, 그분은 창세전부터 영원토록 홀로 모든 것이었을지 모른다.

관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랑할 사람이나 대상도 영원히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에 사랑이 존재할 리 없다.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원하실까?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교제를 해본 적이 없는 분이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실까? 그 정의상, 한 분이신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랑과 관계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복음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복음과 비교하면 빈약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할 때 우리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아버지의 기쁨과 즐거움이자, 영원한 사랑을 입은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그 사랑을 동일하게 나누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신다. “아버지의 품 속”(요1:18)에서 오신 그분은 성도들과 함께 거하길 원하신다(요17:24).

또한 우리가 용서받은 죄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아들과 같이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랑받는 자녀로서,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 나아가길 원하신다.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시기에,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했던 엄청난 고백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

“나를 사랑하심같이 그들도 사랑하시며”(요17:23).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은 이제 우리를 향한다. 이러한 하나님과 함께할 때 우리는 단순한 용서 이상의 기쁜 소식, 즉 자녀로서 누리는 안전함과 친밀함을 얻는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사랑받는 자녀들! 이토록 우리를 가깝게 두시고 사랑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얻는 하나님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함께라면 기쁜 소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 위격만 소유한 신들은 신적 초월성 때문에 혼자인 상태를 유지해야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와 함께하시며 그분의 생명으로 이끄신다.

성령은 우리의 눈을 열어 자비로 가득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게 한다. 성령은 우리가 처음으로 성자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언제나 즐거워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성령을 통해 성부 하나님은, 그분이 아들에게서 언제나 발견하셨던 그 기쁨을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도우신다. 또한 성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셔서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깊은 사랑을 알게 하신다.

즉 성령은 우리를 신성하게 한다. 아버지와 같이 아들을 즐거워하게 하며, 그리스도와 같이 아버지를 즐거워하게 한다.

만약 하나님이 한 분이셨다면, 그분의 신성함은 이처럼 타자를 향한 사랑과 즐거움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영원토록 관심을 기울일 대상이 자신뿐이라면, 자아도취야말로 가장 숭고한 형태의 신성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애나 자아도취는 기독교의 타자중심적인 하나님과는 정반대되는 개념들이다. 그분은 포로 된 우리를 해방시켜 자신에게 나아오게 하시며, 그분을 본받아 우리도 다른 이들을 사랑하게 하신다. 삼위일체인 하나님에게만 이러한 해방이 가능하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넘치는 사랑과 기쁨을 소유한 매력적인 하나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에게서 온전한 만족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자신이 경배하는 것을 닮아가기에, 이러한 하나님을 계속해서 알아간다면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기뻐하고 우정을 나누는 매력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세상이 우리에게서 어떤 영향을 받을지 상상해보라!

하나님의 삼위일체 속성은 그리스도인의 인생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모든 생명을 적신다. 하나님은 관계의 하나님이시고, 아버지는 성령 안에서 아들을 영원토록 알고 사랑하시기에, 이러한 하나님 안에서 관계와 사랑은 온전한 이해를 얻게 된다.

사실, 관계와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이유다. 질투심이 아니고서야 고립된 신이 그러한 것들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영원토록 역동적인 조화를 누리며 존재하기에, 우리는 조화로운 세상을 생각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서로 다른 음표가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 가득한 조화는, 남자와 여자, 흑인과 백인,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이 사랑으로 어우러져 획일이 아닌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근거를 제공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해하는 부분은 아주 작다. 그것은 마치 먼 곳에서 열린 잔치의 향기를 맡는 것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삼위일체 속성이 기독교의 장애물이 아니라, 기독교를 선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만드는 필수 진리임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비실제적인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누릴 수 있는 진리다. 우리는 이제 “오, 먼 곳에 있는 창조자여”라고 근심 어린 목소리로 외치기보다, 성자 하나님의 관계와 특권을 동일하게 누리며 “아버지여”라고 기도할 수 있다. 성자 하나님의 담대함으로 그렇게 부를 수 있으며, 그분과 같이 성령 안에서 안전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섬기는가

예언자적 통찰력이 없다 해도, 오늘날 서구사회에 인격적인 하나님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팽배해있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근사한 신의 영성? 별 흥미 없는 이야기다.

신을 불신하는 책을 쓰는 것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혹시 이 세상이 반대하고 있는 것은 특정한 신, 즉 하늘에 있는 냉담한 독재자와 같은 신이 아닐까? 흔해빠진 무신론은 부지불식간에 더 나은 신을 열망하고 있는 일종의 불만의 표시가 아닐까?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 학생들에게 어떤 신을 불신하는지 질문했던 적이 있는데, 내가 흔히 들었던 설명은 바로 사탄에 대한 것이었다. 자기중심적이고 무자비한 불량배와 같은 존재 말이다.

만약 하나님이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생명과 축복의 성령을 아들에게 영원토록 부어주시지 않았다면, 그 학생들의 설명이 정확했을지 모른다. 만약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아니었다면, 그는 사랑 없이 영원토록 살아야 할 고립된 존재였을 것이다.

사실 이 모든 이야기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래의 그분보다 훨씬 덜 아름답고 선한 존재를 마음속에 그리며 하나님의 속성을 집요하게 곡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빈약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분명치 않다는 말은 듣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아버지가 아닌 악마에 가까운 하나님은 본능적으로 꺼려할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명확히 선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와 교제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은 근본적으로 뿌리가 없는, 복음의 주체인 하나님과 단절된 복음이 될 것이다.

이는 결국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다. 교회는 피상적인 복음으로 오랫동안 생존할 수 없으며, 교회 밖에 있는 이들 역시 그러한 복음을 믿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분명하고 담대하게 이야기할 때, 성령의 기름부음을 입어 성부를 계시하는 성자 하나님으로 시작한다면, 우리가 알고 세상에 알려야  하는 그 하나님은 정말로 근사할 것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하나님, 우리를 이끄시어 영원한 사랑과 교제를 나누시는 아버지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 말이다. CT
 


마이클 리브스 영국 Universities and Colleges Christian Fellowship의 신학 디렉터를 맡고 있다. 최근 저서로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 기독교 신앙 입문」Delighting in the Trinity: An Introduction to the Christian Faith이 있다.

Michael Reeves, "Three Is the Loveliest Number" CT 2012:12; CTK 2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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